[경남의 재발견] 자연조건 모두 갖춘 하동, 그곳에 몰려드는 사람들

산은 지리산이다. 강은 섬진강이다. 바다는 한려수도 한 자락이다. 기름진 땅은 평사리 들판이다. 이 모두를 품은 고장 이름은 하동이다.

이 땅에는 자연이 베푼 자산이 유난히 넉넉하다. '강 동쪽(河東)'이라는 소박한 이름은 그 매력을 절반도 담아내지 못한다.

이곳 사람들은 어지간해서 다른 고장 생김새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하동 자랑은 늘 산과 강, 바다를 묶으면서 시작한다. 가진 게 많아서 여유롭고 과장이 없어 당당하다.

금오산 정상에서 내려본 바다. 왼쪽은 사천, 맞은편은 남해, 오른쪽은 광양이다./박민국 기자

하동 서북쪽에서 뻗친 지리산 줄기는 남쪽으로 향하면서 그 기세가 수그러든다. 하지만, 한풀 꺾여도 지리산이다. 영신봉(1652m), 덕평봉(1522m), 명선봉(1586m), 토끼봉(1534m) 등 치솟은 봉우리는 당당하다. 더불어 형제봉(1115m), 구재봉(768m), 금오산(849m) 등 1000m 안팎 봉우리가 곳곳에 솟아 있다.

산줄기가 두루 뻗은 땅인 만큼 들판은 귀하다. 하동군 전체면적(675.23㎢) 가운데 농경지는 고작 14.9%(100.94㎢)이다.

하지만, 섬진강 물줄기를 머금은 땅은 기름지다. 형제봉(악양면)에서 또는 섬진강 건너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너른 들판은 이 땅에 농지가 넉넉하지 않다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한다. 그래도 하동 사람 10명 가운데 6~7명은 농가 인구인 만큼 여기 주 산업은 농업으로 보는 게 맞다. 농업을 빼면 숙박·음식점업과 도·소매업 종사자가 많다.

잘생긴 땅 생김새는 그저 자랑거리로 그치지 않는다. 제법 든든한 살림살이 밑천이기도 하다.

1. 이것저것 빼도 남는 섬진강

곧 저물 햇살이 섬진강 물결 위에서 잔잔하게 흩어진다. 반짝이는 하얀 모래밭은 너르다. 풍요로운 백사장은 바닷가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섬진교다. 하동읍에서 이 다리를 건너면 전남 광양시다. 섬진교 아래에서 온몸을 물막이 옷으로 감싼 할머니와 마주친다. 허리춤에 큰 대야를 묶은 할머니는 천천히 강을 훑는다. 대야는 허리 높이에서 할머니를 따라다닌다. 이런 풍경은 여기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하다. 예부터 유명한 하동 재첩은 그렇게 채집한다. 섬진강을 터전으로 삼은 어머니, 아버지들은 재첩과 재첩을 끓인 국으로 살림을 꾸렸다.

평화롭고 넉넉한 섬진강을 품은 하동 풍경은 섬진교를 건너 광양에서 제대로 보인다. 광양 언덕배기에서 강과 모래밭, 하동읍 들판과 그 너머 산줄기는 한눈에 들어온다. 모래밭 뒤로 넓게 퍼진 소나무 숲은 '하동송림'이다. 1745년(영조 21년) 강바람과 모래바람 피해를 막고자 조성한 숲이다. 나라 안에서 둘째라면 섭섭한 소나무 숲은 2005년 천연기념물(제445호)로 지정됐다. 아름다운 경치를 은유하는 '백사청송(白沙靑松)'은 이곳에서 비유가 아니라 묘사가 된다.

영호남의 경계가 되는 섬진강. 경남 하동과 전남 구례는 이 강으로 인해 되레 뒤섞여 어우러진다./박민국 기자

하동은 지리산을 머리에 이고, 한려수도에 발을 담그며, 섬진강을 옆구리에 두른 땅이다. 그러나 지리산은 함양 지리산이며 산청 지리산이기도 하다. 한려수도 앞에는 통영·거제·사천·고성·남해 등 뭐든 붙여도 된다. 지리산과 한려수도는 하동이 기댈 수는 있되 독차지할 수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섬진강은 다르다. 경남에서 섬진강을 자랑할 수 있는 땅은 하동뿐이다.

섬진강 물줄기는 전북 진안군 백운면 팔공산 기슭에서 비롯한다. 작은 샘에서 솟은 물은 212㎞에 걸쳐 흐르며 전라도와 경상도를 경계 지었다. 그렇더라도 강이 가른 것은 땅 이름뿐이다. 예부터 영·호남 사람들은 섬진강으로 모여들어 서로 섞였다.

2. 나라에서 손꼽히던 융성한 오일장

하동읍과 화개면 탑리에 서던 오일장은 하동은 물론 나라에서 손꼽는 큰 장이었다. 경남 서쪽 끄트머리 땅에 대규모 장이 들어선 것은 순전히 섬진강 물길 덕이다. 5일에 한 번 장이 서면 섬진강 주변 마을은 물론 영·호남 곳곳에서 배가 몰려들었다. 전남 여수·광양, 경남 남해·삼천포·충무·거제 등에서 출발한 배는 남해를 지나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나루 곳곳에 물건을 내려놓았다. 그 배들이 지나온 길이 유명한 '하동 포구 팔십 리'다.

뭍 길이 두루 뻗치지 않았던 때 배는 가장 효율적인 운송수단이었다. 산에서 나는 것과 바다에서 나는 것은 강가에서 만났다. 그 활기찬 장에 멀리서 보부상까지 몰려들었다. 하동장과 화개장에는 온갖 물건이 풍성하게 쏟아졌다. 사람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하동호에서…./박민국 기자

하지만, 하동에 서던 오일장 활기는 1960~1970년대 들어 부쩍 수그러든다. 이는 철도와 도로 등 뭍 길이 두루 뻗치기 시작한 때와 맞아떨어진다. 상인들은 섬진강이 아니어도 재빨리 장을 옮겨다닐 수 있었다. 하동은 모여들던 땅에서 지나치는 땅이 됐다. 게다가 하동 사람들조차 뭍 길로 수월하게 진주·부산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하동에 서던 큰 시장은 점점 평범한 시골 장터가 됐다.

옛 영화를 잃은 시골 장터는 80년대 후반 대중가요를 통해 느닷없이 명성을 얻는다. 1988년 가수 조영남이 발표한 노래 〈화개장터〉다. 이 노래는 지금 민주통합당 의원인 김한길이 작사했다. 자기 유행가 없는 가수였던 조영남은 이 노래로 톱스타가 됐다. '하동은 몰라도 화개장터는 안다'고 할 정도로 평범한 시골 장도 유명세를 치렀다.

지금 화개장터는 화개면 탑리 길가에 새로 조성됐다. 1997년부터 복원해 2001년 개장한 화개장터는 현대식 상설시장이다. 잘 정돈된 매장과 곳곳에 세운 기념물에서 화개장터에 들인 각별한 공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노래에 담긴 구수한 정감과 향수를 느끼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3. 영·호남엔 없되, 산·강에 있는 경계

하동에 섞인 호남 흔적은 읍에서 밥 한 끼만 먹어도 접할 수 있다. 먼저 내놓는 음식에 밴 맛깔스러움이 그렇다. 여기 사람들은 산·바다·강·들판에서 제철마다 나는 풍성한 먹을거리에 섞인 호남 손맛을 자랑하곤 한다. 당장 남해대교만 건너도 입맛이 다르다는 핀잔에서 그런 자신감이 묻어난다.

음식과 더불어 말투 또한 유별나다. 전남 광양이 시댁인 하동 며느리 말투를 놓고 시댁에서는 경상도, 친정에서는 전라도 것이라고 한다. 하동 며느리는 그저 '하동 사투리'라며 웃어넘긴다. 아닌 게 아니라 하동 말투에는 영·호남 사투리와 억양이 딱히 정해놓은 규칙 없이 버무려졌다.

나라를 망친다는 해묵은 영·호남 지역감정은 하동에 없다. 어림잡아 하동 사람 10명 중 3~4명은 호남과 한집안이라고 할 정도다. 행정 경계가 가른 하동과 광양·구례는 섬진강 양쪽을 터전 삼아 두루 섞인다. 이 때문에 이곳을 잘 아는 사람들은 하동 땅에 놓인 경계는 영·호남에서 찾을 게 아니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벽은 오히려 섬진강 사람들과 지리산 사람들 사이에 있다.

평사리 들판은 농지가 그리 넓진 않지만, 섬진강 덕에 들판은 기름지다. 평사리는 박경리 소설 <토지>의 배경이다./박민국 기자

하동읍·악양면 등 강을 낀 땅은 비교적 풍요로웠다. 쓸만한 들판은 섬진강 한 자락을 붙들고 펼쳐졌다. 이곳에서는 만석꾼 부자도 여럿 나왔다고 한다. 굳이 기름진 땅이 아니더라도 섬진강은 한 살림 꾸릴 정도 밑천은 언제든지 내놓았다. 하지만, 지리산이 성큼 들어선 땅에 사는 사람들 형편은 그렇지 않았다. 없는 땅을 일궈 나온 작물은 넉넉하지 않았다. 산에서 나는 물품을 장에 내놓으면서 형편이 나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하동 장이 번성할 때까지였다. 다른 환경이 낳은 차이는 살림살이에서 드러났다. 그리고 힘은 늘 더 가진 쪽으로 쏠렸다. 섬진강 사람들은 하동 중심으로 향했고, 지리산 사람들은 하동 주변을 맴돌았다. 하동을 움직인다는 강 사람들 자부심은 그만큼 산 사람들에게 설움을 안기곤 했다. 그 묵은 감정은 '골짝놈'·'읍면놈'으로 시작하는 옛사람들 입씨름에서 간혹 엿볼 수 있다.

4. 지리산 기슭에 영험한 땅

화개면에서 쌍계사로 길을 정하면 이 나라에서 풍경이 빼어나기로 손꼽히는 길을 지난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가운데 하나인 '십리벚꽃길'이다. 섬진강 주변 풍요로운 땅에서 영험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십리벚꽃길이라는 것도 색다르다.

하동이 품은 하나뿐인 국보는 쌍계사에 있다. 국보 제47호인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이다. 신라 정강왕이 진감선사를 흠모해 887년에 세운 이 비는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썼다. 쌍계사 대웅전과 마주 보지 않고 약간 비스듬한 각도로 세워진 비는 임진왜란 때 왜병 탓에 금이 가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지금은 비석 둘레에 금속판을 대고 조여 그 형태를 지키고 있다.

하동 지리산 골짜기는 예부터 신령스러운 곳으로 이름났다. 신라시대 최치원이 은거했다는 얘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오늘날 청학동과 삼성궁에서 그 유별난 정취를 확인할 수 있다.

청암면 묵계리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은 삼성궁, 고조선시대 소도를 복원해 1983년 조성 된 곳이다./박민국 기자

현재 지리산 청학동으로 불리는 도인촌은 '유불선삼도합일갱정유도회(儒佛仙三道合一更正儒道曾)'라는 가르침을 받드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유교를 바탕으로 두되 불교·선도·동학·서학을 합쳐 큰 깨침을 얻겠다는 사상이다.

이곳 사람들은 1960년대까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하지만,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고 관광 바람이 불며 오가는 바깥사람을 헤아릴 수 없게 됐다. 지금은 그 양식은 대체로 지키되 바깥세상과 소통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바깥 문물을 늦지 않게 받아들이며, 이곳에 남은 옛 정취를 애써 배워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생김새로는 청학동보다 더 기이한 삼성궁은 청암면 묵계리에 있다. 해발 850m에 있는 구조물은 한풀선사라 불리는 강민주가 1983년 고조선 시대 소도를 복원한 것이다.

삼성궁 입구에서부터 끊임없이 이어지는 돌무더기는 묘한 배치로 보는 이를 당혹스럽게 한다. 길목마다 둔 안내판이 없다면 길을 잃을 정도로 꼬인 길을 따라가면 몇 번 굴을 지나고 인공호수도 지나친다. 그러다 산길을 걸어 좁은 굴을 만나는데 그곳이 삼성궁 입구다. 굴을 지나면 다시 훤히 펼쳐진 삼성궁 도장은 이전까지 거쳤던 기이한 길을 한데 모아놓은 것 같은 모습으로 오는 이를 맞이한다.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삼성궁은 신선도를 수행하는 도장이기도 하다.

삼성궁에서…/박민국 기자

5. 풍요로운 땅이 낳은 영감

하동은 한국 현대 문학사에 큰 자취를 남긴 소설과 인연이 깊다. 여기 사람들은 이 역시 하동이 품은 풍요로운 자연 때문이라고 여긴다.

악양면 형제봉에서 평사리 들판은 한눈에 담긴다. 박경리(1926~2008) 소설 〈토지〉 배경이다. 실제 박경리는 하동 평사리 들판 인상만 글에 담아냈을 뿐 글을 쓰는 내내 마음에 두지 않았다. 토지를 쓰는 동안 그가 평사리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토지에서 평사리는 만들어진 공간이다. 오히려 2001년 토지문학제 참석 때 평사리에 온 박경리가 '평사리에 왜 토지 기둥을 세웠는지 현장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며 고백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하동군은 영민했다. 악양면 평사리 최 참판댁을 중심으로 소설 〈토지〉를 현실화한 공간은 하동이 지닌 또 다른 자산이 됐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미 박경리 〈토지〉와 악양면 평사리 최 참판댁은 하나로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

하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로는 김동리(1913~1995)가 쓴 〈역마〉가 있다. 소설 무대가 된 화개장터에는 소설 줄거리를 정리한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박경리 〈토지〉와 김동리 〈역마〉가 탁월하지만, 그래도 하동을 대표하는 작가는 이병주다.

소설가 이병주(1921~1992)는 북천면 출신이다. 일본에서 공부했으며 1955년 부산에서 국제신보사 편집국장과 주필로 활동했다. 1961년 5·16쿠데타 때 노동조합과 관련된 필화사건으로 구속돼 2년 7개월 동안 복역했다. 1965년 〈소설 알렉산드리아〉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으로 〈지리산〉, 〈산하〉, 〈그해 5월〉, 〈관부연락선〉, 〈행복어 사전〉 등이 있다. 현대사를 소재로 한 선이 굵은 남성적 작품을 많이 냈다. 북천면 직전리에는 이병주 문학관이 있다.

최참판댁에서…/박민국 기자

6. 자취 감춘 하동 김, 갈사만에 거는 기대

금남면에 있는 금오산 정상에서 남해를 내려다본다. 왼쪽은 사천, 맞은편은 남해, 오른쪽이 광양이다. 이리저리 굽은 해안선과 올망졸망 떠 있는 섬은 한려수도 한 자락이 분명하다. 하지만, 멀리 내려다보는 멋들어진 풍경과 달리 가까이서 즐길 수 있는 하동 바다는 별로 없다. 이는 금성면에 있는 화력발전소와 그 너머에 있는 광양제철소 탓이다.

물론 제철소와 발전소가 나라 산업과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된 것도 있을 테다. 그러나 얻은 게 있다고 해서 잃은 게 아쉽지 않을 리 없다. 하동 김도 그 아쉬움 가운데 하나다.

하동은 예부터 맛이 빼어난 김이 나는 곳으로 유명했다. 이 맛난 김은 금남면 갈사만 양식장에서 나는 것들이다. 갈사만은 섬진강 민물과 한려수도 짠물이 만나는 곳이다. 하동 김 맛이 유별난 이유는 이런 환경 덕을 봤다고 보면 되겠다.

   

특히 그 맛은 바다 건너 일본인이 더 탐했다. 일제강점기 하동 갈사 지역은 상수도가 가장 먼저 놓인 곳이라고 한다. 김 양식에 필요한 물을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인은 하동 김이 나기가 무섭게 전량 공출했다. 하동 김은 해방 후에도 상당량을 일본에 수출했다. 이 때문에 하동 김은 영·호남을 벗어난 지역에서는 쉽게 맛볼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하동 갈사만에서 김이 나지 않는다. 광양제철이 들어서면서 1985년 김 양식은 자취를 감춘다.

김이 사라지면서 갈사만은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하동군이 미래 동력을 이곳에 걸면서 그 위상이 살아났다. 바로 '갈사만 조선산업단지' 조성 사업이다. 바다 317만㎡, 육지 244만㎡ 등 총 면적 561만㎡ 규모다. 해양플랜트 등을 중심으로 조선소와 조선기자재, 1차 납품단지가 들어선다. 이 대형 사업이 하동에 안길 것은 뭔지, 또 하동이 잃을 것은 뭔지 당장은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아직 제모습을 갖추지 않은 터에 걸린 기대가 적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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