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황강 물줄기 따라 오롯이 남은 것은 이야기더라

합천은 경남에서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는 곳이다. 그런데 전체 면적에서 72%가 산이다. 도로 하나 닦더라도 1000m 넘는 산이 여기저기 떡하니 버티고 있어 공사도 더디게 진행된다. 그러니 이 지역 사람들은 "돈 되는 땅은 아니다"라는 푸념을 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섞이는 것은 "합천보다 해인사 지명도가 더 높다"라는 말이다. 이제 '해인사 밖 합천'에도 눈 좀 두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이를 담은 듯 자치단체가 2008년부터 지역을 알릴 때 내거는 것이 '水려한 합천'이다. 황강·합천호·정양늪 같은 것이 있는 덕이다. 이 세 가지는 이래저래 합천댐과 연관돼 있기도 하다.

지도에 나타난 황강은 몸집 얇은 뱀이 몸을 꼬불꼬불 비틀고 있는 형상이다. 그렇게 백리(약 40km)에 걸쳐 합천지역 허리를 가로지른다.

황강에는 이곳 사람들 애틋함이 묻어있다. 객지에 나가 머리 희끗희끗해진 이들이 고향을 그릴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황강 은빛백사장'이라 한다. 황강은 흙·모래가 계속 쌓여 강바닥이 주위 땅보다 높은 천정천(天井川)이다. 물 범람으로 둑을 올리다 보니 토사가 쓸려가지 않고 쌓이기 때문이란다.

백사장은 강 주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 사이사이까지 불쑥불쑥 비집고 나왔다. 은빛백사장이 지천을 덮고 있었다.

합천댐은 내세울 만한 경치를 만들어내기도 했고, 황강 은빛백사장을 옛 기억으로 남게 하기도 했다.

옛 기억을 떠올리는 이들은 백사장이 곧 놀이터였다 한다. 학교 끝나면 달려와 모래 위에서 뒹굴었다. 물이 얕아 헤엄칠 필요 없이 걸어서 이쪽저쪽으로 드나들기도 했다. 여름날 해 지면 남자들은 한쪽에, 여자들은 좀 더 구석진 곳에 모여 목욕하던 모습도 흔했다.

지금 황강 모습은 이러한 것과 거리가 멀다. 1988년 합천댐이 들어선 이후 물 넘치는 일 없어 백사장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사람 손도 탔다. 거닐기 위한 길도 조금씩 만들어졌고, 강 주위엔 농토가 더 밀고 들어왔다.

지금은 야영과 레저스포츠 즐기는 곳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래도 매년 수중마라톤대회가 열려 아쉬운 대로 옛 기억을 끄집어 낼 수는 있겠다.

합천호는 댐 건설로 2595만㎡(785만 평)에 걸친 자태를 드러내게 됐다. 늦가을 혹은 초겨울 새벽, 합천호 물안개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사진 찍는 이 발걸음을 유도한다.

정양늪은 황강 지류 아천천 배후습지로 약 1만 년 전에 생성됐다고 전해진다. 합천댐이 들어서면서 황강물이 낮아져 이곳 육지화도 심해졌다. 여기에 사유지 매립까지 이어지면서 습지 생명이 다할 지경이었다. 다행히 2007년 생태공원 조성사업으로 떠났던 동식물이 되찾고 있다. 황톳길을 걸으며 다시금 여러 생명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합천호 인근에 자리한 영상테마파크는 이 지역을 알리는 또 다른 몫을 하고 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이 시작이었다. 영화 제작팀이 마땅한 촬영지를 구하지 못하다 합천에 물어왔다 한다. 이 지역에서는 반색하며 합천댐 지을 때 장비 적치장으로 활용했던 땅을 쓸 수 있도록 도왔다. 개봉 후 전국 관객 1000만 이상 흥행에 성공하면서, 군은 아예 영상테마파크를 조성키로 했다. 수자원공사 소유이던 땅을 사들여 1930~1980년대 서울 모습을 재현하며 지금에 이르게 됐다.

합천에도 인구 20만 명 넘던 시절에는 극장이 두개 있었다 한다. 하지만 인구 5만 명인 오늘날 남아있을 리 없다. 이 지역 사람들이 영화 보려면 아래쪽 사람들은 진주로, 위쪽 사람들은 대구로 발걸음 해야 한다.

합천에는 합천활로(陜川活路)라 이름 붙은 8개 둘레길이 있다. 해인사소리길·영상테마추억길·남명조식선비길·황매산기적길·합천호둘레길·정양늪생명길·황강은빛백사장길·다라국황금이야기길이 그것이다. 어느 것 하나 더하거나 덜하지 않겠으나, 홍류동 계곡을 따라 6km가량 이어진 해인사소리길을 입에 올리는 이 많다. 걷노라면 산소리·물소리·새소리·바람소리에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

소리길을 따라 오르면 해인사일주문에 도달한다. 여기서 왼쪽으로 빠지면 홍제암(弘濟庵)을 맞이한다. 이곳에는 팔만대장경에 가려져 있는 아픈 이야기가 담겨있다. 홍제암은 사명대사(四溟大師·1544~1610)가 은거하던 곳으로 열반 이후 비석이 세워졌다. 오늘날도 그 비석이 남아있기는 하다. 그런데 네 동강 난 것을 힘겹게 붙인 흔적도 함께다. 1943년 변설호(1888~1976)라는 승려가 간사한 말로 일본 경찰로 하여금 깨뜨리게 했다 한다. 네 동강 난 비석은 1958년 복원되었지만, 그 흔적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비석 바로 옆 소나무에는 일제강점기 때 송진 채취 흔적인 칼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기도 하다.

합천읍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호를 따 이름 붙인 '일해공원'이 자리한다. 명칭을 놓고 논란이 많았던 만큼 '새천년생명의 숲 공원'이 입에 더 붙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한편으로 대통령 개인에 대한 평가를 떠나 "역대 다른 대통령과 달리, 재임 기간 고향 합천에 해준게 없다"는 섭섭함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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