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선택에서 후회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 출가”

김상노 전 도의원은 1995년 만 30세로 제5대 경남도의회에 최연소로 입성했다. 의정활동 하면서 ‘젊은 사람이 열심히 한다’는 말과 함께 ‘괴짜’라는 이야기도 동시에 들었다. 꽤 시간이 흐른 지금 ‘자명(48) 스님’이라 불리고 있다. 그는 현재 동남아세아 불교연합 사무총장․대한불교조계종 보리수 증진회 지도법사․대한불교조계종 네팔 보광선원 한국지부장․보광정사 주지를 맡고 있다. 도의원 출신이 출가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니 원래 그는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창원시 마산합포구 부림동 있는 ‘보광정사’로 향했다.

“노래 힘은 위대하다” 찬불가 음반 발매

지난 9월 1일 창원시 북면 무량사에서는 ‘산사음악회’가 열렸다. 자명 스님 ‘음성공양 1집 발매’ 기념 자리이기도 했다. 이번 찬불가 음반에는 ‘영가전에’ ‘사박걸음으로 가오리다’ ‘얼마나 닦아야 거울마음 닮을까’ 등 모두 9곡이 담겼다. 이날 공연에서 자명 스님은 마이크를 오른손에 쥔 채 때로는 머리를 뒤로 제쳐가며 열창했다. 무대 위 공연하는 사람으로서 어색함은 전혀 없었다

12일에는 지역 문화인들 도움을 얻어 창원시 의창구 명서동에 있는 도파니 아트홀에서 ‘겸사겸사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찬불가 음반 발매는 곧 ‘음성포교’다.                      “저는 노래가 지닌 힘을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시절 큰 위안이 됐던 게 바로 음악입니다. 시인과 촌장·들국화 노래를 좋아했는데, 이런 음악을 들으면서 10대․20대 열정을 식히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 몸 맡기고 나서, 음악으로 포교활동을 하고픈 마음이 컸습니다.”

6개월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 도움을 얻었다. 음악감독은 창원윈드오케스트라 단윈인 피아니스트 박은주 씨가 맡았고, 불교음악에서 이름 알리고 있는 조연근․조광제․강주현 교수 같은 사람이 힘을 보탰다. 비매용으로 2000장을 만들었는데 1500만 원 들었다. 이 비용 또한 시주와 주변 도움을 얻었다.

“제가 표방하는 게 쉬운 불교죠. 이왕이면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노래로 포교활동을 해 보자는 생각입니다. 사람을 평화롭게 만드는 노래를 불자들에게 전한다면 그 또한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100마디 설법보다 노래 한 소절이 더 큰 위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포교활동을 좀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 산사음악회를 열었던 북면 무량사 주지 생활을 정리했다.

20대 ‘억대 연봉’ 보험설계사

자명 스님은 진주에서 태어나 4살 때 마산으로 왔다. 성호초등학교-마산동중-마산고-경남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중3․고1 때는 형 둘을 잃었다. 어린 시절 누나와 자신 둘만 남게 됐다. 방황하는 시간이 좀 있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범생이었는데, 고등학교 때는 대학 들어가도 학비 지원해 줄 사람이 없을 것이기에 미리 포기하고 방황을 좀 했다. 탈선까지는 아니고 수업에 많이 빠지고 했습니다. 하지만 불교학생회·야구부 응원단장을 하면서 막장으로 갈 수 있는 시기를 잘 참아냈죠. 하지만 대학은 엄두도 못 내고 사회에 곧바로 뛰어들었습니다. 사회에서 거침없이 살아가는 제 모습을 보면서, 학비 조달해 대학도 다닐 수 있겠다 싶었죠. 방위 복무하며 입시 준비해서 1986년에 대학을 갔습니다.”

대학 다니면서는 기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민민투’ ‘자민투’ 같은 것을 따라 해 ‘민삔(빈)투’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게 ‘민주 빈대 투쟁’ 줄임말이다. 점심때 학교 내 이곳저곳 다니며 밥 얻어먹는 그런 별스러운 조직(?)이었다. 뭐든지 정열적인 그는 시위 현장에도 적극 동참하기도 했다.

인맥도 넓었다. 대학 선거 시즌에는 그를 필요로 하는 이가 많았다.

“과 학생회장을 하기는 했지만, 총학생회 선거에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나를 잡으면 당선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마당발이었거든요. 실제 제가 배출한 총학생회장이 두 명이나 됩니다.”

학비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기에 각종 일도 병행해야 했다. 고기뼈 나르는 일, 연탄공장 일, 군고구마 장사, 인테리어 일 같은 걸 했다. 돈 버는 재주가 있어 한 학기 등록금 45만 원 하던 시절 하루 6만 원씩 벌기도 했다. 몸은 힘들어도 삶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시기였다.

대학 졸업 후에는 보험 설계사 일을 했는데, 억대 연봉자였다.

   

“27살부터 30살까지 대한민국 최고 보험설계사로 일했습니다. 1993년 프로야구 선동열 선수가 연봉 1억 원이었는데, 저는 그보다 많았습니다. 남다른 세일즈 수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병원에 가서는 진료 순서를 기다렸다가, 제 차례 되면 의사선생님께 명함을 드립니다. 그러면서 ‘이상한 끌림이 있어 우연히 방문하게 됐다. 밖에 환자가 많으니 오늘은 그냥 돌아가겠으니,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주시라’ 뭐 그런 식이었죠.”

1995년 30살 때 ‘전국 최연소 도의원’

30살이 되었을 때 새로운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의원 출마다. 그런데 그게 치밀하게 계획해 한 것은 아니다.

“제가 좀 무대포 기질이 있습니다. 앞만 보고 날아가는 짱돌과 같다 할까요? 한번 결단 내리면 집요하리만큼 저돌적입니다. 아는 선배에게 내가 도울 테니 선거 출마해 보라고 권유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배가 계속 생각해 보겠다고만 하고, 우유부단하게도 결정 내리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럼 관둬라, 내가 출마하겠다’해서 선거에 나가게 된 겁니다. 사실 시·도의원 역할에 대한 고민 없이 아주 충동적으로 출마한 셈입니다.”

마산에서 도의원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다. 선거 운동도 그답게 했다. 경남대 후배들이 아파트 단지 돌면서 차를 다 닦아 줬는데, 반응이 좋았다. 마침내 제5대(1995~1998년) 도의원에 당선되며 ‘전국 최연소(만 30세) 도의원’ 닉네임을 달았다.

의정활동 역시 그답게 저돌적으로 했다. 돌아보면 보람과 아쉬움이 동시에 남는다.

“대안학교 들꽃온누리고(현 태봉고)를 설립한 것에 대한 애착이 큽니다. 저도 학창시절 문제아 범주에 들어서 잘 압니다. 심각한 낙오자가 될 수 있는 아이들을 보듬자는 생각에 대안학교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당시 강신화 교육감도 힘을 보태 1998년 마침내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설립과 함께 초대 교장도 맡게 되었죠. 그 외 의정활동 4년간 5분 자유발언․시정질문을 가장 많이 한데서 보람을 느낍니다. 하지만 언론 조명받기 위해 폭로부터 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고, 경험이 부족해 정치를 효율적으로 하지 못한 부분은 있었죠.”

그런 아쉬움 때문에 선거에 다시 출마했다. 하지만 1998년․2000년 보궐․2002년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잇따라 낙선했다.

이후 ‘노무현’이라는 사람에 이끌려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그리고는 2004년 총선에서 마산갑 열린우리당 이만기 후보 기획실장을 맡았다. 그때 큰 시련이 닥쳤다.

“상대 후보 측 대책회의 녹취록을 입수했죠. 부정이 의심되는 그런 내용이 담겼죠. 그런데 우리 캠프 후배가 저쪽에 좀 지나치게 하면서, 선거 책임자인 제가 공직선거법 위반 및 통신보호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게 됐죠. 10개월 실형을 받았는데, 9개월 감방 살다 출소했습니다.”

교도소 안에서 불교에 심취

   

이만기 후보를 돕다 겪은 일이기에 한때 그에 대한 섭섭함이 있기도 했다. 지금도 연락 없이 지낸다. 하지만 그에겐 ‘위대한 스승’이 된 셈이다. 마산교도소에 있던 이 9개월이 인생 전환점이 됐기 때문이다. 매개는 불교였다.

“고등학교 때 이미 불교를 접했습니다. 그때 범우불교학생회에서 활동했는데, 불교 교리가 그렇게 재미있더군요. 다른 공부는 못해도 교리 퀴즈에서는 늘 1등 했습니다. 20살 넘어 잊고 있었지만, 잠재의식에 농축해서 깔려었던 듯합니다. 교도소에서 글자 하나를 바꿔 봤습니다. ‘(교도소) 수용’이 아니라 ‘수행’으로 말이죠. 그랬더니 세상이 달라지더군요. 그때 불교학, 사주 명리학에 빠져 완전히 익히게 됐죠.”

출소하고 나서 이틀 후 창원시 구산면 혜천사로 찾아가 주지 스님을 만났다. 그간 있었던 얘길 들려 드리며 머물 수 있도록 도와달라 했고, 결국 그곳에 있으며 출가하게 됐다. 그 후에는 어느 외진 곳에 빈집을 구해서는 1년 6개월 동안 세상과 담쌓고 토굴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마산 무우정사, 서울 혜천선원, 북면 무량사에 있다, 지금은 보광정사 주지를 맡고 있다.

27살에 결혼해 아들 둘까지 있는 그가 출가를 결심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다.

“가장으로서 무게감에 시달렸다면 출가하지 못했을 겁니다. 가족들에게는 ‘당분간 내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라’고 했는데, 고맙게도 흔쾌히 동의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큰아들이 군대에 있고, 작은 아이는 고등학교 1학년인데, 한 번씩 얼굴 보고 합니다. 그래도 집에 있는 보살에게는 늘 미안함이, 아이들에게는 애틋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조차 버려야 한다지만, 그 정도로 냉혈한은 못 되는 듯합니다.”

‘음악 있는 무료급식’ 준비

자명 스님은 보광정사에 있으며 특별한 베풂을 준비하고 있다.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음악 있는 무료급식’이다.

   

“미국에는 판사 이름을 딴 국제공항이 있다고 합니다. 이 판사는 빵 훔친 아이 재판에서 ‘여러분 무관심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다’며 법정에 온 사람 모두에게 벌금을 매겼다고 합니다. 먹는 문제에서 풍요롭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밥 굶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십시일반이라는 말이 있는데, 열 사람이 한 숟가락씩만 보태면 밥 한 공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상설 공연이 결합한 무료 급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역 예술인들 재능 기부받아서, 어르신들이 떡 만둣국 한 그릇 드시며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말이죠.”

만두는 어느 스님이 무상으로 제공해 주기로 했고, 쌀도 도움을 통해 마련할 수 있다. 9월은 준비기간으로 삼아 10월부터 매주 화·금요일 보광정사에서 무료급식에 나설 예정이다. 이러한 ‘음악 있는 무료급식센터’를 전국 곳곳에 10개를 만드는 게 목표다.

“젊은 시절 돈 버는 재주는 있었지만, 돈 모으는 재주는 없었습니다. 그게 타고난 숙명이라면 남을 위해 살아가는 게 맞을 것 같아 불교에 귀의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숱한 선택 가운데 출가한 것이 유일하게 후회하지 않는 선택입니다. 좀 더 일찍 못한 것이 후회될 따름입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자명 스님은 약주도 즐기고, 고기를 먹어야 할 자리가 있으면 굳이 마다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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