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깊은 땅, 그곳에 곧고 순박한 사람들

산청읍에서 금서면을 거쳐 삼장면으로 방향을 정하면 길고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만난다. 길을 오르면 구름 뭉치에서 떨어져나온 조각구름이 옆으로 지나간다. 미처 산을 넘지 못한 조각구름은 산자락 곳곳에 기대어 머무른다. 이곳에서는 흔한 풍경을 옆으로 아래로 흘려보내면 고갯마루에 있는 뜰에 닿는다. 입구 표지석에 적힌 이 고개 이름이 '밤머리재'다. 뜰 한쪽에 버스를 고쳐 만든 매점, 그 뒤에 벌통 정도가 사람 손길이 닿은 것들이다. 별스러운 치장이 없는 뜰 끝에서 옆구리만 보였던 산줄기가 아래로 펼쳐진다. 지리산을 품은, 지리산이 품은 고장 산청은 이렇게 제모습 한 자락을 넌지시 드러낸다.

밤머리재를 넘어 삼장면을 지나면 시천면이다. 영남을 대표하는 유학자 남명 조식(1501~1572)은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가 끝까지 벼슬을 마다하고 머무르며 후학을 길렀던 집이 산천재(山天齋)다. 산천재 앞뜰에는 남명이 심었다는 매화나무 '남명매'가 있다. 그 너머로 어지간해서 제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지리산 천왕봉을 볼 수 있다. 큰 어른은 말년을 보낼 자리 하나조차 허투루 정하지 않았다. '산천재' 이름에는 산이 하늘을 품었다는 뜻이 담겼다. 지리산이기에 어울리고, 남명이기에 쓸 수 있는 이름이었을 테다.

지리산 천왕봉. /산청군

산 넘어 산, 그 너머에 산

산청군 전체면적(794.7㎢) 가운데 논밭은 겨우 12%(98㎢) 정도다.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우뚝 솟은 산은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다. 서쪽에는 천왕봉(1915m)을 중심으로 하봉(1781m)·중봉(1875m)·제석봉(1806m)·연하봉(1667m)·영신봉(1651m)·삼선봉(1284m) 등 지리산 자락이 함양·하동군과 경계를 이뤘다. 북쪽으로 갈전산(764m)·바랑산(796m)·소룡산(760m) 너머에는 거창군이 있다. 합천군과 산청군 사이는 황매산(1108m)·부암산(695m)이 가로막았다. 여기에 웅석봉(1099m)이 산청 가운데 우뚝 솟아 군립공원을 이뤘으며 그 주변에는 둔철산(811m)·구곡산(961m)·정수산(828m)·이방산(715m) 등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며 산청 가운데를 가르는 강은 경호강(鏡湖江)이다. 이름에 '거울처럼 맑다'는 뜻이 담겼다. 강폭이 넓고 유속이 빨라 최근에는 래프팅 명소로 꼽힌다. 경호강은 황매산에서 흘러나오는 양천강과 단성면에서 만난다. 그리고 이 물이 지리산에서 흘러나오는 덕천강과 더불어 남강을 이룬다. 산청 땅을 흐르는 물은 예부터 맑기로 유명했다. 높고 깊은 산에서 솟는 샘이 맑은데다 개발을 핑계 삼은 손때도 타지 않았다. 곳곳에 우뚝 솟은 산(山)과 맑은(淸) 하천을 품은 이 땅은 생김새부터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최근 래프팅 명소로 꼽히는 경호강. /산청군

첩첩산중, 처음부터 없는 땅에 짓는 농사는 뻔했다. 영세한 농가는 산을 깎아 억지로 땅을 만들어 작물을 심기도 했다. 하지만, 겨우 굶주림을 면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감자·고구마·옥수수 등 구황작물 재배가 효율적이었다. 산에서 나는 약초나 나물로 살림을 불리기도 쉽지 않았다. 필요한 이들에게 내다 팔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 여기 사람들은 산청읍에서 40분 정도 걸리는 진주장이 익숙했다. 뒤집어 보면 산청에 그럴듯한 거래 터가 없었던 게 된다. 산청에서는 한때 산에서 나는 대나무와 싸리를 엮어 가공품을 만들기도 했다. 옛날에는 집집이 있었던 복조리·키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대나무 가공품이 용도를 잃자 겨우 기념품 수요만 남는다. 더는 살림에 큰 보탬이 될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여기 사람들이 작물 덕을 본 것은 1970년대 들어 밤나무와 감나무를 심으면서부터다. 특히 겨우내 얼고 녹으면서 여문 산청 곶감 맛은 빼어났다. 이곳 사람들은 산청보다 곶감이 많이 나는 곳은 있어도 맛있는 곳은 없다고 여긴다. 생산량은 내세울 정도가 아닌 딸기·사과·배를 특산물로 꼽는 이유도 같다. 산은 너른 땅을 내주지 않은 대신 어렵게 맺은 열매에는 제법 공을 들였다. '고품종 소량 생산'은 이 땅이 품은 한계와 가능성을 두루 고려한 당연한 결론이었다.

농사지을 땅도, 공장 세울 땅도 마땅치 않았던 산청이 오롯이 지킨 이름은 '청정골'이다. 산청군도 지역이 살길을 산과 강이 얽히고설킨 풍광에서 찾는다. 그렇다고 산청군이 오래전부터 관광산업 덕을 봤으리라 지레짐작하는 것은 오해다. 빼어난 자연환경은 이미 갖췄지만 이를 떠받치는 접근성은 뒤늦게 따라왔다.

1990년대까지 산청을 찾는 바깥사람들은 대부분 진주를 거쳐 국도로 에둘러 갈 수밖에 없었다. 산청 가는 길이 수월해진 것은 2001년 대전과 진주가 고속도로로 이어지면서다. 이 길은 2005년 통영까지 이어지면서 '통영대전고속도로'로 이름이 바뀐다. 통영대전고속도로 단성·산청·생초 나들목(IC)이 산청 입구다. 고속도로 개통으로 산청은 군 단위에서는 드물게 나들목 3곳을 둔 지역이 된다. 물론, 관광산업에 대한 산청군 고민도 이를 바탕으로 시작한다.

나라에서 가장 어여쁘다는 마을

원나라 사신으로 간 문익점(1329~1398)이 목화씨를 붓통에 숨겨와 널리 보급했다는 일화에서 이 나라 무명 역사는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목화를 처음 키웠다는 곳이 산청 단성면에 있다. 그 자리에 '목면시배유지(木綿始培遺址)'가 들어섰다. 이곳에 들어서면 '삼우당 문선생 면화시배 사적비'라고 쓴 비석이 보인다. 그 옆에는 무명 가공 과정, 역사, 제품 등을 알리는 전시관이 있다. 전시관 옆에는 1000㎡ 정도 규모로 목화를 키운다.

단성면 목면시배유지에 핀 목화꽃./박민국 기자

문익점은 고려 말인 1360년 문과에 급제했다. 김해부사록, 순유박사를 거쳤으며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게 1363년이다.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과 3년 만에 목화재배에 성공했다. 무명은 옷감이라고는 삼베뿐이었던 백성에게 추운 겨울을 수월하게 넘길 수 있게 했다. 또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국가 기간산업으로 한몫을 맡는다. 씨앗 하나가 바꾼 삶과 세상은 작은 게 아니었다. 산청 신안면에는 문익점을 추모하는 사당인 '도천서원'이 있다. 그리고 이 서원 옆에 문익점 묘소가 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 남사예담촌 담벼락./박민국 기자

목면시배유지가 있는 단성면에는 '남사예담촌'도 있다. 돌을 쌓고 그 사이를 흙으로 메운 어깨 높이 담이 마을 전체를 둘러싼 곳이다. 경계를 짓는 게 담을 쌓는 목적이라면, 이곳 담은 그 기능부터 어긋난다. 남사예담촌 담 안에서는 집과 마당과 길이 경계가 사라진다. 집 안에 들어섰다 싶으면 어느덧 골목이고, 골목을 따라 걸으면 뉘 집 마당이다. 이곳 담은 안과 밖을 애써 가르지 않는다. 안을 바깥에 내주고 밖을 안으로 당기는 조화를 만드는 장치가 바로 담이다. 지난해 창립한 민간단체인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연합'은 남사예담촌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로 지정했다. 단아한 고택과 정겨운 담이 어우러진 이 마을에 대한 찬사다. 남사예담촌에서는 산청이 자랑하는 선비 한 명이 남긴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면우 곽종석(1846~1919)은 어려서부터 유·불·선 학문을 두루 익히다 주자학 공부에 힘을 쏟았다. 20대 초반에는 이미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그 재능을 높게 평가한 조정은 벼슬을 권했으나 곽종석은 국운이 기울었다며 마다했다. 그래도 1905년 을사늑약 때는 약정 폐기와 더불어 오적(五賊)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를 앞두고 곽종석을 중심으로 영남 유림이 모인다. 이들은 파리 강화회의를 국제사회에 독립을 청원할 기회라고 판단한다. 이에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는 열강 대표에게 건넬 문서를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 뜻이 같은 영·호남 유림이 뭉치면서 유림 대표 137명이 문서에 서명한다. 파리에 보내는 긴 편지(2674자), 그 기초 책임자는 곽종석이었다. 이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영·국문 번역을 거쳐 각국 대표와 외국 공관, 국내 향교에 보낸 게 바로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개요다. 일제강점기 통틀어 유림이 펼친 가장 조직적인 독립운동이다. 이 일로 곽종석을 비롯한 유림은 모두 교도소에 갇힌다. 곽종석은 징역을 살다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1919년 8월 숨을 거둔다. 남사예담촌에는 곽종석을 기리는 유림과 제자들이 세운 '이동서당'이 있다.

남명 조식을 기려 세운 덕천서원 안 세심정./박민국 기자

남사예담촌에서 시천면으로 가면 '남명조식유적지'가 나온다. 영남을 대표하는 유학자 조식은 말년을 산청에서 보냈다. 이곳 역시 조식과 관련된 유적을 귀하게 보존하며 큰 어른에 대한 예우를 아끼지 않는다. 산청은 해마다 10월이면 남명 사상을 기리는 '남명선비문화축제'를 개최한다.

조식이 남긴 사상은 '경의(敬義)' 두 글자에 담긴다. '자신을 수양(敬)해 근본을 세우고 정의(義)를 과감하게 실천하라'는 가르침은 당시 선비들을 크게 깨우쳤다. 이 같은 남명 사상은 오늘날에도 조선 실학을 꽃피운 뿌리로 평가받는다. 남명조식유적지에는 그가 제자를 가르쳤던 산천재(山天齋)가 있다. 뒤편에는 남명 사상과 유물을 볼 수 있는 '남명기념관'을 세웠다. 남명조식유적에서 서쪽으로 더 가면 후학들이 그를 기려 세운 '덕천서원'이 있다. 그리고 서원 앞에는 '성인이 마음을 씻는다'는 뜻이 담긴 정자, 세심정(洗心亭)이 남아 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1912년 단성면에서 태어난 영특한 아이 이영주가 출가한 것은 25살 되던 해인 1936년이다. 속세 이름을 버리고 얻은 법명은 성철. 해인사에서 하동산(河東山) 대종사가 내린 가르침을 받아 세상 이치를 깨친 그는 오직 구도에만 몰입했다. 성철은 1947년 경북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답게 살자'며 결사를 이끌었다. 당시 흔들리던 선풍(禪風)은 서슬 퍼런 승려들 덕에 그 중심을 완전히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성철은 1955년 해인사 초대 주지로 임명됐으나 취임하지 않고 수행에 정진했다. 이후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추대됐다. 그리고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됐다. 1993년 입적한 성철은 철저한 수행, 청빈한 삶으로 이 나라에 소박하지만 단호한 가르침을 남겼다. 현대 한국 불교계가 낳은 큰 어른이다.

성철 대종사 동상./박민국 기자

단성면에는 복원한 '성철대종사생가'가 있고 그 자리에 겁외사(劫外寺)를 세웠다. 입구에 들어서면 잘 정돈된 경내 한가운데 성철 동상이 있다. 그 뒤쪽에는 유품을 전시한 포영당이 있다. 포영당에서 군더더기 없고 소박한 법어와 누더기 옷과 신발 등 유품을 볼 수 있다. 아무리 봐도 지나치게 치장한 절과 큰 어른을 추어올린 동상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애써 그를 그리는 중생들 마음이 간절했다고 넘겨보지만, 겁외사가 더 소박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 성철이 남긴 그 유명한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에서 느닷없이 고장 이름 '산청(山淸)'을 떠올린다.

명산을 두루 품은 산청에는 유명한 절도 많다. 사찰마다 낀 높은 산과 빼어난 계곡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늘 깊은 인상을 안긴다. 지리산에 있는 법계사는 이 나라 사찰 가운데 가장 높은 곳(1450m)에 있다. 544년 창건된 이 절에는 적멸보궁에 부처 진신사리를 모셨으며 불상은 없다. 법당 옆에는 보물 제473호 '법계사삼층석탑'이 있다. 중산리에서 법계사로 가는 길은 '중산리 계곡'을 따라가는 길이기도 하다. 법천폭포, 유암폭포, 무명폭포를 비롯해 계곡 곳곳에 난 웅덩이에는 피서객이 끊이지 않는다.

내원사 계곡./박민국 기자

삼장면에 있는 대원사와 내원사는 사찰만큼이나 계곡이 유명하다. 지리산 자락에서 뿜어 나오는 시원한 물줄기는 단단한 바위를 이리저리 깎아내며 그 기세만큼 시원한 눈맛을 자랑한다. 이곳 역시 여름내 피서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신등면에는 정취암이 있다. 68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이 절은 대성산 절벽 사이에 소박하게 자리했다. 단아한 암자에서는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길과 산청 땅을 둘러싼 산자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정취암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율곡사가 있다. 이곳에는 못 하나 쓰지 않고 목침으로 짜 올렸다는 법당이 눈길을 끈다. 작은 절이지만 대웅전(보물 제374호)·괘불탱(보물 제1316호)·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도유형문화재 제373호) 등 보물이 많다.

깊은 산속 순박한 사람들이 겪은 모진 설움

사방으로 검은 비석이 줄맞춰 서 있다. 비석 모양새는 '거창사건 추모공원'에서 본 것과 같다. 비석이 선 묘역 한쪽에는 봉분 두 개가 따로 있다. 봉분 옆 표지판에는 '미등록 희생자(남·여)의 묘'라고 적혀 있다. '산청·함양양민학살사건 희생자 가운데 법적 등록을 마치지 못한 분을 모신 자리'라고 설명해놓았다. 금서면에 있는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한쪽 구석에 자리한 봉분은 그래서 더욱 서럽다. 이곳에서는 나라가 이 땅에 지은 씻을 수 없는 죄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1951년 2월 7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빨치산 토벌을 내세워 산청·함양을 휩쓸며 죽인 민간인은 705명. 그 추악한 군홧발은 거창을 짓밟기 이틀 전에 이 곳을 지나갔다.

시천면 외공리 민간인 학살 현장을 알리는 간판./박민국 기자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은 1996년 '거창사건등관련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을 근거로 조성됐다. 공원은 2001년 조성 사업에 들어가 2004년 완공된다. 이 법에서 산청·함양이 겪은 고통은 거창과 달리 고작 '등' 한 글자에 담긴다. 이곳 사람들은 '거창사건 등'에서 비치는 소홀함 탓에 또 서럽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은 여수 신원리에 주둔한 제14연대 병사들이 군 명령을 어긴 데서 비롯한다. 그 명령은 4·3 항쟁이 일어난 제주로 진입해 이를 진압하라는 것이었다. 명령을 어긴 병사들은 장교 20여 명을 사살하고 항쟁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여파는 멀리 산청까지 미친다. 험한 산은 적은 병력이 몸을 숨기고 맞서기에 유리했다.

1949년 반군을 진압하려던 국군 3연대 소속 소대병력은 산청 시천면에서 전원 몰살당한다. 국군은 적과 내통했다며 패배 원인을 마을 사람들에게 씌운다. 1950년 1월까지 이어진 '산청 시천·삼장면 학살' 피해자 수는 밝혀진 것만 203명에 이른다.

1949년 8월 시천면에서 벌어진 '산청 사리 골짜기 학살' 역시 내용은 다르지 않다. 국군 3사단 22연대에 희생당한 주민은 36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시천면 외공리에서 자행된 '산청 외공리 학살'은 가해자가 국군인 것만 확인될 뿐, 사건 배경도 피해자 신원과 규모도 분명하지 않다. 외공리 산비탈 입구에는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알리는 간판만 외롭게 서 있다. 2008년 발굴 조사가 진행됐던 현장은 잡초만 무성하다. 당시 발견된 유골은 충남 공주대학교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렇듯 서러운 동네인 시천면에는 '빨치산토벌전시관'도 있다. 중산리에 있는 이 전시관은 당시 국군이 빨치산을 어떻게 색출하고 토벌했는지 사진, 기록, 무기 등을 통해 보여준다. 하지만, 전시관 어느 한 쪽에도 이 땅에 서럽게 묻힌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없다. 그 당당하다는 전과를 감탄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단성면 남사예담촌 어르신들은 대문을 닫아놓지 않는다. 낯선 인기척에도, 느닷없는 질문에도 마루 한쪽 내주며 조곤조곤 얘기 나누기를 어려워하지 않는다. 이곳 어르신들만 보면 산청 사람 순박하다는 말에 거짓은 없다. 자신들이 그렇게 살았고, 살면서 만난 이웃도 그랬을 테다. 그래서 깊은 산속 순박한 사람들에게 역사가 남긴 상처는 더욱 야속하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