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젊은 일꾼] 문화예술이 숨 쉬는 언덕을 꿈꾸는 ... 통영 안지영 씨

그는 동피랑을 말하고 싶어했다. 동피랑을 부정적으로 말했다. 안지영(33) 씨는 통영 그림 마을 동피랑을 “답답하지요”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동피랑, 솔직히 볼 게 뭐가 있나”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즐길 거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동피랑을 더 많은 볼거리와 즐길 거리, 문화예술의 언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동피랑을 ‘그림 마을’로만 보면 답이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동피랑 사람이다.

그는 동피랑을 몽마르트르나, 서울 인사동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동피랑 위치는 몽마르트르나 인사동보다 낫다. 문화적 토양도 더 탄탄하다. 이야기까지 있지 않나…."

안지영 씨 / 허동정 기자

그가 말했다.
그는 유년을 동피랑에서 자랐다. 5살까지, 그는 동피랑에 있었다.
그 시절, 가족은 피랑(벼랑) 끝으로 찾아들었다. 도심에서 가장 먼 곳에 터를 잡은 곳…. 동파랑은 그래서 동쪽의 구석, 갈 곳 없는 낭떠러지 끝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그의 기억에 동피랑은 가난이 사무친 곳이다.
도시의 끝, 사는 곳이 부끄러운, 동피랑은 가난한 마을이다. 외지에 있을 때 그 마을이 유명해졌다는 것이 처음엔 믿기 어려웠다.

이곳은 도시 개발로 철거 예정이었다. 시민단체가 벽화를 그리면서 유명해졌다는 것 등이 동피랑의 역사이자 스토리텔링이다.

안 씨는 올해 동피랑 벽화 공모전에 나갔다. 그는 설계를 전공한 사람이다. 그의 인생과 그림은 크게 연관이 없다.

처음 그렸지만 그의 그림은 주목받는다. 그의 그림은 ‘보는 지점’이 있다.

벽화를 그릴 예정이었던 벽에는 애초, 길을 밝히는 등(燈)이 있었다. 이 등이 켜지는 자리에 등대 불빛이 새어나오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해지고 난 저녁, 등이 켜지면 그의 그림에도 등이 켜졌다. 밤이면 등대가 켜졌다. 벽화는 그렇게 그려졌다.

그림과 5m 정도 떨어진 ‘뷰 포인터(View Point)’를 설정했다. 그곳에서 볼 때 그림은 가장 선명했다. 주제가 선명하기 때문이다.

안지영 씨와 동료들이 그린 등대 벽화를 보는 지점 /허동정 기자

그의 그림에서 뷰 포인터는 동피랑을 보는 관점을 뜻했다. 정확한 어느 시점에서 동피랑을 볼 때 진짜 동피랑을 볼 수 있다는 것, 그의 그림은 말하고 있다.

벽화 스케치 직전까지 그는 통영의 모든 등대를 사진으로 찍었다. 벽에 스케치했다. 주제는 뚜렷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불을 밝히는 등대가 있다. 그 등대가 비추는 것 같이 동피랑도 그렇게 잘 버텨내 주어서 감사하단 뜻. 그 등대가 동피랑을 밝혀주리란 뜻이

그림에 담겼다.
그림은 역동적이었다. 그림은 동피랑을 긍정한다는 뜻을 담았다. 그의 그림은 대상을 차지했다.
그는 젊었다.

통영서 나고 자란 그는 “짧지만 영화판에도 있었고 술집 바텐더로도 일했다”고 했다.
“하고 싶은 일 다 해보고 싶다”고 그가 말했다. 그래서 그의 젊은 영혼은 전국을 떠돌게 했다.

이것저것 경험한다며 수년을 헤맸다. 그는 지난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동피랑으로 찾아들었다.

어려웠던 시절에 살았던 동피랑은 그때와 달랐다. 사람이 북적였다. 동피랑으로 오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뭔가 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이 몰린다. 먹고 싶을 거고 쉬고 싶을 거고….’
그는 자연스레 장사가 될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등대벽화 / 허동정 기자

주민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는 승합차를 꾸몄다. 봉고차를 개량해 ‘우리 아기 봉고’란 노점 카페를 개업했다. 장사는 잘됐다.
‘동피랑이 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첫 사람이 그가 아닌가 싶다.

장사를 하면서 드는 생각을 기록했다.

동피랑에서 사는 동안 아이디어를 차곡차곡 쌓았다.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할 것을, 남겨야 할 것들을 그는 적어갔다.

이걸 간추리고 더하고 뺀 것…. 그걸 정리했더니 하나의 답이 나왔다.

‘문화거리 조성…….’

“고향이라 그랬는지, 사람들은 찾아왔지만 찾아온 사람들에게 나는 좀 미안했다. 솔직히 볼 게 없었다. 시멘트벽에 그림이 그려진 게 특이하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거 말고 대체 뭐가 있나 싶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예술성이 있나, 특별한 오락성이 있나.”

동피랑 입구에 있는 안지영 씨 카페 / 허동정 기자

그는 계속 말했다.
“솔직히 동피랑엔 커피 한 잔 마실 공간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문화 예술가들이 활동하는 그런 거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그는 말했다.
“주말에 이곳을 차 없는 거리로 만들고, 통영 12공방 등에 대한 체험 교실을 여기서 열고…. 젊은 예술가들 전시 공연이 있는 곳이어야 되어야 한다. 보고 체험하고 즐길 거리가 있는 문화 공간으로 동피랑이 거듭나야 한다는 거다. 가난했지만 지금은 강구안이 보이는
로맨틱한 공간….”

동피랑은 특별해야 했다. 그는 계속 말했다.
그의 말의 핵심은 이렇다.
“동피랑은 이대로 가면 시시해진다. 시시해지면 안 온다”란 것이다.
그는 계속 말했다.

“전국을 떠돌 때 통영에 그림 벽화 마을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게 동피랑인 줄은 몰랐다. 기대하고 찾아왔지만 벽화밖에 없었다. 돈보다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으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 시시함은 연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벌이가 되면 더 좋은 거고…. 사람들이 이만큼 찾는데 이걸 이대로만 끌고 간다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동피랑을 살리는 아이디가 없다는 게 의아스럽다는 거다.”

장사를 하면서 그는 음악 하는 사람, 전시하는 사람을 모아 공연하기도 했다. 뜻을 품었지만 갑갑했다.

공연과 전시를 위해 작가와 공연자를 직접 불러들였지만 무료공연은 어려웠다. 돈이 필요했다. 공연자에게도 먹일 돈이 필요했고 작품 운반비 정도의 지원은 있어야 했다.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개인이 할 일이 아니었다.

궁리 끝에 그는 작은 카페를 열었다. 그는 봉고차 카페를 포기하고 매장을 열었다.

그가 말했다.
“관광객들이 좀 더 머물고자 하는 곳에 카페를 열었다. 여기서 들려 동피랑 정보를 더 풍성하게 얻는, 관광안내소 같은 곳이다. 카페는 이곳 상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관광객에게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공간이다.”

그가 말했다.
“이제는 모든 삶이 동피랑에 맞춰져 있다. 동피랑은 아트갤러리처럼 수많은 아이템을 간직하고 있다. 문화 공간, 전시 공간이 돼야 한다. 몽마르트르에 예술가가 없는 언덕을 상상해 보라….”

그는 다시 말했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 인상적이어야 한다.”

이 말을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남해나 강원도, 서울 등등 요즘은 어딜 가도 벽화마을은 있다. 동피랑은 차별이 중요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보라. 시시해지면 끝이다.”

그는 동피랑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나를 동피랑을 두고 상업 목적으로 접근한다고 말한다. 생각해 보라. 이곳 주민들이 돈을 벌면 안 되나. 구경 온 사람들과 팔고 함께 하면서 어울리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담담했다.
“동피랑에 몇 개 빈집을 구하고 싶다. 빈집 그대로를 전시관으로 만들고 싶다. 벽화만 볼 게 아니라 집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관광객의 심리지 않나.”

담담했지만 뜨거웠다.

동피랑이 더 잘 될 만한 온갖 아이디어를 적어대며 그는 끙끙 앓고 있었다. 그는 계속 말하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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