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燈) 만드는 사람들 / 다올공방 서승준·김임섭

한지 등(燈)만을 고집한다. 다올공방의 서승준(43) 씨와 김임섭(51) 씨는 천으로 만들고 거기에 화학염료로 채색을 하는 요즘의 등을 보며 그건 등이 아니란다. 직선보다는 곡선의 아름다움과 닥종이로 만든 한지에 천연안료로 채색을 할 때만이 한국 고유의 등, 그 분위기와 정서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이 만든 등은 의령의병제, 무주반딧불이축제, 진주중앙유등시장….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다올공방은 진주 문산면에서 고성으로 가는 갈촌역 앞에 있었다. 다올공방은 아직 문패를 달지 않아 일반 사람들은 찾기가 수월치 않을 듯했다. 기찻길을 앞에 두고 큰 작업장과 작은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기찻길 옆 노란 벤치 주변으로는 공방에서 만든 여러 조형물이 전시돼 있다. 철사로 말이나 사슴의 뼈대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한지로 배접 작업을 하기 전 단계이다. 

한적한 간이역 앞 공방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철커덕 하는 건널목 푯대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유리창 바로 너머에서 기차가 섰다가 다시 출발했다.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드문드문 기차는 그렇게 반복됐다.

/ 권영란 기자

주변에서 등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서승준 씨와 김임섭 씨. 전혀 닮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등 제작과정을 보고 반한 건 꼭 닮았다.

“중국 등(燈)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게 현실”

서승준(43) 씨는 다올공방의 대표이다.
서 씨가 공방을 시작한 건 2011년 8월, 이제 1년 되어간다. 서 씨는 정말 ‘우연하게’ 등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7년 전에 등 만드는 사람이 주변에 있어 잠시 했다. 등 만드는 게 너무 좋았다. 그 당시는 등이 활성화 되지 않아 경영상 어려움 많았다. 지금도 그리 활성화 된 것이 아니라 조금 어렵다. 하지만 수요는 점점 늘고 있는 것 같다.”

/ 권영란 기자

서 씨는 이 일을 본업으로 하기 전에는 건설회사에서 일했다. 하지만 노래 부르고 작곡하는 등 창작하는 일을 좋아한다. 그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일이 자신에게 맞다고 말했다. 등에 대한 매력을 느끼고 이 작업과정이 작곡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등을 활성화 시킨 건 천태종, 진각종, 조계종 한마음선원 등 불교단체이다. 지금은 등 모양이나 재료, 제작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진주 개천예술제 유등도 중국 사람들이 들어와 중국 양식으로 만들고 있다. 또 천으로 많이 만들고 있으니까 일반 사람들은 등(燈)은 이제 천으로 만드는 줄 안다. 아직은 중국이 등으로 알아주는 나라다. 중국 한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나가 등을 만들고 있다.
그들의 제작은 전문화, 세분화, 저임금의 특징이 있다. 예술성이나 작품성과는 거리가 멀다. 합성섬유에 화학안료를 쓰는데 솔직히 ‘등燈’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고유의 정서와 따뜻함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지금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등(燈)은 한지로 만들고 있다.”

서 씨가 공방을 열고 받은 첫 의뢰가 2011년 10월 진주중앙시장 안에 유등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지금 진주중앙시장은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변화하면서 중앙시장 안 상가나 길목 곳곳에 등을 걸어두고 있다. 그 수백 개의 등이 다올공방의 첫 작업이었다.

“처음 시도한 거였다. 지금 보니 아쉬움이 많더라. 문화관광형 사업단의 일환으로 중앙시장에서 상인들을 대상으로 6회 강습도 했다. 자기가 만들어 자기 집에 단다는 내용이었다. 아직은 우리가 만든 등이 제대로 단가를 못 받는 현실이다. 초창기다보니 우리 작업을 알린다는 개념으로, 홍보차원이다. 인건비와 재료비만 건지면 한다. 진주중앙시장 안에 곧 이벤트광장을 만든다는데 아마 등이 더 필요할 것 같다.”

/ 권영란 기자

다올공방은 1년 남짓한 시간 동안에 굵직굵직한 축제장을 여럿 뛰었다. 무주반딧불축제, 남원 준향제, 울산 연등행사, 경주현대호텔 연말 축제, 의령 의병제 등이다.

“의령에서 몇 년 전에 어느 업체에 천으로 제작하는 등을 의뢰하러 갔는데, 맘에 안 들었는지 우리 공방에 왔더라. 총 16점 들어갔는데, 대형이다. 강에 띄어놓으면 그 크기도 작아보이지만. 5미터짜리도 있으니까. 의령에서는 한지등을 이번에 처음 했다는데 우리가 만든 등을 보고 대만족하더라.”

서 씨는 한지등에 대한 반응은 의뢰했던 공무원은 물론이고 관람객들의 반응이 최고였다고 말했다.

“의령군은 시안을 정해 왔더라. 13개 읍면 상징물을 등으로 만들어하고 싶어했다. 곽재우 캐릭터, 군내 로고, 의병탑을 원했다. 캐릭터는 그대로 하고 13개 읍면 상징물 제작에서 어느 면은 탑바위를, 어느 면은 한지보부상을 만들어달라더라. 자굴산 할배 캐릭터도 이번에 유등으로 조형물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가수 몇 번 부르면 휘딱 날아가는 예산의 일부 정도다.”

서 씨는 투자대비 극적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한지등이라 말했다.

“축제는 감성적이고 정서적이다. 가장 디테일하고 빠르게 축제분위기를 안겨주는 게 하는 것이 등이라고 생각한다. 아내가 처음에는 이 일 하는 걸 안 좋아했는데, 점점 이해하더라. 작품 완성된 것을 보고 감동하고 미래를 전망하더라.”

“대형 등(燈)은 뼈대작업에서 선을 잘 살려야”

김임섭(51) 씨. 그를 아는 사람들은 ‘파란만장 인생’이라고 말한다. 현장노동자로 살면서 삼미단조, 우창기계, 우아미가구 등 진주 공단내 회사는 돌아다닐만큼은 돌아다녔다. 노동운동에 20여 년을 뛰어다니다가 2002년 민주노동당 진주시의원으로 의회에 입성, 의정활동을 했다. 4년 뒤에는 노동자자주기업 삼성교통 대표이사로 있다가 지난해까지는 산림표본조사를 하러 산으로 들러 다니던 사람이다.

김 씨가 이 일을 시작한 것도 ‘우연’이었다. 당시 서 씨와 같이 일하던 동료 중 한 사람이 김 씨의 친구였다. 김 씨의 친구는 서 씨와 90년대 초반까지 민중가요 음악밴드 출신이었다. 작업장을 만들었다는 이야길 듣고 구경차 왔던 김 씨는 등 제작을 보고 한 순간에 반했다고 말한다.

/ 권영란 기자

“딱 보니 이건 자신있다, 내꺼다 싶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용접은 내 전공이지, 미술을 해서 뼈대 만들기는 물론 밑그림, 채색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나만큼 적임자가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커지더라.”

김 씨는 그 뒤로 다른 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고. 그 길로 다올공방에서 일하기로 작정했다.

“전주보다는 이쪽 지방에서는 의령 등이 한지가 더 유명했다. 한지등, 한 마디로 등(燈)이 살아난다. 뼈대를 만들고 한지를 붙이고(배접)하고 밑그림을 그린 뒤 천연안료 물감으로 채색을 한다. 그러면 질감과 색감이 따뜻하다. 비로소 따뜻해지면서 살아나는 것 같다. 한지는 낮에 봐도 색이 살아있다. 진주의 화가 박생광의 그림 느낌과 진주적인 것을 살리고 싶다. 동양화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놓는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늦게 뛰어들었지만 김 씨의 작업 완성도에 대한 열정은 매우 컸다. 현재 공방의 제작시스템은 철저히 분업화 되어 있다. 뼈대 제작, 배접, 밑그림, 채색 등이다. 김임섭 씨와 서승준 씨가 전 분야의 일을 꿰고 있지만 뼈대 작업이 주요 일이다.

“뼈대 작업은 대형 등 제작에서 매우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지를 붙일 수 있도록 면을 나누는 것이겠지만, 먼저 만들고자 하는 등의 특성을 살려 뼈대를 만들어야 한다. 용이나 말, 동물 등을 만들 경우 그 동물의 움직임과 근육의 흐름을 살펴 뼈대의 선을 살려야 한다. 그래야 시각적 아름다움이 더욱 커지고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제대로 끌어낼 수 있더라. 구상부터 작품의 뼈대에 나의 성격이 들어가도록 한다. 직선이 편한데 곡선을 많이 쓴다.”

김 씨는 일(직업)과 놀이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지자체마다 상징하는 캐릭터와 로고가 있는데 그걸로 등을 만드는데, 이번 무주 같은 경우는 반딧불과 연관되는 등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더라. 그래서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만든 등 중에서 ‘달, 개, 소녀, 반딧불이 등’가 그것이다. 무주반딧불이 축제에는 우리의 새로운 시도가 많았다. 축제 행사장에 대개 아치를 만드는데, 반딧불이축제이니만큼 한지등으로 아치를 만들었다.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 권영란 기자

김 씨는 각 지자체의 행사나 축제가 봄가을에 몰려있어 그때는 거의 밤샘작업이라고 했다.

“한 달만에 세 지자체에서 의뢰하는 3건을 하려니까 거의 기계적으로 해야 하더라. 창작성이 사라지더라. 돈도 되고 창의성과 예술성을 펼칠 수 있는 직업인데, 그렇게 쫓겨서하는 건 힘들더라. 조금 시간을 여유있게 가진다면 훨씬 공을 많이 들이고 멋진 작품이 나올 수 같다. 작품이 좋으면 등불빛에서 그만큼 사람들이 기운을 팍팍 받아가지 않겠느냐.”

궁금했다. 축제가 끝나면 그 등은 어떻게 할 까? 폐기처분하기엔 아까운 것들이다. 보관을 하려면 수월치 않을 것 같다.

“등은 일회적인 게 아니기 때문에 행사기간 내내 활용하고, 일 년 동안 잘 보관해서 다음 해에도 쓸 수 있다. 무주에서는 반딧불이축제 후, 보관해달라고 먼저 요청하더라. 창고에 잘 보관해서 내년에 다시 손봐서 줄 거다. 물론 새 작품도 주겠지만. 보관료는 최소한만 받는다. 나중에 새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싼 비용이다. 지자체에서는 보관이 쉽지 않다. 워낙 대형들이라.”

진주는 유등축제 인프라가 풍부하다

서 씨와 김 씨는 축제가 시작되면 현장에서 관람객 반응을 살펴본다고 한다. 한참 보고 듣고 있으면 즐거워진다고 했다. ‘이게 사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두 사람은 앞으로 관람객들이 쉽게 사갈 수 있는 생활 인테리어등을 추진중이라고 했다.

“관람객들이 감탄하고 사진 찍고…, 아이들은 등에서 거의 떨어지지 않는다. 캐릭터등은 아이들이 가져가려고 한다. 그래서 관람용 등만 할 게 아니라 시민들이 살 수 있는 생활등을 제작판매하는 것도 계획하고 있다. 추진 중이다. 샘플 확보되면 조명 등기구 파는데 의뢰하고 여력 되면 전시공간도 만들 계획이다. 진주 강남동에 유등체험관을 만든다는데 참 많은 기대가 된다.”

마지막으로 김 씨는 진주유등축제에 대한 바람도 털어놓았다.

“진주 사람들이 한지등에 관한 지식이 남달라야 한다. 진주유등축제가 대한민국대표축제인데 선정기간인 3년 동안은 예산이 지원되지만 기간 끝나면 예산 없다. 올해 3번짼데 어쨌든 활로를 찾아야 할 것 같다. 한국을 대표해서 이번에 캐나다 세계축제에 비공식으로 간다더라. 유등축제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인프라를 가진 데는 진주만한 데가 없다. 더 키우고 진주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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