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기운 솔솔 '얼음골', 억겁 세월이 빚은 '호박소', 그림 같은 영남루

오늘날 여름만 되면 밀양은 '찜통 고장'이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말을 단다. 좋게 비칠 리 없는 까닭에 전전긍긍한 이곳 사람들은 기상관측소 위치를 의심했다 한다. 이 때문에 다른 장소에서 지속적인 측정을 했는데, 오히려 평균기온이 더 높게 나왔다고 하니 실망도 컸을 법하다. 결국은 산이 동쪽·북쪽·서쪽으로 병풍 치고 있는 분지형에다, 갈수록 녹지가 줄어드는 데서 이유를 찾아야 할 듯하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배경에서 밀양얼음골(천연기념물 제224호)·영남루(보물 제147호)는 더 소중한 가치를 발휘한다.

밀양얼음골은 재약산(1189m) 북쪽 중턱 600~750m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4월 이후 우기에 맑은 날이 많고 심한 더위일수록 바위틈 얼음이 더 많이 유지된다고 한다. 여름 자연이 얼음을 만드는 곳은 비단 밀양뿐만은 아니다. 경상북도 청송군·강원도 정선군 같은 곳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형이 제각각이라 그에 따른 과학적인 설명도 달리 곁들여진다. 밀양얼음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근거가 뒷받침되기는 하나, 이 모든 것 제쳐놓고 '자연의 신비'에 몸을 맡기려는 이가 더 많은 듯하다.

영남루(嶺南樓)는 밀양강 변 절벽에 자리하고 있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문경새재 아래 영남을 대표하는 누각이요, 진주 촉석루·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에 꼽힌다. '영남루 보지 않았으면 밀양 다녀왔다 하지 마라'는 말은 결코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 이유를 들자면 시원한 강바람이 큰 몫을 한다. 삼복더위 날이라 할지라도 영남루에 오르면 끊어지지 않는 강바람 줄기가 손에 쥔 부채를 거추장스럽게 만든다.

   

영남루에 대해 많은 이는 완성된 아름다움이라 말한다. 보는 풍경·보이는 풍경 모두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영남루에 오르면 탁 트인 시선 너머로 밀양강이 은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단지 이것만이라면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밀양강 너머에서 바라보면 자라 모습을 한 아동산 목덜미에 관(冠)을 씌워 놓은 듯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영남루 앞을 지나는 밀양강은 이곳 내륙지역에서 섬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오늘날 시립도서관·소방서 같은 시설과 아파트가 들어선 삼문동은 섬으로 되어있다. 걸어서 1시간 정도 되는 둘레이며 다리 4개가 이어져 있다.

밀양강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곳이 '물의 고장'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밀양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며, 낙동강이 아래를 품고 있다. 지역민들은 "밀양에서 농사짓는 사람은 하늘 바라볼 필요가 없다"고 한다. 물이 늘 풍부하다는 얘기다. 물에 대한 흔적은 삼한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산제수문(守山堤 水門)'은 전북 김제 벽골제·충북 제천 의림지와 함께 '삼한시대 3대 농경문화유적지'로 불린다. 낙동강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암반을 뚫고 개설한 수문이 현재도 하남읍 수산리에 남아있다.

'삼한시대 3대 농경문화유적지'에 꼽히는 수산제 수문./박민국 기자

지금은 매년 5월 이팝나무 꽃 절경을 선사하는 양양지(陽良池)는 신라시대 때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한 저수지다. 백성을 위한다는 뜻이 담겨 '위양지(位良池)'라고도 불린다.

여기 사람들은 스스로 밀양을 '축복의 땅'이라고 곧잘 말한다. 이는 하남평야와 같이 기름진 토지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고기 형상 바위가 지천으로 깔려 장관을 이루는 '만어사 경석(萬魚寺 磬石'), 화강암이 수십만 년 동안 물에 씻겨 '절구 일종인 호박 같다'하여 이름 붙여진 호박소, 영남루 경내에 분포하고 있는 국화꽃 모양 석화(石花)는 이 땅이 빚어낸 경이로움이다.

밀양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무덤 두 개가 있다. 운심 묘와 호랑이 묘다. 1700년대 기생 운심(雲心)은 고운 자태와 뛰어난 검무로 한양에서 수많은 세도가 자제 마음을 앓게 하였다고 한다. 늙어서는 고향 밀양으로 돌아와 그 옛날 흠모했던 남자를 찾으려 했다. 이를 위해 영남대로에 주막을 만들었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미련 버리지 못해 무덤에서라도 만날 수 있도록 사람 왕래 잦은 곳에 묻어달라 유언했다. 그 무덤은 상동면 안인리 신안마을 산 중턱에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몇 년 전 봉분이 훼손되기도 했다. 황진이 못지않은 얘깃거리를 담고 있는 운심이 고향에서 이렇게 잊혀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당했다. 이때 호랑이가 나타나 찢어진 시신을 지키며 몇 날 며칠을 슬퍼했다고 한다. 안장 이후에도 호랑이는 무덤을 지키다 결국 그 앞에서 죽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가엾이 여겨 김종직 묘 옆에 호랑이 무덤을 따로 만들어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지금도 김종직 선생 묘 한쪽에 호랑이 무덤과 인망호폐(人亡虎斃) 비석이 함께하고 있다.

밀양을 둘러보면 곳곳에 사명대사(四溟大師·1544~1610) 관련 유적지가 펼쳐진다. 먼저 꼽는 것이 사당이 자리한 표충사(表忠寺)다. 시간을 거슬러보면 현재 무안면 중산리에 있는 대법사(大法寺)가 애초 표충사였다. 1610년 사명대사 입적 후 이곳에 사당을 창건하고 표충사라 하였으나, 1839년 그 사당을 오늘날 표충사(당시 영정사)로 옮겼다. 현재 대법사에는 사명대사가 묘향산 가기 전 지팡이 꽂은 것이 변했다는 아름드리 모과나무가 있다.

사명대사 지팡이가 변해 만들어졌다는 대법사 아름드리 모과나무./박민국 기자

사명대사 정신을 기리기 위해 1742년 건립한 표충비(表忠碑)는 '땀 흘리는 비'로 잘 알려져 있다. 1894년 갑오동란 7일 전 '3말 1되(약 56ℓ)'를 분출한 것을 시작으로 1945년 8·15광복 3일 전, 1950년 6·25전쟁 2일 전 각각 '3말 8되(약 68ℓ)'를 분출했다. 가장 많게는 1961년 5·16 쿠데타 5일 전 '5말 7되'(약 102ℓ)를 분출했다. 물이 나오더라도 머릿돌·좌대, 그리고 글자에는 물기가 전혀 드리우지 않는다고 하니 더 영험하게 다가온다. 무안면 고라리에는 사명대사 생가지와 더불어 2006년 만들어진 사명대사 유적지가 있다. 이 지역이 사명대사를 대표 인물로 내세우려는 의지는 모르지 않겠으나, 웅장함이 과하다는 느낌은 든다 하겠다.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 있는 사명대사 생가. /박민국 기자

'신라의 달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같은 노래를 작곡한 박시춘(1913~1996) 선생 옛집과 기념비가 영남루 옆에 자리하고 있다. 박시춘 선생을 소개한 안내판에는 '일제 강점기에 작곡한 4곡으로 인하여 2005년 9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사로 거명되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라고 적어 놓았다. 하지만 밀양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영남루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못내 아쉬워하는 이도 있는 듯하다.

영남루 옆에 자리하고 있는 박시춘 선생 옛집과 기념비./남석형 기자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