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이서후의 컬러풀 아프리카 10

바람이 분다. 모코로는 조용하고 부럽게 물 위를 미끄러진다. 진공 상태인 듯 몸이 가볍게 떠오른다. 눈을 감는다. 배가 수풀을 스치며 내는 사르르 소리,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도란도란 들리는 폴러들의 이야기는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딱, 하는 소리에 눈을 뜬다. 모코로가 물가 작은 나무의 가지를 꺾으며 지나간다. 순간 사방에 연꽃이 가득하다. 눈이 부시다.

추운 아침

아프리카 최대의 내륙 삼각주, 오카방고 델타로 들어가는 아침. 일어나보니 캠프장 말뚝에 널어놓은 수건이 얼어 있다. 이것 참 겨울은 겨울이군. 캠프장으로 트럭이 한 대 들어온다. 우리를 오카방고 델타로 태워가려는 거다. 우리는 트럭 짐칸에 가지런히 앉는다. 두꺼운 옷을 껴입었는데도 춥다. 하얀 입김이 나온다. 겨울 아프리카의 아침 추위는 예상 밖이다. 여러 날이 지났지만, 적응이 안 된다. 아프리카가 이렇게 추울 줄이야!

오전 7시 50분 캠프장을 빠져나오자 마운(Maun)이란 소도시의 아침 풍경이 펼쳐진다. 사람들의 차림새에서 겨울과 여름을 본다. 반바지에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잔뜩 움츠린 채 걷는 이, 두 손을 모두 주머니에 넣고 자전거를 타는 남자. 반바지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아이들. 여학생들의 하늘색 교복이 참 예쁘다.

트럭이 숲으로 들어간다. 어제 경비행기에서 봤던 나무 숲 사이로 한참을 달린다. 도착한 곳은 선착장. 아니 그냥 나루터라고 해야겠다. 수십 척의 이 지역 전통 카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모코로(mokoro). 이 카누의 이름이다. 이것은 오카방고 델타 원주민이 쓰는 오래된 운송수단이다. 폭은 30㎝ 정도, 길이는 4m 가까이 된다. 전통적으로 나무를 깎아 만들어왔는데 요즘에는 주로 플라스틱으로 만든단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나. 한눈에 봐도 참 가벼워 보이는데, 저런 배가 물에 뜨기나 할까.

모코로 나루터./이서후

폴러(poler). 모코로를 움직이는 사람. 우리말로 하면 사공이다. 이들은 길이가 3m 정도 되는 장대(pole)로 모코로를 밀어서 움직인다. 그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이 지역에 폴러가 600명이 넘는단다. 이 지역 주민 대부분이 이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폴러는 몇 개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 집단은 일종의 생계 공동체인데 같이 벌고 같이 나눈다.

바람을 가르고 수풀을 헤치며

우리는 한 척당 두 명씩 모코로에 오른다. 폴러들은 우리가 들고 간 짐들로 능숙하게 등받이를 만든다. 상체를 등받이에 기대고 누우면 아주 편한 자세가 된다. 모코로를 탈 때 이 자세는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목적지에 닿는 데는 거의 3시간이 걸렸는데, 오랜 시간을 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드러누운 자세가 되고 만다.

모코로를 타고./이서후

내가 탄 모코로의 폴러는 리(Lee)라는 친구다. 그는 밤에는 춥고 낮에는 뜨거운 아프리카 겨울에 어울리는, 반바지에 패딩점퍼차림이다. 20년 동안 이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이틀 동안 우리 일행을 책임질 폴러 공동체의 우두머리다. 올해 31살이란다. 가만, 20년 동안 일을 했다? 그럼 11살부터? 오, 그렇다. 그는 그 나이에 벌써 어른들을 따라 폴러 일을 배웠다.

모코로가 소리도 없이 물 위로 미끄러진다. 어어, 뒤집힐 것 같아! 조그만 기우뚱해도 불안하다. 다리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장대가 물속을 들락거리는 모양새로 봐서 물은 그리 깊지 않다. 40~50㎝나 될까. 팔을 뻗어 물속에 손을 넣어본다. 물이 따뜻하다. 해가 자리를 잡자 바람마저 따뜻해진다. 스르르 긴장이 풀린다.

모코로의 장점은 시선이 수면과 거의 비슷하다는 거다. 마치 물 위를 아주 낮고 천천히 나는 듯 환상적인 기분이다. 낮은 수풀 위에서 한가하던 사마귀, 메뚜기, 거미가 배 위로 뛰어든다. 거미줄이 몇 번이나 얼굴로 달려든다. 모코로에서 두 시간 째. 폴러들마저 침묵에 잠기면서 주위가 갑자기 조용하다. 오로지 사르르 모코로가 물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뿐. 편안하다. 너무 편안해서 꿈결 같다. 몽롱한 꿈속에서 헤매다 문득 판타지 세계로 들어가 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모코로를 타고./이서후

3시간 만에 우리는 마른 땅에 도착했다. 겨울이 오고 건기가 되면 거대한 삼각주 지형 안에 물이 줄면서 마른 땅이 섬처럼 나타난다. 우리가 도착한 곳도 그런 곳 중 하나다. 기슭에 배를 댄다. 우리는 큰 나무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자리를 잡고 각자 텐트를 친다. 폴러들도 텐트를 친다. 폴러들은 이제부터 우리들의 야생 가이드다. 이건 제대로 ‘리얼리티’한 야생 경험 프로그램이다.

폴러 몇이 도끼를 들고 가더니 장작을 마련해온다. 모닥불을 피우고 우리는 그 주변에 둘러앉아 간단하게 점심을 먹는다. 우리가 잠시 쉬는 사이 폴러들은 주변을 정리하고 화장실을 만든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가본다. 으슥한 곳에 그냥 구덩이를 깊이 파놓은 게 전부다. 뭐 상관없다. 캐나다인 론 아저씨가 아이디어를 낸다. 자 이렇게 구덩이 근처 나뭇가지에 두루마리 휴지를 걸어두는 거야. 이게 없으면 누가 화장실이 있다는 뜻이지.

동물을 찾는 폴러./이서후

대자연. 뜬금없이 이 대자연 속에 내팽개쳐지고 나니 할 일이 없다. 이것도 괜찮네, 뭐. 시간이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느낄 필요도 없다. 멍하니 있어도 되고 느릿느릿 움직여도 된다. 누구는 책을 보고 누구는 나무에 기대 쉰다. 텐트 안에서 잠시 쉰다는 게 잠이 들어버렸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이다. 야생의 잠은 꿀맛이다.

그래도 심심해진 나는, 모코로를 움직여보기로 한다. 우선 중심 잡기. 조금 기우뚱하긴 해도 물에 빠지지 않을 자신이 생긴다. 그리고는 장대로 밀어 천천히 기슭을 벗어난다. 벗어나긴 했는데,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다. 잠시 주위를 돌다 다시 기슭으로 돌아온다. 이런, 주차가 안 된다. 생각보다 세심한 콘트롤이 필요하다. 기슭에 모코로를 대는데 거의 30분이나 걸렸다.

동물 탐험대

오후 4시 30분. 그림자가 서서히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간. 우리는 5명이 한 조가 되어 폴러를 따라나선다. 탐험 시간이다. 모코로를 타고 주변 섬에 상륙해서 동물을 찾는다. 바위도, 언덕도 없는 넓은 습지를 우리는 침묵으로 걷는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 소리, 무릎 위로 자란 수풀이 내는 사각사각 소리, 대자연은 그지없이 한가하다.

동물은 보이지 않는다. 올해 큰 홍수가 나서 동물을 잘 볼 수가 없단다. 그래도 열심히 돌아다니는 이유는 바로 코끼리를 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코끼리나 얼룩말, 버펄로 등은 제법 깊은 물도 맘대로 건널 수가 있다. 며칠 전 에토샤 공원에서 밤에 살짝 본 코끼리가 아니라 물에 첨벙첨벙 들어가 코로 물을 빨아들여 뿜어대는 그런 코끼리를 보고 싶다.

동물 탐험./이서후

오카방고 델타는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곳이다. 무리지은 코끼리, 물을 건너는 버펄로 무리를 쫓는 사자. 그런 멋진 장면을 우리는 못 보고 있다! 가이드로 나선 폴러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본다. 초짜 아냐? 딴엔 열심히 동물을 찾는 것 같다. 하지만, 이상하게 말이 많은 게 사기꾼 같기도 하다.

코끼리는 채식주의자다. 한 번에 300㎏을 먹는다. 이것이 코끼리가 좋아하는 나뭇잎이다. 이곳은 코끼리가 만든 구덩이다. 코끼리는 털이 없어 피부를 보호하려고 밤에만 육지로 나온다. 폴러의 말은 끝이 없다. 그러다 발견한 코끼리 발자국. 어림잡아 세로가 40㎝, 가로는 30㎝ 정도 된다. 발자국 옆에 발을 대본다. 음, 이런 발에 밟히면 몹시 아프겠군.

도대체 동물은 어디 있는 걸까. 폴러도 답답했는지 자꾸 두리번거린다. 어? 저기! 얼룩말과 와일드비스트! 어디? 저기! 눈도 좋다. 뭔가 가물거리기는 한데, 하나도 못 알아보겠구먼. 눈을 찡그리니 오, 얼룩말 같기는 하다. 이것이 전부. 결국, 해가 지고, 우리는 텐트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동물 탐험./이서후

저녁. 폴러들이 어떻게 식사를 준비하나 지켜본다. 참 미안하게도 폴러들은 우리가 먹고 남은 음식을 나눠 먹는다. 여기서도 식사 준비는 여성의 몫이다. 여자 폴러 3명이 우리가 먹고 남긴 음식으로 요리한다. 밥을 먹고 나면 설거지도 여성 몫이다. 설거지까지 끝내고 나면 여성들은 다시 둘러 않아 팔찌를 만든다. 남자들은 그동안에 축구 얘기나 하고 논다. 폴러들에게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을 본다.

도착할 때 피운 모닥불이 저녁까지 타고 있다. 폴러들이 주변에서 장작을 모아 불을 키운다. 우리 일행과 폴러가 모닥불 주변으로 모여든다. 때로는 우리끼리, 때로는 폴러와 함께 이야기꽃이 핀다. 문득 하늘을 보니 머리 위 나뭇가지에 초승달이 걸렸다. 여기, 오카방고 델타, 야생의 한가운데서 밤이 깊어간다. 잠이 올까?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난 우리는 어제처럼 모코로를 타고 근처 마른 땅으로 향한다. 다시 동물 탐험. 오전 7시 30분. 얼룩말 두 마리를 봤다. 얼룩말은 이제 지겹다고! 점점 햇볕이 뜨거워진다. 일렬로 수풀을 헤치는 일행과 조금 거리를 두고 뒤따른다. 그러다가, 어? 코끼리 똥 발견. 오, 크다. 똥인데 참 깨끗하다. 막 뒤적거려도 더럽다는 생각이 안 든다. 냄새도 없다. 이 똥을 말려서 태우면 연기가 아주 많이 난단다. 참 오래오래 잘 탈것 같다.

저 멀리. 얼룩말 무리가 보인다. 한 8마리 정도 되는 것 같다. 각자 입김을 내뿜고, 머리를 털고, 갈기를 좌우로 흔들고, 풀을 뜯는다. 한가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우리 일행을 아주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우리는 동물들을 바라보고 동물들은 우리를 바라본다. 물론 우리는 구경이고, 동물들은 경계일 것이다. 노 엘리펀트 투데이. 폴러의 말처럼 오늘도 코끼리 보기는 글렀나 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거대한 바오밥 나무 아래 선다. 유일하게 코끼리가 쓰러뜨릴 수 없는 나무라고 폴러가 말한다.

오카방고 델타의 풍경./이서후
오카방고 델타의 풍경./이서후
오카방고 델타의 풍경./이서후

원시의 실루엣

오전 11시. 텐트로 돌아온다. 오전 내내 4시간 이상 걸어 다녔다. 다들 지친다. 오후 4시까지 일정이 없다. 텐트에 들어가 한숨 자고, 숲 속을 혼자 돌아다녀 본다. 문득 외롭다. 지금 여기서 내가 뭐 하고 있지? 초원에 혼자 있으니 갑자기 무섭다. 어디서 사자 같은 게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쭈뼛거리는 온몸으로 급히 텐트로 돌아온다. 야생은 유유자적하지 않다. 치열한 생의 현장이다. 사자가 나오는 초원에 혼자 서 보지 않고서는 그 치열함을 알기 어렵다.

오후 4시 30분. 다시 모코로를 타고 나선다. 노을을 감상하기 위해서다. 좀 쉬었더니 몸이 가볍다. 모코로는 속력을 내고 바람은 시원하다. 절로 콧노래가 난다. 연꽃 줄기를 꺾어 목걸이를 만든다. 해가 약해지면서 습지 원시림들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황금빛 하늘을 배경으로 드러난 그림자들은 이국적이고 매혹적이다. 노을을 담은 물빛의 아름다움은 차라리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저녁을 먹고 폴러들이 우리를 향해 늘어선다. 자신들의 민요를 들려주겠단다. 오, 뜻밖에 쉽고 감미로운 멜로디다. 아름다운 당신, 잊지 않겠어요, 아름다운 당신. 초승달 뜬 숲 속 하늘로 폴러들의 노래가 높이 울려 퍼진다. 아름다운 당신, 절대 잊지 않겠어요, 오, 아름다운 당신.

그래 잊지 않을게. 아름다운 너. 잘 지내니? 굿나잇.

오카방고 델타의 노을./이서후
원시의 실루엣./이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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