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바다, 오늘은 하늘…사천의 내일은

사천은 경남에서 유일하게 육지길·바닷길·하늘길 '3길'이 열려있다. 이는 오늘날 사천 하면 떠오르는 창선·삼천포대교, 삼천포항, 사천공항 같은 것들을 낳았다. '3길'은 곧 사천의 지난 시간과 지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사천에는 2000년 이후 창선·삼천포대교, 사천대교, 대전통영간고속도로 진주~통영 구간이 잇따라 들어섰다.

2003년 4월 개통한 창선·삼천포대교는 남해 창선도∼사천 삼천포항을 잇는다. 늑도·초양도·모개도를 디딤돌 삼은 각기 다른 형태의 삼천포대교·초양대교·늑도대교·창선대교·단항교가 저마다 자태를 뽐낸다. 이 가운데 삼천포대교·초양대교·늑도대교는 사천에 속해 있다.

   

뱃길이 아니라면 눈앞에 두고도 돌아돌아 남해대교를 이용해야 했던 지난날에 비춰보면 양쪽 모두에 큰 선물이었다. 애초 그 명칭을 놓고 양쪽은 꽤 신경을 곤두세웠다. 특히 통합으로 명칭을 잃은 삼천포 사람들은 여기에라도 흔적을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컸을 터이다. 그 애타는 마음이 반영되기는 했다. 물론 '창선'이 먼저 불리고 '삼천포'가 뒤에 붙는 것은 개운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남해 섬에서 나오는 이들이 우선'이라며 넉넉함을 내비치는 것으로 쓰린 마음을 달랜다.

창선·삼천포대교 개통으로 사천은 남해 관광객 흡수 기대도 컸다. 그리 신통치는 않은 듯 '다리 만들어지고 들어오는 차량은 많아졌지만, 머무르지 않고 스쳐 가기만 한다'는 푸념도 쏟아낸다.

2006년 12월에는 사천 동서를 연결하는 사천대교가 놓였다. 사천은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파고든 사천만을 기준으로 동서로 나뉘는 지형이다. 오른쪽에는 사천읍·옛 삼천포가 있고, 왼쪽에는 서포면·곤양면·곤명면이 자리하고 있다. 서로 간 이동하려면 이 지역 최북단이면서 양쪽 중간에 있는 축동면을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여기에다 사람 붐비는 것을 반대에서 바라봐야만 했던 서쪽 지역은 상대적 박탈감을 안았다. 사천대교는 이러한 것들을 동시에 해결하는 역할을 안고 있다.

   

이보다 1년 앞선 2005년 12월에는 진주~통영 구간이 뚫리면서 비로소 대전통영간고속도로가 완전히 개통했다. 그렇지만 사천 사람들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대전통영간고속도로가 진주까지만 연결돼 있던 그 이전 4년여 간은 충청·전라도 사람들 발길이 풍성했다. 주말 진주에서 사천 가는 길은 늘 붐볐다. 삼천포항 같은 곳은 옛 영화까지는 아니더라도 큰 활기를 띠었다. 고속도로 완전 개통 이후 이 발걸음은 사천을 외면하고 곧장 통영으로 빠져나갔다.

사천에서 '삼천포' 명칭이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삼천포항이다. 지금은 '삼천포가 삼천포항으로 바뀌었다'고도 표현한다. 삼천포항은 1906년 11월 일본인들 손에서 개항했고, 1964년 7월 무역항으로 지정됐다. 올해는 제주도 바닷길이 연결돼 삼천포항 자존심을 잇고 있다.

말이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은 배경을 놓고 여러 설이 있지만 명확하지 않으니 제쳐두고, 1978년 한 주간지 기사에서 처음 언급됐다가 소송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여전히 이곳 사람들은 신경을 곤두세운다.

반대로 이를 승화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를테면 '빠진다'를 '삼천포 매력에 빠진다'로 재해석해 '잘 나가면 삼천포로 빠진다'로 알리는 식이다.

사천에는 택시 위에 달린 표시등이 앙증맞은 비행기 형상을 하고 있다. 시내버스정류장에도 비행기 모형이 눈에 들어온다. 모르는 이들도 이 지역 현재 혹은 미래 살림살이가 항공산업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사천이 비행기와 인연 맺은 것은 1940년대다. 일제가 대륙진출 전초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이곳에 비행장을 건설한 데 따른 것이다. 광복 이후 사천비행장 설치령이 공포돼 군에서 활용했고, 이후 제3훈련비행장으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1969년 서울∼사천∼진해 간 민간항공기가 뜨며 오늘날 사천공항으로 이어졌다. '공항'이라는 말 무게와 달리 오늘날 사천공항은 그리 큰 덩치를 자랑하지는 않는다. 더해서 제주·김포 노선만 운항하는 등 이용자가 많지 않아 국제노선 전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천은 바다를 끼고 있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경남에서 가장 드넓은 갯벌을 드러내고 있다. 내 지역 발전에 무게 둔 쪽에서는 광포만을 메워 공장 짓자는 얘기를 오래전부터 하고 있다. 수달·삵·붉은발말똥게 같은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20여 종의 터전이기도 하다.

서쪽 최남단에는 또 다른 갯벌이 펼쳐져 있는 서포면 비토섬이 있다. 이곳은 '별주부전 전설의 섬'으로 만든 곳이다. 충남 태안군에도 별주부전 마을을 두고 있어 신경 쓰일 법하다. 서포면 비토섬과 별주부전 연결고리를 사천은 몇 가지 내놓고 있다. 조선시대 고서에 등장하는 별주부 축문 내용에 '남해용궁의 별주부'로 명시되어 있어 그 배경이 남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고 내세운다. 여기에 더해 '토별가' 내용 중에 사천시 서포면을 비롯한 서남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전어', 전남지역과 사천 일대에서 주로 쓰는 '깔따구'라는 말이 나온다는 점도 들고 있다.

이랬든 저랬든 비토섬은 자연의 숨소리를 내내 들려주는 갯벌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다.

사천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또 다른 선물은 '실안낙조'다. 이곳 낙조가 특히 도드라지는 이유는 호수와 같이 잔잔한 물살의 바다가 붉은빛을 마음껏 받아들이는 덕이다. 여기에 섬·죽방렴 같은 배경까지 더해진다.

사천에는 이름 알려진 절도 몇 개 있다. 일제 때 항일기지 역할을 한 곳으로 잘 알려진 봉명산 다솔사 외에 백천사는 목탁소리 내는 소가 유명세를 치른다. 하지만 구경꾼 앞에 선 소 눈빛에서 누군가는 애처로움을 읽기도 한다.

곤양면에는 조선 정기를 끊으려는 일제 행태가 어느 정도였는지 새삼 느끼게 하는 것이 있다. 300m를 사이에 두고 있는 세종대왕태실지와 단종태실지다. 조선 왕실은 생명을 준 것이라 하여 태(胎)를 소중히 여기며 명당에 봉안했는데, 세종대왕·단종 태가 이곳에 있었다. 하지만 1929년 일제는 전국에 있는 태실을 옮기고 그 땅은 민간에 팔아버렸다. 현재 세종대왕태실지·단종태실지는 애석하게도 그 흔적을 남겨둔 것에 그친다.

※이 취재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기업 ㈜무학이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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