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바위처럼 살고팠던 사람들의 이야기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거창에는

크고 독특한 모양새의 바위가 많다.

위 두 사진은 수승대 거북바위를 각기 다른 방향에서 본 모습.

거북이를 빼닮은 모습 뒤편에는

옛 선비들의 글귀가 가득 새겨져 있다.

왼쪽은 국내 최대크기의 단일바위라는 문바위.

오른쪽은 탑을 쌓은 듯한 4층바위다.

위·아래 그림은 거창사건추모공원에서 볼 수 있는 석상.

'민간인 학살'의 뼈아픈 역사를 보여준다.

수승대 거북바위(오른쪽) 모습.

수승대 거북바위 모습.

국내 최대 단일바위 '문바위'.

탑을 쌓은 듯한 4층 바위.

   

강호진의 묘(생 1949. 5. 10 / 졸 1951. 2. 9), 이영구의 묘(생 1950. 6. 7 / 졸 1951. 2. 9), 정옥순의 묘(생 1935. 8. 9 / 졸 1951. 2. 9), 정정자의 묘(생 1944. 7. 6 / 졸 1951. 2. 9)….

육면체 윗면과 앞면을 사선으로 깎은 비석은 검은색이다. 단면에 이름을, 비석 오른쪽 면에는 날짜를 새겼다. 태어난 날을 뜻하는 '생(生)' 아래 새긴 날짜는 제각각이다. 그러나 죽은 날을 뜻하는 '졸(卒)' 아래 새긴 날짜는 모두 같다.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묘역'에 모신 원혼은 모두 50위다.

청연묘역을 지나 신원면 대현리에 들어서면 '거창사건 추모공원'에 닿는다. 공원 가운데 조성한 묘역에는 비석 669기가 줄지어 서 있다. 청연묘역에 세운 비석과 똑같은 모양새다. 비석 오른쪽 '졸' 아래 새긴 날짜는 1951년 2월 9·10·11일 중 하나다. 1951년 2월 9~11일은 육군 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이 신원면을 훑고 간 날짜와 일치한다.

학살사건이 발생한 청연마을에 조성된 묘역.

신원면 일대에서 암약하던 빨치산을 없애겠다며 육군이 내놓은 작전 '견벽청야(堅壁淸野)'. 육군은 집과 식량을 태우고 주민을 몰살하며 작전을 실행한다. 박산골 517명, 탄량골 100명, 청연마을 84명 그리고 연행 도중 사살 당한 18명까지 '거창사건 희생자'는 719명이다. 나라를 믿던 국민에게 국민을 믿지 못한 나라가 저지른 만행은 비열하고 잔혹했다. 처참한 사살 현장은 거창·함양·산청 그리고 하동·마산까지 이어진다. 이 나라가 경남 곳곳에 저지른 씻을 수 없는 죄다.

1951년 2월 학살사건으로 희생된 주민들을 추모하는 '거창사건추모공원'.

훼손된 박산골 합동묘소 비석. 1960년대 군사정권의 억압을 그대로 보여준다.

1996년 1월 5일 국회는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거창사건 추모공원'은 이 법을 근거로 2000년 10월 착공해 2004년 10월 준공됐다.

거창(居昌) 옛 이름은 거타(居他)·거열(居列)·아림(娥林) 등이다. 모두 '넓고 큰 밝은 들'이라는 뜻을 담은 지명이다. 하지만, 거창에는 이런 이름에 어울리는 들이 별로 없다.

거창군 전체면적(804.14㎢)에서 산(613.58㎢)은 76%를 차지한다. 농사지을 땅이라고 해 봐야 고작 15% 정도다. 애초에 논밭 농사로 살림을 불릴 만한 땅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1960년대까지 거창 주민 75%는 농민이었다. 없는 땅을 일궈 나오는 수확은 뻔했다. 애써 땀 흘려도 영세농민 수준을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그나마 1940년대부터 뛰어든 사과 생산이 서서히 자리매김하면서 이곳 농민들 살림은 폐기 시작한다.

지명과 달리 거창이 지닌 자산은 산이다. 덕유산과 가야산 자락이 둘러싼 거창은 전형적인 고산 분지다.

덕유산 줄기인 삼봉산(1254m), 대봉(1300m), 지봉(1302m), 거봉(1390m), 상여덤(1400m), 덕유산 하봉(1594m) 등이 전라북도 무주와 경계를 이룬다.

또 가야산 줄기인 수도산(1317m), 단지봉(1327m), 민봉(1259m), 두리봉(1133m)은 경북 김천시와 거창군 사이를 가른다.

거창과 합천 사이에는 두무산(1039m), 남산(1140m), 의상봉(1046m), 비계산(1126m), 오도산(1134m), 문재산(1126m)이 우뚝 솟았다. 월봉산(1288m), 금원산(1353m), 기백산(1331m) 너머가 함양, 솔봉산(645m), 매봉산(800m) 너머가 산청이다.

표고 200m 이상 분지인 거창에는 들어오는 물이 없고 나가는 물만 있다. 거창을 둘러싼 산들은 낙동강 지류인 황강·남강·감천·금강 발원지다. 경남 사람 상당수는 거창에서 솟는 물에 기대는 셈이다. 이 같은 자연환경은 '북부 경남 중심'이라는 이곳 사람들 자랑에 힘을 보탠다.

덕유산과 가야산이 품은 절경 또한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다. 사방을 둘러봐도 겹치고 또 겹치는 산줄기는 서 있는 자리마다 다른 눈맛을 안긴다. 완만한 능선과 깊은 녹음이 덕유산이 지닌 멋이라면, 가야산은 하늘을 찌를 듯한 뾰족한 산세로 다른 매력을 뽐낸다. 두 산은 또 산세에 걸맞은 풍성한 숲과 깊은 계곡을 이 땅에 내주었다.

여기 사람들이 제 지역 풍경을 자랑할 때 먼저 꼽는 곳은 수승대(위천면)이다. 주변에는 요수정, 관수루, 황산마을 고가촌 등이 있다. 수승대는 해마다 '거창국제연극제'가 열리는 무대이기도 하다. 월성계곡(북상면)과 금원산(위천면) 계곡도 빼놓을 수 없겠다. 거창군은 금원산 일대에 자연휴양림과 생태수목원을 조성해뒀다. 더불어 거창군 동쪽에 자리한 분지 가조면은 온천이 유명하다. 이곳 사람들은 강알칼리성(pH 9.7)을 띠는 물이 전국 최고 수질이라고 내세운다.

하지만, 풍요로운 산세가 여기 사람에게 늘 자랑거리만 안긴 것은 아니었다. 바깥과 통하기 어려운 고산분지는 유배지로 적당했다. 거창은 권력에 밉보인 조선 선비들이 몰린 곳이기도 했다. 물론 이들 중에는 권력이 불편하게 여겼을 뿐 소양은 남다른 인물도 있었다. 그들은 척박한 땅에 무시 못할 문화적 자산을 남겼다. 그렇다 하더라도 애초부터 이곳은 변방이었다. 거창이 '북부 경남 중심지'를 내세운 시기는 일제강점기 법원·검찰·세무서가 들어서면서부터라고 보는 게 맞다.

1951년 '거창사건'도 이곳 지형이 아니었다면 피할 수 있는 비극이었을지 모른다. 오만하고 잔인한 공권력이 민간인을 학살하며 내세운 핑계는 험한 산세를 근거로 삼은 빨치산이었다.

문화적 자산만 보면 거창과 이웃 함양은 닮았다. '선비의 고장' 함양이 무엇을 내세워도 거창 사람들은 웬만해서 지지 않는다. 함양에 김종직(1431~1492)·정여창(1450~1504)이 있다면 거창에는 갈천 임훈(1500~1584)·동계 정온(1569~1641)이 있다.

임훈은 1540년(중종 35년) 벼슬에 올라 1553년(명종 8년) 사직서참봉, 이듬해 집현전참봉으로 임명됐다. 이후 제용감창봉 등에 임명됐으나 사퇴해 늙은 아버지를 모신다. 나라는 그 효를 칭송해 1564년 정려문(旌閭門)을 내린다. 1566년 언양현감으로 다시 발탁된 임훈은 군자감주부·비안현감·장앙원정·광주목사 등을 지낸다. 퇴계 이황(1501~1570)·남명 조식(1501~1572) 등 당대 뛰어난 유학자와 교류하며 학문과 인품을 널리 알렸다. 북상면에는 임훈이 살던 '갈계리 임씨고가'와 후진을 키우고자 지은 '갈천서당'이 남아 있다.

정온은 1601년(선조 39년) 진사가 돼 1610년(광해군 2년) 문과에 급제했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게 피살되자 정항 처벌과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분노한 광해군은 정온을 국문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다. 훗날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자 유배에서 풀려난 정온은 대제학·이조참판까지 역임한다. 병자호란 때는 끝까지 화의를 반대하기도 했다. 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되자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덕유산에서 은거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위천면에는 '정온선생 종택'이 남아 있으며 후손들이 살고 있다.

조선 선비 문화를 상징하는 누정(樓亭·누각과 정자) 이야기가 나오면 거창 사람들 어깨에는 절로 힘이 들어간다. 거창에는 춘풍루·앙진루(거창읍), 자전루(웅양면), 화엽루(북상면), 관수루(위천면), 소심루(남하면) 등 6개 누각이 있다. 더불어 지역에 고루 퍼진 정자는 89개로 이 땅에 누정 건물만 95개에 이른다.

풍류는 선비 문화를 이루는 축이고 누정은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누정이 많은 거창은 선비들 자취가 풍성하게 남은 곳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함양 선비', '거창 사과'라는 통칭을 여기 사람들은 거스르려하는 면이 있다. 선비 문화는 함양 게 아니라 '안의현(安義縣)' 것이라고 비트는 데는 그런 섭섭함이 담겼다. 하지만, 함양에 대한 시샘이 섞였더라도 안의현을 끄집어내는 말에는 근거가 있다.

안의현은 거창군 마리면·위천면·북상면과 함양군 안의면·서하면·서상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이다. 1417년(태종 17년)부터 안음현(安陰縣)으로 불리다가 안의현이 된 것은 1767년부터다. 이후 1895년 진주부 안의군, 1896년 경상남도 안의군이 됐다가 1914년 거창과 함양으로 나뉘면서 안의군은 사라졌다.

옛 안의현에 속했던 지역에 선비 문화 자취와 유적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안의현이 거창과 함양으로 나뉘면서 두 지역이 내세울 만한 선비 문화를 공유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선비의 고장'이라는 수식을 함양이 선점했다는 게 거창 처지에서는 못내 아쉽다. 그렇더라도 기민한 함양군 행정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높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는 애초부터 변방이었다. 권력은 늘 이 땅과 이곳 사람들을 외면했고 핍박했다. 그러다 이에 저항하면 서슴없이 짓밟았다. 거창을 잘 아는 사람들은 여기 사람들 바탕에 깔린 기질을 '저항정신'에서 찾곤 한다. 이는 아무래도 강직한 성품을 내세우고 싶은 뜻이 강하다. 하지만, 저항 정신이 강하다는 것은 저항할 일이 그만큼 많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거창은 서러운 역사를 품은 땅이다.

거창농민항쟁을 이끈 평민 이승문을 추모하는 사당 '인민사'.

거창읍 가지리 개화마을에는 '인민사(仁民祠)'가 있다. 1932년 이곳 사람들이 평민 이승문을 추모해 세운 사당이다. 이승문은 1862년 '거창농민항쟁'을 이끈 이들 가운데 한 명이다. 평민을, 그것도 지배계급 처지에서 보면 역모죄인을 후세 사람들이 의롭다고 받든 것이다.

거창농민항쟁은 가혹한 군포 징수를 견디다 못한 백성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다. 농민을 이끈 이들은 이시규·최남규·이승문이다. 4개월 남짓 이어진 항쟁은 결국 관군에게 진압된다. 항쟁을 이끌었던 주모자는 처형당했다.

현재 인민사는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지 오래다. 건물은 위태롭고 주변은 잡초만 무성하다. 하지만, 지배계급에 대항한 평민에게 당시 사람들이 느꼈던 연민은 흔적이나마 남아 있다.

거창 양반도 더 센 권력 앞에서는 소외된 집단이었다. 1728년 '무신란(戊申亂)'은 경종(1688~1724)이 죽고 영조(1694~1776)가 즉위하자 위기를 느낀 소론(少論)이 노론(老論)과 영조를 없애고자 일으킨 난이다. 이때 안음현과 거창 일대에서 난을 주도한 인물이 정희량이다. 정희량 고조부가 바로 동계 정온이다. 충청·안동·안의에서 기세 좋게 일으킨 난은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관군에게 진압된다.

양반들 싸움에 등이 터진 쪽은 백성이었다. 안음현은 역적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지명을 잃었다. 이곳에 살던 백성은 어딜 가나 죄인 취급을 받았다. 몰락을 겁낸 지배계급이 권력을 차지하고자 벌인 저항이 낳은 대가였다. 그 대가는 벼슬길 막힌 양반 못지않게 백성에게도 가혹했다.

   

1951년 거창사건은 죽은 자는 물론 산 자에게도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떠안긴다. 1961년 5·16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권은 희생자 명예회복을 염원하던 유족과 유족회 간부를 오히려 반국가단체 구성원으로 몰아붙였다. 그것도 모자라 유족들이 1954년 가까스로 조성한 박산골 합동묘소를 서슴없이 파헤친다. 유족들은 '부관참시(剖棺斬屍)'로 그 서러운 날을 기억한다. 군사정권은 이후 연좌제 칼까지 씌우며 유족들 입을 막고 손발을 묶는다.

신원면 대현리 박산골 묘역에는 군·경이 정으로 글자를 쪼개고 쓰러뜨린 비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거창 사람 기질이라는 저항정신은 서러운 역사가 억지로 떠맡긴 부채일지도 모르겠다.

거창에 검찰청이 들어선 것은 1908년이다. 이어 1909년 법원, 1929년에는 세무서가 들어선다. 해방 전에 주요 행정기관 3개가 들어선 것이다. 거창은 산청·함양·합천 등 북부경남을 아우르는 행정 중심지가 된다. 이는 거창 사람들이 북부경남 '터줏대감'을 자처하는 근거가 됐다.

1960년대 인구 14만 명을 웃돌던 거창은 1980년대 들어 인구 10만 명 선이 무너진다. 거센 이촌향도(離村向都) 바람이 거창이라고 피해갈 리 없었다. 현재 거창 인구는 6만 4000여 명이다. 그래도 거창 인구는 늘 주변 산청·함양·합천보다는 많았다. 내세울 만한 2·3차 산업이 없는 거창에서 그나마 사람들을 붙든 것은 행정·교육기관이었다. 그 덕인지 산청·함양 또는 합천을 한 지역구로 묶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자는 대부분 거창 출신이었다. 자연스럽게 '정치인은 거창 출신'이라는 자랑거리가 보태졌다.

행정과 더불어 군세를 북돋운 것은 교육기관이다. 거창여고, 거창고, 거창중앙고, 거창대성고, 가조익천종합고, 아림고, 대성일고 등 거창에 있는 고등학교는 7개다. 이 가운데 거창고와 대성고가 '교육 도시' 거창을 이끈 양대 사학으로 꼽힌다. 이들 사학은 최근 입시 명문으로 눈길을 더 끌고 있다. 거창에서 멀리 타지역 '유학생'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한때 '거창에 있는 학교를 거창 학생들이 못 다닌다'고 할 정도로 '명문대 바라기' 행렬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곳을 아끼는 이들은 예전과 달리 모여드는 인재들이 거창 인재로 자리매김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행정·교육기관은 자연스럽게 사람을 끌어들였다. 거창읍은 이른바 배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주변 군(郡)지역과 달리 거창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시민사회운동이 세련된 흐름으로 움튼다. 거창에서 시민사회운동 시발점은 1970년대 후반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 자양분은 1950년대 교육 운동에서 찾는 게 마땅하다. 그 중심에는 거창고가 있다. 거창고는 1956년 제3대 교장인 전영창이 선진적인 교육이념을 실천하며 지역에서 유별난 학교로 자리매김한다. 이후 민청학련 사건에 얽혀 옥고를 치렀던 정찬용이 1976년 거창고 선생으로 오면서 지역사회운동 전방위에 걸쳐 활기를 더한다.

거창고를 중심으로 한 교육운동이 지역 시민사회운동 한 축을 이끌었다면 다른 한 축은 농민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1979년 5월 거창에는 농민이 주도한 모임인 '농우회'가 생긴다. 농우회는 훗날 거창군 농민회 모태가 된다. 농우회 창립을 주도한 표만수·이상모 씨 등 농민은 1978년 크리스천아카데미가 운영한 농민운동가 지도자교육생 출신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선한 이가 정찬용이다.

1982년에는 '거창YMCA 지역사회개발센터'가 건립된다. 현재 거창 시민사회를 이끄는 단체들은 그 뿌리를 YMCA에 두거나 YMCA를 거쳐 조직화했다고 보면 된다. 환경 문제에 집중하는 '푸른산내들', 지역 행정 감시 역할에 비중을 둔 '함께하는 거창'이 대표적이다. 거창 시민사회단체 큰 축은 이들 단체와 더불어 거창농민회와 전교조로 보면 된다. 이들 단체는 분야·주제별로 각자 또는 교류하면서 지역사회에 자극을 공급한다. 행정·교육 그리고 풍부한 자연과 더불어 거창 자존심을 지키는 저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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