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자연에 손내밀다...역사, 미래에 손짓하다

양산시 원동면, 물금읍, 동면을 지나는 낙동강 길이는 19.3㎞이다. 강은 양산과 김해를 가른다. 강가에는 잘 정비된 자전거 길이 이어진다. 자전거 길 옆에는 공원 조성이 한창이다. 길은 페달을 밟으며 지나치는 무리 덕에 지겹지 않다. 그들에게 오르막이 드문 평탄한 길은 한껏 여유를 안긴다. 한쪽에 강을, 다른 한쪽에 산을 낀 풍광까지 눈맛을 돋운다.

양산시는 원동 취수장에서 물금 취수장까지 2㎞를 따로 뽑아 굳이 '황산강 베랑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동면 오봉산 벼랑을 낀 구간이다. '황산강'은 낙동강 옛 이름이고 '베랑'은 벼랑을 이 고장 말로 옮긴 것이다. 오봉산에는 신라시대 최고 문장가 고운 최치원(857~925)이 산 아래 경치를 즐겼다는 '임경대(臨鏡臺)'가 있다. 최치원이 즐겨 봤다는 그 절경이 여기 자전거 길 배경이다.

'황산강 베랑길'은 '낙동강 자전거 길(324㎞)' 일부다. 경북 상주에서 부산 낙동강 하굿둑까지 이어지는 낙동강 자전거 길은 '4대 강 국토 종주 자전거 길(1757㎞)'에 포함된다. 이 자전거 길은 이명박 정부가 밀어붙인 '4대 강 사업'에 딸린 공사다. 그 4대 강 사업 중 하나가 '낙동강 살리기 사업'이다. 양산을 지나는 낙동강 19.3㎞는 '낙동강 살리기 6~11공구'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7·8공구가 걸친 지역이 원동면이다.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임경대.

원동면은 양산시 행정구역 중 가장 넓다. 전체면적(484.27㎢) 가운데 30.6%를 차지한다. 뒤로는 천태산(630.9m)과 토곡산(855m), 오봉산(533m)을, 앞으로는 낙동강을 둔 원동면은 예부터 품질 좋은 과일로 유명했다. 농산물이라고 해봐야 딱히 내세울 게 없는 양산에서 원동 딸기·수박·매실은 이름값을 했다. 낙동강변에 넓게 펼쳐진 밭에 딸기를 심고, 딸기 수확이 끝나면 수박을 심었던 이곳 농민들 수익은 쏠쏠했다.

이곳에서 '낙동강 살리기'는 밭을 엎으면서 시작됐다. 땅만 이곳에 둔 지주, 제 땅 농사지을 기력이 떨어진 노인들이 먼저 보상을 반겼다. 하지만,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이들도 많았다. 기댈 땅을 잃은 농민은 일을 놓거나 땅을 떠나야 했다. 때맞춘 농사와 그에 따른 소득으로 활기 넘쳤던 마을은 을씨년스럽고 적막해졌다.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을에서는 목돈을 쥔 득이 큰지, 활기를 잃은 실이 큰지 한지붕 아래서도 셈이 엇갈린다. 어쨌든 원동 딸기와 수박은 이제 밖으로 내세울 이름을 잃었다. 사업이 뻗치지 않은 산에서 키우는 매실만 가까스로 이름을 지키고 있다.

자연과 사람, 개발과 보존이 엉키며 갈림길에 서 있는 곳. 원동면 이야기는 양산 이야기이기도 하다.

계곡 닮은 땅에 들어선 공단

양산 땅 생김새는 계곡을 빼다박았다. 양산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두 갈래 산맥과 그 사이를 흐르는 양산천 모양새가 그렇다. 양산천을 중심으로 서쪽이 '영축산맥'이다. 울산 울주군 언양면 신불산(1208.9m)에서 시작해 영축산(1058.9m), 시살등(980.9m), 염수봉(816.1m), 오봉산(533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경북과 경남 밀양·양산으로 이어지는 해발 1000m 이상 산악군, 이른바 '영남 알프스' 끝자락이 이곳에 걸쳐 있다. 양산천 동쪽 천성산맥은 울산 울주군 삼동면과 양산 하북면 경계를 이루는 정족산(700.1m)에서 시작한다. 산줄기는 천성산(922.7m)을 거쳐 금정산(801.9m)으로 이어진다. 두 산맥 사이를 흐르는 양산천을 낀 삼성동·중앙동·양주동 등이 양산시 중심가를 이룬다.

땅 생김새 덕인지 양산은 빼어난 계곡이 많다. 내원사 계곡(하북면), 배내골·통도골(원동면)은 양산은 물론 동부 경남을 대표하는 절경이다. 아울러 무지개·혈류폭포(평산동), 용연·불음폭포(원동면), 홍룡폭포(상북면) 등 양산이 자랑하는 폭포들이 거느린 계곡도 훌륭하다. 양산을 둘러싼 산은 숲이 울창해 멀리서는 언뜻 완만하고 포근한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골짜기에 들어서면 드러나는 바위와 절벽은 멀리서 보는 것과 사뭇 다르다.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이 어울려 유난히 깊고 신비로운 계곡을 만들어낸다.

양산을 둘러싼 자연이 이 땅에 베푼 자산은 이미 풍족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그냥 주어진 것에 마땅히 쏟아야 할 가치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부산을 마주한 지리적 특성을 살리는 쪽으로 고민이 쏠렸다. 1970년대 후반부터 진행한 공단 조성은 대도시 배후도시로서 위치를 나름 고려한 사업이었다. 양산은 살길을 공업에서 먼저 찾는다.

양산지방산단과 어곡지방산단.

1978년 유산동 일대에 '양산지방산업단지' 공사가 시작된다. 1981년 완공된 이 단지는 양산에 들어선 산업단지 가운데 가장 먼저 조성됐다. 이미 공업용지난을 겪던 부산은 산업단지 조성을 지원했다. 1989년에는 '웅상농공단지'가 완공된다. 부산과 울산 가운데라는 위치와 잘 갖춰진 산업 기반시설이 조건에 맞았다. 이어 양산지방산업단지와 인접한 어곡동 일대에 '어곡지방산업단지'가 2003년 완공된다. 30여 년에 걸쳐 3개 산업단지가 들어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북정·산막·소주·소토공업지역이 형성되면서 양산은 신흥 공업도시 틀을 갖춘다. 현재 산업단지와 공업지역에는 1510개 업체가 입주했으며 4만 2000여 명이 일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공단 조성이 양산을 부유하게 한 것은 사실이다. 공단 터에 포함된 땅을 보상받은 이곳 사람들은 목돈을 쥘 수 있었다. 또 양산 안팎에서 몰려든 노동자는 도시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공업도시는 소비도시이기도 했다. 양산시 행정이 공업과 소비 중심으로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당연한 듯했던 행정은 그로 말미암은 부작용을 낳았다.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공업도시를 지나칠 리 없는 공해는 어느덧 양산에 그늘을 드리웠다. 양산천은 시커먼 빛깔과 고약한 냄새로 그 어두운 면을 경고하기 시작했다.

   
 

가진 게 많아서 갖지 못한 것들

양산은 신흥 공업도시다. 양산 살림을 떠받치는 공단과 신도시에 모여드는 인구를 보면 그렇다. 하지만, '공업도시'라는 말은 양산이 지닌 한 면만 담는다. 양산에는 양산천 양쪽으로 뻗은 산맥이 품은 깊고 풍성한 계곡이 있다.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풍광도 빼어나다. 통도사·내원사를 비롯한 불교문화 유산도 풍부하다. 양산은 '관광도시'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없는 곳이다. 그래도 '관광'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다면 '공업'에 대한 인상이 큰 탓이지 '관광'이 부족해서는 아니다. 이런 면을 아우른다면 양산은 '넉넉한 도시'라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양산이 '넉넉한 도시'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자산을 과장한 표현이 아니다. 실제 양산 살림살이는 경남지역 어느 지방자치단체보다 탄탄하다. 2012년 양산시 재정자립도는 42.3%로 경남에서 가장 높다. 최근 5년 동안 자료를 봐도 양산은 창원·김해·거제와 더불어 늘 재정자립도가 높은 지역으로 꼽힌다.

이곳 사람들은 부를 쌓을 기회도 적지 않았다. 양산에는 크게 3번 땅값이 급등한 시기가 있다. 여기 사람들은 이를 비틀어 '3 뻥튀기'라고 일컫는다. 바로 1960년대 경부고속도로 건설, 그리고 1970년대 말 지방산업단지 건설, 1990년대부터 이어지는 신도시 건설 시기다.

도시 모양새를 뒤바꾼 대형사업은 별볼일없는 땅을 지닌 이곳 사람들에게 큰 부를 안겼다. '20%도 안 되는 양산 토박이가 양산 돈 70%를 가졌다', '양산 개는 억억 짖는다' 같은 말도 그런 갑작스런 부를 얻은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양산은 가진 게 많은 만큼 없는 것도 많은 도시다. 먼저 이 땅에는 꼬집어 내세울 만한 특산물이 없다. 산지가 많은 이곳은 경지가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양산천 하류와 낙동강 주변 땅에서는 그런대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공단과 신도시, 최근에는 4대 강 사업까지 진행되면서 농사지을 땅은 점점 사라졌다.

   
 

양산천과 낙동강을 끼고 있지만 물에서 나는 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다. 낙동강에서는 민물고기는 물론 바다에서 거슬러 오는 고기까지 낚곤 했지만 지금은 먼 옛날 얘기다. 1987년 낙동강 하굿둑 건설 이후 여기 강에서 유난히 많이 나는 고기는 없다. 양산천 역시 공단 조성 이후 한동안 생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땅과 물에서 나는 재료가 풍부하지 않으니 지역색이 담긴 음식도 별로 없다. 이곳 사람들에게 양산을 대표하는 음식을 물으면 선뜻 답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통도사 주변 사찰 음식이나 솜씨 좋은 식당 몇 곳을 소개하는 정도다.

지역을 대표할 만한 역사적인 인물도 찾기 어렵다. 이곳 사람들에게 양산을 대표하는 인물을 물으면 멀리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363~419)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그 뒤를 잇는 인물을 선뜻 꼽지 못한다. 긴 역사를 훌쩍 뛰어넘어 나오는 인물이 아동문학가 이원수(1911~1981)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양산에서 '우리 인물'로 확실하게 품지 못한다. 박제상 기념관은 울산, 이원수 문학관은 창원에 있다.

양산에 역사적 인물이 많지 않은 이유는 이곳 사람들도 꼬집어 말하지 못한다. 살림이 넉넉했기에 출세욕이 없었다, 강변 평야에 살던 사람들이 독하지 않았다 정도로 풀어낼 뿐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 지역 위치와 기능에서 찾는 게 맞을 듯하다. 양산은 역사적으로 주도권을 쥐거나 특별한 기능을 맡은 적이 없다. 신라 시대 경주를 비롯해 근·현대 들어 부산·울산까지 큰 도시를 가까이 두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오히려 큰 도시와 잦은 왕래 때문에 독특한 지역색에 대한 고민은 덜했다. 예나 지금이나 양산은 큰 도시 곁에서 배후도시 기능을 했다. 이곳을 터전 삼아 업적을 이루기에는 주변 도시가 드리운 그늘이 짙었던 셈이다.

큰 도시 사이에 끼인 지리적 위치는 오늘날에도 이곳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안기는 면이 있다. 양산은 행정구역으로 보면 경남이다. 하지만, 법원 관련 업무는 울산에서, 세무 관련 업무는 부산에서 처리해야 한다. 어느 지역보다 경남이라는 소속감이 옅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이곳 사람들은 거리나 생활권으로 봤을 때 부산을 더 가깝게 여긴다. 그래도 늘 큰 도시 뒤치다꺼리를 한다 싶어 쌓인 섭섭함은 제법 깊다.

최근 양산은 이 같은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삼산(三山, 양산·부산·울산)의 중심지 양산'이라는 구호에서 그런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큰 도시 사이에서 겪던 설움을 중심지 역할을 통해 자부심으로 바꾸겠다는 시도다.

통도사가 있기에

양산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 아무리 이 지역을 깎아내린다 해도 결국 통도사(通度寺)에서 막힐 수밖에 없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불보(佛寶) 통도사는 법보(法寶) 해인사, 승보(僧寶) 송광사와 더불어 삼보사찰(三寶寺刹) 가운데 하나다. 양산을 넘어 경남, 아니 이 나라가 자랑하는 보배다.

'양산이 지닌 문화적 자산을 모두 버려도 통도사 하나면 된다'는 말은 과장이겠지만 그렇게 지나친 표현도 아니다. 양산에 있는 국가·도 지정 문화재는 모두 151점이다. 문화재 보유 수만 따지면 경남에서 가장 많다. 이 가운데 86점이 통도사에 있다.

통도사를 둘러싼 경치 또한 빼어나다. 부처 사리와 가사·대장경을 봉인했기에 절 이름 앞에 붙이는 '불보'에 담긴 뜻은 각별하다. 하지만, 통도사를 감싸는 절경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영축산 통도사'라는 이름이 더 살가울 듯하다. 여기에 영축산 곳곳에 자리한 통도사 암자가 한껏 매력을 더한다. 서운암·옥련암·백련암·사명암·수도암·안양암·자장암·서축암·금수암·극락암·반야암·비로암·백운암·관음암·보문암·무량암·축서암·취운암·보타암을 묶어 '통도사 19암자'라고 부른다. 암자를 돌면 이 나라에 있는 절 생김새를 모두 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건축 양식을 감상할 수 있다.

통도사 19암자 중 하나인 서운암.

통도사가 워낙 빛나서 그렇지 양산이 자랑하는 절은 통도사만 있는 게 아니다. 천성산 기슭에 자리한 내원사는 646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절 규모는 아담하지만 절까지 이르는 계곡은 '소금강(小金剛)'이라고 불릴 정도로 절경이다. 이밖에 용화사·신흥사·미타암·원효암·홍룡사·계원암 등 절은 양산이 지닌 불교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자연에 내민 손길에서 찾은 미래

1970년대 말 산업단지 조성을 시작으로 양산은 도시 규모 키우기에 열을 올린다. 늘어나는 공장과 몰려든 노동자, 생산과 소비 규모는 갈수록 커졌다. 양산시 행정은 공업과 소비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난개발'이었고 환경은 뒷전으로 밀렸다. 이 같은 행정에 대한 경고는 양산천에서 나온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은어 떼가 다니고 아이들이 멱감던 강은 점점 탁해졌다. 오·폐수는 쏟아졌지만 이를 걸러낼 시설은 그 속도를 쫓지 못했다. 시커멓게 변하고 고약한 냄새까지 풍기던 강은 기어이 생물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한다.

양산시는 2006년 들어 '양산천 친환경 종합개발사업'을 세운다. 30년 남짓 외면했던 자연에 화해 손길을 내민 셈이다. 2015년 준공 계획인 양산천 사업 성과는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수질개선사업 덕에 양산천 수질은 1~2급수로 회복됐다. 양산은 2015년까지 하천 전역을 1급수로 만들 계획이다. 양산 시민들은 강변에 조성된 산책로를 거닐며 어렵게 되찾은 강을 반긴다.

자연을 외면하면서 생긴 부작용은 양산천뿐만이 아니다. 부산·울산지역 소비를 끌어들이겠다며 세운 골프장은 그대로 두어도 더없이 아름다운 산을 무자비하게 파헤치며 들어섰다. 그렇다고 해서 골프장이 양산 살림에 큰 보탬이 된 것도 아니다. 일부 골프장은 예사로 지방세를 체납해 빈축을 사며, 한 골프장은 체납액을 처리하지 못한 채 올해 결국 파산했다. 이 와중에도 골프장 한 곳이 신축 중이다. 골프장 신축 현장은 시내에서도 쉽게 보이는데 움푹 파헤쳐진 산등성이 흙더미는 주변 숲과 비교돼 더욱 보기 흉하다. 양산 시민도 공사 현장을 볼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곳 사람들은 양산을 한마디로 '가능성이 풍부한 도시', '미래가 밝은 도시'라고 정리한다. 탄탄한 산업 기반과 더불어 수려한 자연환경까지 갖춘 지역 자산에 거는 기대다. 해마다 1만 명가량 늘어나는 인구도 이 도시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열쇠는 도시와 자연을 조화롭게 엮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생기를 찾는 양산천은 이곳 사람들이 그리는 미래에 대한 실마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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