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이상용 극단마산 대표

많은 이들이 마산을 예술의 도시, '예향(藝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지금 젊은이들에게도 과연 마산이 예향일까? 그다지 와 닿지 않는 이름 아닐까? 한 때 잘 나가던 도시(좀 물리지만 7대 도시), 좀 유명한 예술가들이 거쳐 갔던 도시 정도라는 건 여기저기서 주워들어 알겠지만, 왜 예향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그 생생한 사연을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소통이 단절된 탓이 크다. 아는 사람은 절절하게 알아도 모르는 사람은 생뚱맞게 모른다. 그 틈이 워낙 크다 보니 같은 마산 지역에 살아도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세대 간 계층 간 공유하는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지역은 쇠약해져만 간다. 그리고 지역의 심리적인 크기도 위축되기만 한다.

지난해 가을 창원시 지원을 받아 경남도민일보 부설 지역스토리텔링연구소가 추진하는 '마산스토리텔링-창동오동동이야기(www.masanstory.com)'가 시작됐다. '이야기'라는 매개를 통해 지역민의 소통을 촉진하고, 그것이 지역발전의 밑거름이 되게 하자는 취지였다.

이상용 극단마산 대표./이효진 스토리텔러 lepetitprincejin@gmail.com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콘텐츠가 문제 아니던가. 사이트 하나 만들었다고 소통이 저절로 활발해질 리는 만무하다. 지역민의 관심을 이끌어낼 ‘맞춤형 미끼’(이야기)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선물처럼 '그분'이 나타났다. 마산 연극계의 대부, '극단 마산'의 이상용 대표가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편집국장의 청을 받아들여 펜을 잡은 것이다.

이름하여 '이상용의 마산야화'. 이 원고를 마감한 1월 10일까지 이 대표는 7회째 마산야화를 게재했다. 작년 12월 15일 첫 원고가 게재됐으니 불과 20여 일 만에 작성한 것이다. 연재는 예술인의 아지트였던 다방과 1970~198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음악다방을 세세하게 훑었다. 가수 김세환의 아버지 김동원 배우가 운영했던 '동원다방'부터 테니스 선수였던 박종구가 운영한 음악감상실 '만토바니'에 이르기까지, 마산 사람이라면 아련하게 간직하고 있을 감수성을 일깨우는 따뜻한 촉매제였다.

   
 
반응은 뜨겁다. 이 대표의 글이 실리는 날은 댓글 풍년이다. 미끼가 훌륭하다 보니 저마다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온다. 필자 이야기는 밑그림이 되고, 독자는 거기에 자기 이야기로 색깔을 입힌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어느새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자라난다. 

'마산야화'로 되살아난 소중한 지역 이야기

사업 담당자로서 너무나 고마워 이 대표를 찾아갔다. 그가 생각하는 마산, 그리고 마산의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마산 예술의 황금기에 성장했지만, 지역의 어른이 된 지금 쇠락하는 마산 예술을 지켜봐야 하는 심정은 어떨지 궁금했다. 먼저 마산이 왜 예향이라 불리게 됐는지가 궁금했다.

"마산이 예향이 된 건 6·25 전쟁 때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남쪽으로 피난 온 예술인 중에 마산에 정착한 분이 많았거든요. 그분들은 대개 마고와 마여고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전쟁 통에 예술인들이 피난 내려온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그들 중 상당수는 전쟁이 끝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마산에 정착한다. 마치 신라의 최치원이 월영대를 짓고 마산에 정착한 것처럼, 해방정국의 제법 많은 예술가가 마산의 그 무엇에 매료됐는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상용 극단마산 대표./이효진 스토리텔러 lepetitprincejin@gmail.com

"당시 마산의 예술이 얼마나 대단했느냐면, 조두남 선생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내가 대학 시절에 조두남 선생 댁에서 입주로 자녀를 가르쳤거든. 그때 선생님 집을 드나들던 분들 면면이 정말 굉장했어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당시 연세대 음악대학 학장이었던 나운영 선생이 직접 조두남 선생님을 집에까지 찾아올 정도였으니까요."

마산의 예술이 또 융성할 수 있었던 토양은 바로 다방과 주점이었다. 프랑스에 살롱이 있었다면, 마산에는 다방과 주점이 있었다. 이 대표가 이야기의 첫 테마로 다방을 세세하게 언급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 대표는 크게 3세대로 구분했다.

이상용 극단마산 대표./이효진 스토리텔러 lepetitprincejin@gmail.com
"마산의 예술아지트 1세대가 외교구락부 시절입니다. 그리고 2세대는 조남륭 형의 '음악의집' 시절이고요, 그리고 마지막 3세대는 문자은 여사가 운영했던 '고모령'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다방과 주점들에 예술인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문화도 발전하려면 인프라가 필요하다. 하지만, 건설업처럼 수백억 예산을 투입해 시멘트를 처바르고 철골구조로 쌓아올려야만 인프라가 되는 건 아니다. 지난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그저 예술인들이 맘 놓고 친구 만나 차 마시고 술 마실 수 있는 다방과 주점 정도만 있어도 문화는 융성할 수 있었다. 거기서 각자의 창의성이 만나 새로운 융합을 이뤄내고, 그것은 이내 또 다른 창조로 이어졌다.

마산의 지난 역사뿐만이 아니다. 자국의 전통문화를 세계화시키는 데 제대로 성공한 아일랜드는 그 자양분이 바로 '아이리시펍(아일랜드 특유의 맥주 선술점)'이었다. 전 세계로 가수를 수출하기로 유명한 필리핀도 생활환경 구석구석에 '라이브바'가 있어서 그 많은 가수를 배출할 수 있었다. 지역 예술도 마찬가지 아닐까? 부흥을 기대한다면, 수십, 수백억 원을 들인 문화시설 짓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앞서 예술인들이 맘 편하게 부대끼며 소통할 수 있는 아지트를 많이 키워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마산 예술의 정점은 언제였을까? 이 대표는 문화예술도 경제와 같은 곡선을 그었다고 평가했다.

이상용 극단마산 대표./이효진 스토리텔러 lepetitprincejin@gmail.com

"마산 문화예술도 1970년대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이 들어서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지면서 그 정점을 찍었습니다. 당시 마산에 다방 숫자가 한때 580여 개에 이를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전성기를 상징하는 곳이었다면, 바로 조남륭 형의 '음악의집'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경제여건이 안 좋아지면서 문화예술계도 침체하게 되지요."

1970년대 정점 찍고 침체 접어든 예향

예향 마산의 전통이 경제적인 여건과 함께 사그라졌다는 얘기를 들으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 기라성 같은 예술인을 보유하고도 왜 그 맥을 잇지 못했을까?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생계가 어려웠던 게 가장 큰 이유죠. 옛날 어르신들은 주로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또 그보다 조금 후배들은 음악다방 DJ를 해도 꽤 벌이가 됐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자리는 한정돼 있고, 음악다방 같은 인프라도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예술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지게 된 것이죠. 시립예술단이 있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특정 장르에 제한돼 있어서 지역 예술을 일으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죠. 제자를 키우기도 어려웠습니다. 재능 있는 아이들은 마산에 있으려고 하지를 않았고요, 지역에 예술대학을 갖춘 종합대학이라 해봐야 경남대밖에는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상용 극단마산 대표./이효진 스토리텔러 lepetitprincejin@gmail.com

이 대표는 마산 예술의 추락을 가속화시킨 또 하나의 변수를 언급했다. 바로 마산, 창원, 진해의 3개시 통합이었다.

"마산이 창원으로 통합되면서 쇠락의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이젠 더는 마산이란 브랜드를 쓸 수 없게 됐습니다. 마산이란 브랜드 자체가 역사 아닙니까? 타지역에 가면 '마산'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알아줬습니다. 예향 마산이란 브랜드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앞에다 '창원'을 붙여보십시오. 아무도 안 알아줍니다. 그 전통과 역사를 누가 인정해주나요?"

마산의 예술이 가장 융성하던 시절에 젊은 예술인으로 혼을 불태웠지만, 지금은 쇠락해가는 마산예술의 현실을 지켜봐야 하는 심정은 어떨까?

이상용 극단마산 대표./이효진 스토리텔러 lepetitprincejin@gmail.com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지요. 선배님들 뵙기도 송구하고요. 요 몇 년 사이에 마산예술의 2세대라 할 수 있는 분이 많이 돌아가셨습니다. 무용가 이필이 선생, 사진가 남기섭, 강신율 선생(강 선생은 외교구락부시절 인근에 '조광'이란 사진관을 운영했다), 미술계엔 현재호 변상봉, 남정현, 심재섭 선생, 문학에는 이선관 시인과 신상철 선생 등 모두가 예향 마산을 상징하던 분들인데…."

그렇다면, 마산 예술을 다시 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상용 극단마산 대표./이효진 스토리텔러 lepetitprincejin@gmail.com

"자치단체장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실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문화예술회관부터 그렇죠. 무려 50~60년을 끌다가 2008년에야 '3.15아트센터'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지 않았습니까? 군 단위 자치단체에도 문화예술회관이 있었는데, 예향 마산이란 곳에 그 정도의 인프라가 없었다니 말이 안 됐죠."

이 대표는 마산의 문화상징이었던 창동에 대한 아쉬움도 진하게 배어 있었다. 창동에 문화 랜드마크를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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