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이서후의 컬러풀 아프리카 9

고도 100m. 갑자기 눈이 부시다. 지평선까지 구름 한 점 없이 펼쳐진 삼각주. 거미줄 같은 물길마다 온통 반짝이는 햇살. 하늘빛을 그대로 담은 푸른 물빛. 물줄기는 갈라지고 다시 만나고 다시 갈라져 수천 갈래 길을 만든다. 더없이, 완벽하다, 고 생각한다. 두근두근하는 이 기분. 오, 오카방고 델타.

스무 살 청년 국가

오전 6시 30분 트럭이 출발한다. 안녕, 에토샤 국립공원. 얼룩말 무리가 사바나의 아침 햇살을 조용히 받고 있다. 문득 커다란 새가 날아오른다. 저 묵직하고 듬직한 날갯짓. 나도 저렇게 묵직하고 듬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빈트후크(Windhoek)로 향한다. 나미비아의 수도다. 나미비아는 19세기 후반 독일의 점령 아래 있다가 1990년 독립하기까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통치를 받았다. 갓 20살을 넘긴 청년 국가의 수도는 작고 깔끔하다. 스와콥문드처럼 옛날 독일풍 건물도 많다. 빈트후크라는 상표의 맥주가 유명한데, 독일 기술을 이어받아선지 이거, 맛이 괜찮다.

빈트후크 시내./이서후 기자

빈트후크 근방 캠프장에 짐을 푼 우리는 잠시 쉰 다음 시내로 저녁을 먹으러 간다. 깔끔한 도로, 차량 불빛에 비쳐 선명한 교통 표지판에서 도시 지역이란 걸 실감한다. 우리가 예약한 식당 이름은 비어가르텐(biergarten), 맥주 정원(?)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 같은 이름의 독일 프랜차이즈 식당이 있다던데 그 분점일지도 모르겠다.

커다란 네온 간판을 지나 실내로 들어서니 정글을 연상케 하는 실내장식이 인상적이다. 각자 주문을 한다. 뭐 특별한 음식은 없다. 아니 모두 특별한 음식인가. 메뉴는 대부분 스테이크인데 각자 먹고 싶은 동물만 정하면 된다. 스프링복, 타조, 얼룩말, 악어 등 우리가 에토샤 국립공원에서 본 대부분이 메뉴에 올랐다. 우리가 앉은 식탁 주변 벽에는 사냥 도구와 동물의 머리뼈가 걸려 있다. 종업원들이 나한테 자꾸 눈길을 준다. 왜요? 그저 동양인을 보는 게 신기하단다.

다음 날 오전 8시 캠프장을 출발. 간밤에는 바람이 제법 불었다. 바람 탓인가 새벽에 잠이 깼다. 오줌을 누며 올려본 하늘에는 은하수가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빈트후크 시내에 도착해 간단하게 시내 구경을 한다. 독일어로 된 거리 이름, 아기자기한 건물 색깔. 여기저기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중국 건설회사가 아프리카 건설 사업에 공격적으로 들고 있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저기 공사장에 한글이! 오! 한국 회사가 짓는 건물이다. 뜬금없이 반갑다.

빈트후크 시내 퍼레이드./이서후 기자

시내 구경은 30분 만에 끝난다.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기엔 너무나 작은 곳. 뭐 수도가 꼭 클 필요 있나. 워싱턴이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도 아니잖아. 어쩌면 서울이 과도하게 큰 거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서점을 찾았다. 며칠 전 에토샤 국립공원 근처 작은 도시에서 괜찮은 책을 봐뒀다. 어차피 빈트후크에 있는 큰 서점에 가면 다른 책도 많을 것이고, 비교해보고 더 좋은 걸 사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겨우 찾은 서점, 그런데, 너무 초라하다! 초라해서 불안하다. 아, 역시. 이건 뭐 동네서점보다 못하다. 찾던 책이고 뭐고 그 비슷한 책도 없다! 여기 말고 다른 서점도 있나요? 아뇨, 여기가 빈트후크에서 유일한 서점입니다. 젠장! 그래서 얻은 교훈. 여행지에서 사고 싶은 물건을 보거든 그 자리에서 바로 사라. 다음 기회는 없다!

빈트후크에서 새로 3명이 합류한다. 19살 미국 여자애. 아누(Anu)란 이름이 독특하다 생각했는데, 할아버지가 인디언이란다. 외모는 거의 백인인데 눈매가 동양적이다. 그리고 아누의 단짝 친구인 20살 영국 여자애와 36살 영국 직장 여성(그 유명한 휴고 보스에서 일한다고)이다.

보츠와나 국경을 넘으며

우리는 지금 나미비아 국경으로 향한다. 오늘 안으로 국경을 넘어 보츠와나로 들어갈 것이다. 한참을 달리고 있으니 어느새 기찻길이 따라온다. 아마도 빈트후크에서 출발해 남아공으로 가는 선로일 것이다. 그동안 몇 번이나 기찻길을 마주쳤는데 기차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기차가 다니기는 하는 걸까.

도로가 큰 나무 아래서 점심을 먹는다. 그러고 보니 아프리카 도롯가에 드문드문 큰 나무가 있다. 그리고 그 자리마다 불 피울 곳을 설치했다. 자동차 여행자들을 위한 곳인 것 같다. 거대한 나무, 그늘에 놓인 시멘트 탁자와 의자. 썩 쾌적하진 않지만, 때론 그 자체로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든다.

./이서후 기자

오후 4시 10분 보츠와나 국경을 넘는다. 보츠와나에 대해서는 왠지 인상이 좋은데 아마 다음 글을 읽어서일 것이다.

“보츠와나는 1966년 독립 당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 그러나 독립하고 얼마 안 되어 탐광자들이 보츠와나 사막 아래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했다. 역대 잠비아 정부들과 달리 보츠와나 정부는 이런 횡재를 낭비하지 않았다. 다이아몬드로 벌어들인 달러는 사회 기반시설과 교육, 보건을 위해 투입되었다. 각료들은 저택이나 헬기를 챙기지 않았고, 대통령조차도 직접 장을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츠와나는 아직도 끔찍한 에이즈 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이제는 필요한 사람에게 약물치료를 제공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정부가 되었다.” (아프리카 무지개와 뱀파이어의 땅, 로버트 게스트, 지식의 날개, 2004)

그래서 보츠와나 국경을 넘으면서 감동적인 기분조차 들었다. 풍경은 사실 달라진 게 거의 없다. 그나마 하나를 꼬집는다면, 도로를 따라 설치된 울타리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소나 당나귀 같은 동물들이 도로 한가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보츠와나 도로에서 스키드마크(타이어 자국)를 본다면 십중팔구는 동물 탓이다.

오늘 묵을 캠프장 도착. 음, 샤워 시설이 맘에 든다. 나무와 풀로 얽기 설기 만들었는데 꽤 운치가 있다. 짐을 풀고 급히 저녁을 먹는다. 오늘 저녁에는 쌀로 만든 요리가 있다. 푸석한 모래 같은 밥이다. 밥을 먹으니 기쁘지? 하고 케이티가 묻는다. 뭐, 기쁜 척이라도 해줘야 할 표정이다. 오, 아주 좋아! (됐지?)

저녁은 먹고서 일행은 부시먼의 전통춤을 보려 한곳에 모였다. 우리 말고도 캠프장에 있던 다른 여행객도 함께 둘러앉는다. 대부분 늙고 뚱뚱한 중년의 백인들이다. 이건 뭐 분위기로 봐서는 서커스 구경하러 온 것 같다. 하긴 뭐 다를 것도 없다. 곧 덩치가 작은 부시먼 6명이 나타난다. 4명은 여성이고 2명은 남성이다. 여성들은 나이가 좀 들어 보이고 남성은 둘 다 젊다. 거의 속옷뿐인 전통의상을 입고 있다. 춥겠다.

부시먼 댄스

부시먼은 모닥불을 피우고 그 주위에 둘러앉는다. 부시먼 남성 한 명이 사람들 앞에 선다. ‘찍까 끋스 그치 니치 나마 차이곤, 까래이징 깜색아~.’ 뭔 소리야? 가이드가 통역을 해 준다. 그러니까 이 친구는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이 춤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부시먼 여성들이 손뼉으로 장단을 맞추면서 같은 음조의 노래를 반복한다. 남성들은 천천히 불가를 돈다. 장딴지에는 방울이 달려서 착착 땅을 차는 동작을 할 때마다 소리를 낸다. 동작은 점차 격렬해진다. 방울 소리가 거칠다.

부시먼 댄스./이서후 기자

이 춤은 밥을 먹고 나서 감사의 표시로 추는 겁니다. 이 춤은 스프링복을 사냥하고 나서 추는 춤입니다. 이 춤은 와일드비스트를 잡고 나서 추는 춤입니다. 설명은 다른 데 어쩐지 춤은 똑같은 것 같다. 가이드의 설명은 계속 된다. 이 춤은 어떤 사람이 와서 자신의 아내를 취하려고 할 때 질투가 나서 추는 춤입니다. (이런 일로도 춤을 춰?) 이 춤은 누가 아플 때 나으라고 추는 춤입니다. 춤은 단순하지만, 왠지 모를 강한 힘이 느껴진다.

공연이 끝나고 그 부시먼 청년들의 이름을 물었다, 두사(21)와 가온(20)이라고 했다. 둘 다 학교는 다닌 적이 없다. 부시먼 대부분이 도시에서 사는데 이들은 조그만 마을을 이뤄 전통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그 전통을 지킨다는 게 그러니까 이렇게 관광객 앞에서 전통춤을 추고 돈을 얻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잘못됐다거나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입맛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다음날. 아프리카에 와서 가장 추운 밤이었다. 밤새 오들오들 떨다 결국 일어나고 만다. 새벽 5시. 샤워를 하러 가는데 캠프장 한구석에서 연기가 난다. 가까이 가서 보니 흑인 일꾼이 보일러에 장작불을 때고 있다. 오, 그래서 우리가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있었군. 이름이 콩 포트(36)라는 이 친구, 새벽 5시부터 불을 때기 시작한단다. 이 새벽, 이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터이지만, 우리는 친구가 되기로 한다. 악수를 하는데 손이 참 따뜻하다.

해가 뜨니 바로 더위가 시작된다. 트럭이 출발하고 다시 도로 위, 어제처럼 길을 막고 선 당나귀들을 피하느라 속도를 내지 못한다. 우리는 당황하고 당나귀들은 태연하다. 그 모습이 차라리 귀엽다. 한참을 가던 트럭이 다시 멈춘다. 당나귀인가? 아니다. 타조다! 타조 가족이 도로를 가로지른다. 그리고는 다시 당나귀가, 소가, 염소가 터무니없이 나타나는 보츠와나의 도로. 이거 꽤 정겹지 않은가.

눈 시린 강가에서

오전 11시 30분. 저 멀리 풍경이 반짝거린다 싶더니 강이 나타난다. 엄청나게 물이 많은 강이다. 하늘빛을 반사해 눈부시게 푸른 물빛. 물 위 반짝이는 햇살, 강을 둘러싼 진한 녹색 식물들. 마음이 확 밝아지는 장면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 물빛이 연갈색이다! 오는 동안 주변나무에서 나뭇잎들이 강물에 떨어져서 그렇단다. 그러니까 마치 찻잎에다 더운물을 부었을 때 우러나오는 그런 물 빛깔이다.

눈 시린 강물./이서후 기자

아득한 눈빛으로 강가를 서성인다. 그러다가 가시나무에 바지가 엉켜 들었다. 무지하게 아프다. 아픈데, 정강이 아래가 온통 가시에 얽혀 있어 쉽게 발을 빼지 못한다. 얼마 전에도 커다란 가시가 신발 밑창에 푹 박혀 섬뜩했었다. 기억할 것, 겨울 아프리카에서는 가시들을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건기의 메마른 땅에서 식물이 동물의 먹이가 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이렇게 독해야 한다. 생존은 그 자체로 눈물겨운 일이다.

뜬금없이 나타난 이 묵직하고 조용한 강물은 오카방고 델타(Okavango Delta)로부터 이어진 것이란다. 오카방고 강이 만든 세계에서 가장 큰 내륙 삼각주. 놀랍게도 삼각주를 지난 물은 바다로 가기 전에 땅속으로 모두 사라진다. 오카방고 델타, 그 거대한 장관을 향해 지금 우리가 가고 있다.

하늘에서 본 오카방고 델타./이서후 기자
오카방고 델타./이서후 기자

오늘 묵을 마운(Maun)이란 소도시에 도착. 이곳이 오카방고 델타로 들어가는 관문이란다. 캠프장에 도착하자 곧 경비행기를 타러 간다. 델타 지역에 들어가기 전에 하늘에서 한 번 봐 두려는 거다.

경비행기를 타고

마운 공항. 활주로에 가득한 경비행기. 조종사를 포함해 7명이 탄 비행기가 서서히 이륙한다. 비행기 위와 같은 크기로 따라오던 비행기의 그림자가 점점 작아진다. 오밀조밀 모인 집과 나무들이 장난감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 비행기는 기수를 돌려 델타로 향한다. 고도는 겨우 100미터 남짓. 우와 시각을 압도하는 위대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저 아래 줄지어 이동하는 코끼리들이 생쥐처럼 보인다. 물은 그리 깊지 않은 것 같다. 동물이 지나면서 생긴 물길은 실핏줄처럼 온 삼각주에 얽혀 있다. 코끼리 새끼 한 마리가 철벅 철벅 물을 차며 뛰어간다. 갈색과 녹색, 노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삼각주의 물빛들은 언젠가 TV에서 본 은하계와 닮았다. 도대체 아프리카는 얼마나 더 이런 풍경을 숨긴 걸까.

경비행기에서 본 풍경./이서후 기자

경비행기에서 본 풍경./이서후 기자

비행기가 공항으로 기수를 돌리자 풍경들의 그림자 길이가 한층 길어져 있다. 부드러운 착륙. 조종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공항을 빠져나온다. 저녁을 먹고 가이드 샤드웰이 사람들을 모은다. 내일부터 이틀 동안 오카방고 델타 깊숙이 들어가 지내게 된다. 그곳은 완전한 자연, 전기도 샤워도 화장실도 없다. 물을 충분히 준비할 것, 긴 옷을 준비할 것, 모기를 조심할 것 등 주의사항이 많다.

잠자리에 들기 전 하늘을 쳐다본다. 초승달이 떴다. 나머지 부분이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보인다. 달은 초승달만큼만 말한다. 하지만, 달의 진심은 보름달일 것이다. 어디서건 초승달에서도 보름달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오늘, 초승달이 유난히 밝다. 굿나잇.

테두리가 보이는 달./이서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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