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10년째 마산역 앞에서 무료급식 봉사중인 박덕조 이웃사랑나눔회 회장

이웃사랑나눔회는 지난 4월 9일 저녁 마산회원구 북성초등학교 강당에서 1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이웃사랑나눔회는 적지 않은 규모의 민간봉사단체지만 이번이 첫 자체행사였다. 지난 10년간 총회니 단합대회니 이런 것 없이 오로지 봉사활동만 했다는 말이다. 특히 주말 마산역 앞 무료급식 활동은 지역에서도 유명하다. 그래서 이웃사랑나눔회를 이끄는 박덕조 회장(61)을 만나봤다.

자갈치 시장서 밑바닥 생활 전전하다 요리를 배우다

박덕조 회장은 마산합포구 남성동에서 형제식육유통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요식업계에서 몸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95년에 정부에서 발행한 요리사 자격증 보여줬다. 일단 젊은 시절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했다.

박덕조 이웃사랑나눔회 회장의 자격증./임종금 기자

“65년에 당시 저는 14살입니다. 고성 출신인데,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그게 여의치 않았어요.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장롱 안에 부모님이 숨겨둔 돈 1000원을 들고 그대로 부산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어요. 날짜도 기억해요. 6월 25일이에요 그 날이.”

14살 소년이 달랑 1000원을 들고 부산으로 갔다. 1965년 자료를 들춰보니 당시 쌀 20킬로그램 한 가마니 가격이 1500원이다. 박덕조 회장이 들고 간 1000원은 많이 쳐봐야 지금 시세로 돈 10만 원 남짓한 금액이다. 고생길이 훤히 보였다.

“나이가 어리니까 갈 데가 없죠. 잘 데가 없으니까 자갈치 시장 인근에, 노동자들이나 노숙인들이 주는 밥도 얻어먹고 돈을 약간 주고 잠을 자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 급식소와 인연을 맺었죠. 그 땐 제가 얻어먹는 신세였죠. 그러면서 전전하다가 당시 부산 충무동에 빵집이 많았어요. 그래서 빵집에 취직했는데, 당시 가게 이름이 영도빵집입니다. 거기서 밤 12시 까지 일하고,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 부산갈비라는 가게로 옮겼는데, 부산갈비는 당시 20명 정도 종업원이 일하는 큰 식당이었고 하동 사람이 사장을 했는데 저한테 잘해줬어요. 거기서 요리기술도 배우고 그랬죠.”

박덕조 이웃사랑나눔회 회장./임종금 기자

부산갈비 식당에서 한식을 배운 그는 광주로 ‘스카웃’이 되었다. 그 때 3년 계약으로 갔는데, 나름 히트를 쳤다. 당시 1971년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였다. 그가 일하던 가게는 대통령 후보들도 밥을 먹으러 오는 곳이 됐다고 한다. 계약을 연장해 4년간 광주에 머문 뒤 그리고 나서 다시 마산으로 스카웃이 됐고 이후 요식업에 있으면서 전국의 음식을 다 맛 봤다고 한다. 문득 어느 지역 음식이 가장 맛이 좋았는지 궁금해졌다.

“그건 음식 만드는 사람 차이죠. 요즘 남도음식이 좋다고 전라도 음식 얘기하는데, 전라도는 곡창지대고 워낙 음식 재료가 많고 싸니까 음식이 좋은 거죠. 반대로 경남 이쪽은 전부 공업지대니까 음식 재료 자체가 부족하니까 결국 이윤 계산을 해 보면 재료를 적게 쓸 수밖에 없는 거요. 그 차이죠.”

그렇다면 요리사로 실력도 갖추고, 자기 가게도 내고 하면 어느 정도 돈을 벌지 않았을까?

“90년대 중반까지는 돈을 거의 못 벌었어요. 내내 달세 방을 전전하고. 한 번은 마산제일여고 있는 산 중턱에 나무로 된 집에서도 살았어요. 거기 있으니까 이만한 지네가 기어 다니니까 밤에 잠을 못 자요.”

박 회장은 요리 실력도 있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데 40대가 넘도록 가난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고 했다. 수완이 부족했나?

“사업을 하다가 몇 번 까먹기도 했고…. 또 솔직히 사업만 쳐다보고 살면 먹고 사는 건 문제 없어요. 제가 사회봉사 활동한 게 32년 세월인데, 이것저것 주고 하는 게 습관처럼 되고, 사회단체 활동도 하면서 돈에 욕심을 안 부리다 보니 그리 됐네요.”

박덕조 이웃사랑나눔회 회장./임종금 기자

말은 쉽게 하지만, 어쨌든 가족도 부양해야 하는데 먹고 살 길이 막막하면 절망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글쎄요. 저는 어차피 밑바닥에서 시작했으니, 떨어져봐야 본전 아니냐. 그래서 돈에 대한 미련이 별로 없어요. 아무리 망해도 작은 가게부터 다시 시작하면 또 어찌저찌 살아갈 자신도 있고. 그리고 돈이나 집이나 죽을 때 업어가는 것도 아니고.”

먹고 살려다 보니 요리를 배웠고, 베풀다 보니 생활이 어려웠다. 지나간 일에 만약은 별 의미가 없지만, 만약 공부를 뜻대로 했다면 뭘 하고 싶었는지 궁금해졌다.

“저는 사실 경찰이나, 검사가 하고 싶었어요. 억울한 사람들 도와주는. 시골에 보면 나무 몇 개 훔쳤다고 힘 있는 사람들이 파출소 끌고 가요. 별 거 아닌데 욕을 보이고 겁을 주려고 하는 거죠. 감자 한 톨 파먹는 건 예삿일인데, 그걸 물어내라고 해서 쌀 빼앗아 가고. 조금이라도 힘이 있으면 얼마나 텃세를 부리던지. 그런 걸 좀 잡고 싶었죠.”

행정지원 없이 매년 100회 이상 9천만 원 들어 무료급식

박덕조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는 대강 알 것 같았다. 그럼 10년 동안 날이 궂으나 좋으나 주말이면 어김없이 마산역 앞에 나와있는 무료급식소로 대화를 옮겨봤다.

“2002년에 당시에는 마산역 일대에서 급식소 활동을 하는 데가 없었어요. 제가 알기로 역전파출소 앞에서 종교단체가 시에서 지원 받아 하는 게 전부였어요. 2002년이 로타리클럽 100주년이 되는 햅니다. 제가 당시 회장을 하고 있었는데,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급식소 운영을 한 겁니다. 그러다 나중에 급식소 운영을 독립시켜서 이웃사랑나눔회를 결성했죠.”

“당시 상황이 어땠습니까?”

“당시 영양실조 걸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병원에 데려가서 영양제 주사도 놔주고 했죠. 또 어르신 중에 돈이 있어도 음식을 해 먹지를 못해서 굶는 분이 많아요. 지금은 이 분들의 형편이 좀 나아졌어요. 어르신들에게 나라에서 돈도 좀 나오고.”

정용안 사무국장, 박덕조 회장, 하용오 부회장. /임종금 기자

무료급식을 1년에 몇 번이나 하는지, 몇 분이나 오셔서 급식을 드시는지, 예산은 얼마나 드는지 궁금했다. 옆에 있던 정용안 이웃사랑나눔회 사무국장이 답했다.

“매주 토‧일요일 하고, 작년에는 103회 급식을 했습니다. 보통 한 번에 300분 정도 오셔서 급식을 드십니다. 따로 예산을 잡아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연간 3만 명이 식사를 하니까 한 끼당 3000원씩 예산을 치면 9천만 원 정도 예산이 나옵니다.”

“그럼 그 돈들은 어디서 나오나요? 관공서 지원은 없나요?”

“박덕조 회장님 내외가 어지간한 음식은 다 만들어 오십니다. 우리끼리 하는 말로 박 회장님은 급식 재료비로만 7~8억은 썼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돈이 필요하면 회원들이 십시일반 하거나 로타리클럽 같은 이웃단체들이 조금 도와주면 큰 무리는 없습니다. 관공서 지원을 받으면 규제가 심해져서 편하게 활동을 못하고, 또 그 돈에 의존이 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안 받고 있습니다.”

“회장님, 비가 오거나 심하게 추운 날은 어떻게 합니까? 그러 날은 쉬나요?”

“그래도 나가야죠. 왜냐하면 수백 명이 우릴 기다리고 있는데 안 갈 수가 없지요. 비가 오면 하다못해 라면이라도 끓여서 나눠드리고 합니다.”

급식 봉사 활동 하시는 분들은 어떤 분들인지 궁금했다. 또 봉사자 중에 인상 깊은 분이 있는 지도 물어봤다.

“고정적으로 나오시는 분들이 대개 주부들입니다. 요즘엔 학교 봉사활동 점수 때문에 학생들도 많이 옵니다. 봉사자들 중에 홍수연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50세 주부신데, 이 분이 급식활동의 모든 시스템을 관리하고 일일이 챙기고 있어요. 이 분이 대단한 게 동네슈퍼를 하는데 토‧일요일은 슈퍼 문을 닫아놓고 봉사하러 와요.”

급식 활동을 하면서 안타까웠던 분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지금은 돌아가신 분인데, 이 분은 겉으로는 정말 멀쩡하신 분입니다. 옷은 멀쩡하지만, 속에는 돈이 하나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자존심 때문에)밥을 달라고 차마 말씀을 못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는 참 안타깝죠. 그런 분들이 제법 있어요.”

박덕조 이웃사랑나눔회 회장./임종금 기자

그의 명함을 들여다보니 이웃사랑나눔회 말고도 온갖 봉사단체 직함이 있었다. 특히 태풍매미 장학추모사업회 공동대표라는 직함이 눈에 띄었다.

“2003년 태풍 매미로 저도 어시장에 있던 가게 날려버리고,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죠. 그래서 학생들 장학금이라도 주자고 생긴 단체인데, 나중에 정치인들이 빠지고 나니까 돈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또 이래저래 방법을 찾다 보니까 미국 로타리클럽 재단에 돈도 요청하니까 방법이 나오더라구요. 말이 나온 김에 말씀 드리는 건데, 많은 단체들이 정치인에 의존하거나 혹은 정치인들의 희생양이 됩니다.”

“노숙인·어르신들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만들고 싶어”

일반적으로 노숙인을 경멸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돈 아깝게 뭣 하러 저런 사람들 주느냐. 혹은 겉보기에는 없는 것 같지만, 돈 있는 사람도 많으니 도와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돈이 있는 사람도 있겠죠. 문제는 100명 중에 한 명이라도 정말 굶주리는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 한 분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급식활동은 계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국민은 다 세금을 냅니다. 물건 하나 사도 부가세를 내니까요. 따라서 밥을 먹을 자격이 다 있고요. 또 중요한 것은 지금 저라도 상황이 안 좋아지면 언제든지 노숙인이 될 수도 있죠.”

“그래도 지금 우리 사회가 먹고 사는 게 많이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빌딩도 올라가고 겉으로는 좋아졌는데, 저는 그 빌딩 하나 세우기 위해서, 그 빌딩 주인 한 두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의 고통이 따랐을까 요즘 생각해 봅니다. 또 우리 사회 어르신들은 평생 국가의 희생양 밖에 되지 못한 분들입니다. 평생 고생해서 살았는데, 결국 행복하지 못한 노년을 맞고 있죠. 또한, 아이들도 보면 부모들이 내 자식만은 앞서야 한다. 니 옆에 있는 사람은 죽여야 한다고 가르쳐서 그런지 철저한 이기주의고 배려라는 것을 모르고 자랍니다. 이런 세상이 좋은 건지…. 그리고 가진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돈도 선뜻 내놓지 못하죠. 반면 가난했던 사람들이나 배고픈 심정을 이해하는 사람들끼리 한푼 두푼 모아서 운영하죠.”

그의 답답함이 그대로 밀려왔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바꿔나가야 할까? 어르신들이나 노숙인들을 어떻게 돕는 것이 진정으로 돕는 것일까?

“아이들에게는 남에게 주는 것을 가르쳐야 하죠.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교육은 부모 품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노숙인들이나 어르신들은 외로움이 가장 큰 문제에요.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분들이 함께 손잡고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싶어요.”

슬슬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마침 이웃사랑나눔회 하용오 부회장이 사무실로 들어선다. 그에게 박덕조 회장에 대해 한 마디로 정리해 달라고 했다.

“자기 묵을 땟거리도 없으면서 이 짓 한다고. 자기 집에 일은 안 봐요. 남이 우선이지. 항상 자기 챙기는 건 뒷전이고. 그래서 박 회장의 희생이 너무 컸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