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안동 우함양' 영남 사림 본거지…정여창·문태서·하준수 등 위인들의 고장

'경남의 재발견' 첫걸음을 함양에서 뗀다. 그리고 그 시작은 함양군 백전면 오천리 '매치마을'이다. 매치마을은 경상남도 함양군과 전라북도 남원시에 걸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입구를 지나는 도로에는 경상남도와 전라북도를 알리는 행정구역 표지판이 마주 보고 있다. 입구에서 마을 안으로 이어지는 길은 두 행정구역을 나누는 경계선이 된다. 경남에 집을 두고 전북에서 모를 심거나, 전북에 집을 두고 경남에서 밭을 매는 모습은 이 마을에서 흔한 풍경이다.

마을 입구 바로 맞은편에는 이 같은 특색을 고스란히 담은 집이 한 채 있었다. 지금은 주변 밭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터만 남은 이곳은 안방이 남원, 부엌은 함양이었다. 1970년대 밀주 단속이 심했던 시절, 담당 공무원이 남원에서 오느냐 함양에서 오느냐에 따라 술독은 부엌과 안방을 오가며 단속을 피하곤 했다.

   
 

산이 가르고 강이 가르며 사람 마음이 먼저 벽을 쌓기도 하는 영·호남은 함양에서는 두루 엮인다. 신라·백제를 고장 이름 앞에 번갈아 붙이던 역사가 그렇고, 지리산·덕유산이 조화롭게 감싸는 땅 생김새가 그렇다. 왕래가 잦은 덕에 영·호남 사람이 한집안을 이루는 일도 낯설지 않다. 함양 사람들은 경남 서북쪽 척박한 고산분지 음식에 밴 맛깔스러움이 전라도 손맛 덕이라고 여긴다. 함양을 안다고 하는 이들은 이곳에 남은 옛 불상에서 신라가 남긴 유려한 선과 백제를 닮은 소박한 미소를 찾아낸다.

영남 사림 본거지로 불리는 '선비의 고장' 함양은 꼿꼿한 기개를 여전히 높게 친다. 더불어 험한 산세를 닮은 드센 기질 역시 쉽게 접할 수 있는 모습이다. 이를 근거로 함양 사람들 성정을 짐작하고자 한다면 답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 같은 짐작은 '함양 사람은 밖에서 못 살아도 바깥사람은 함양에서 잘산다'는 이곳 사람들 말에 담긴 넉넉한 인심을 외면한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호남 말씨가 분명히 갈리되 삶은 경계가 없는 매치마을. 이곳은 함양에서 엿보이는 겉과 속 한 자락을 소박하게 은유한다.

매치마을.

-명산을 품은 대가

북 덕유산·남 지리산,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을 대표하는 명산이 품은 고장 함양. 이곳 사람들은 국립공원 두 곳을 끼고 사는 복이 상당한 자랑거리다.

북쪽 남덕유산(1507m)·금원산(1353m)·기백산(1331m), 남쪽 지리산(1915m)·제석봉(1806m)·촛대봉(1704m)·칠선봉(1576m), 서쪽 백운산(1279m)·삼봉산(1187m)·깃대봉(1015m) 등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곳곳에서 함양을 내려다 본다. 지질은 편마암이 널리 분포하며, 곳곳에 화강암이 드러나 그 산세가 웅장하다. 더불어 이런 산세를 낀 칠선·한신·화림동·용추 계곡은 찾는 이들을 흐뭇하게 한다.

용추폭포.

하지만, 이처럼 풍요로운 자연환경이 넉넉한 삶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명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는 산을 받아들인 만큼 농사지을 땅을 양보해야 했다. 아직도 10가구 가운데 4가구가 농사를 짓는 함양군에서 농토는 전체 면적의 14% 정도에 그친다. 이곳이 늘 터전이었던 어르신들에게 농사지을 땅이 없어 척박했다는 말을 듣기는 어렵지 않다.

함양은 총 경지면적 101.45㎢ 가운데 논이 67.46㎢, 밭이 34.99㎢로 논농사가 중심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감자 등 식량작물, 배추·무·고추·마늘·양파 등 채소류이며 인삼·잎담배 등 특용작물 재배도 활발하다.

그러나 애초부터 작물 생산량으로 농가 살림을 살찌우기는 무리였다. 지금도 함양에서 나는 농산물은 그 품질은 우수하나 대량 생산을 통한 상품 경쟁은 다른 지역에 밀린다. 함양 농업이 지닌 특성은 '고급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정리되는데, 이는 풍요로운 자연환경이 낳은 우수한 작물을 넉넉하게 생산하지는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곳 사람들은 양파 한 알, 인삼 한 뿌리, 쌀 한 되를 놓고 질을 따지자면 절대 다른 지역에 지지 않는다. 이는 얄팍한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맑은 물, 땅속 풍부한 양분을 머금으며 고산지대에서 천천히 야무지게 여무는 작물 상당수는 대도시 대형유통점에서 더 비싸게 팔린다.

함양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친 산은 넉넉한 농토를 내주지는 못했지만, 척박한 삶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철마다 나는 약초와 나물은 이곳 사람들 살림에 적지 않게 보탬이 됐다. 또 일찍부터 넓은 산지를 이용한 농가 부업으로 축산이 장려돼 한우와 돼지를 많이 키웠다. 특히 함양 흑돼지 삼겹살은 여기 사람들이 바깥사람들에게 함양 맛으로 자신 있게 권하곤 한다. 그러면서 대개 그 맛이 맑은 공기, 철분이 많은 물, 게르마늄 성분이 풍부한 땅에서 나는 먹이 등에서 비롯된다고 풀이한다. 이는 자연환경이 만든 맛 자랑이기도 하고 맛을 만들어낸 자연환경 자랑이기도 할 것이다.

함양을 둘러싼 늠름한 산세는 이곳 사람들이 자랑하는 '선비정신'과도 닿아 있다. 뜻은 높게 품되 권세를 탐하지 않겠다는 기개를 눈앞에 펼친다면 지리산·덕유산 산줄기와 닮았을 것이다. 또 그 산줄기가 뿜어내는 기상을 한 사람에게 오롯이 담는다면 바로 선비정신이 될 듯하다. 넉넉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척박한 삶을 외면하지도 않은 산은 그 자체가 함양이고 함양 사람이다. 이곳 사람들이 함양 이야기 가닥을 항상 지리산·덕유산에서 뽑는 것도 산으로 말미암은 섭섭함이 산에서 얻는 풍요로움에는 못 미쳐서일 것이다.

-'좌안동 우함양' 영남사림의 본거지

   
 

'좌안동 우함양'. 서울에서 봤을 때 왼쪽에 안동, 오른쪽에는 함양. 즉, 조선시대 경북 안동과 경남 함양에 빼어난 유학자가 많았다는 말은 이렇게 6글자로 정리된다. 함양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듣고 했음 직한 이 말에는 미묘한 어감이 섞여 있어 바깥사람이 듣기에 재밌다. 이 말에는 당연히 안동과 더불어 영남 사림 본거지임을 강조하는 함양 사람들 자부심이 깔렸다. 더불어 양반, 학자, 서원 등 조선 유학이 남긴 유산을 안동과 먼저 연결짓는 데 대한 섭섭함도 배어있다. 그렇다고 '좌안동 우함양'을 이곳 사람들이 안동 유명세에 기대고자 되풀이하는 말 정도로 여기는 것은 큰 오해다.

안동에 퇴계 이황(1501~1570)이 있다면 함양에는 일두 정여창(1450~1504)이 있다. 정여창·이황과 더불어 한훤당 김굉필(1454~1504)·정암 조광조(1482~1519)·회재 이언적(1491~1553)이 조선시대 유학을 크게 발전시킨 '동방오현(東方五賢)'이다.

함양군수를 지냈던 김종직(1431~1492)에게 글을 배운 정여창은 성종(1457~1494) 때 벼슬에 올라 세자에게 강론을 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다. 그러나 연산군(1476~1506) 때 무오사화에 엮여 스승 김종직과 더불어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돼 죽었다. 훗날 개암 강익(1523~1567)이 정여창을 기리고자 세운 서원이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있는 남계서원이다.

정여창 이야기를 잠시 미루더라도 함양이 '선비의 고장'을 수식어로 쓰는 데는 전혀 과장이 없다. 김종직·유호인(1445~1494)·강익·박지원(1737~1805) 등 조선시대 쟁쟁한 학자들이 함양에 뿌리를 두거나 관직을 지냈고, 이들이 남긴 자취가 고스란히 함양 문화를 상징하는 자산이다.

남계서원.
학사루(함양읍 운림리 소재).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선비 문화 원류를 조선시대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멀리 신라시대 최고 문장가 고운 최치원(857~925)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함양태수를 지낸 최치원이 남긴 흔적은 함양읍 군청 앞에 있는 '학사루'와 위천을 낀 숲 '상림'에서 찾는다. 학사루는 신라 때 세워진 누각으로 최치원이 그곳에 올라 시를 짓곤 했다고 전해진다. 상림은 최치원이 조성한 인공 숲이다. 해마다 범람해 고을에 큰 피해를 주는 위천을 다스리고자 둑을 쌓고 나무를 심은 게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전국 20여 개 숲 가운데 하나뿐인 낙엽 활엽수림이다. 함양은 그 땅을 둘러싼 명산과 계곡 그리고 문화유적 등을 묶어 '함양 8경'이라고 일컫는데, 상림을 '제1경'으로 맨 앞에 뒀다. 상림 자체가 지닌 매력도 충분하겠지만, 상림에 깃든 '애민사상'에 더 큰 의미를 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레방아 공원.

조선조 실학 대가인 박지원이 남긴 흔적도 빼놓을 수 없다. 안의현감을 지냈던 박지원은 이 시기에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함양은 1962년부터 가을이면 상림을 중심으로 열었던 '천령문화예술제'를 지난 2003년부터 '함양물레방아골축제'로 이름을 바꿔 물레방아 원조임을 내세우고 있다. 또 용추폭포로 가는 길목에 대형 물레방아를 설치한 '연암물레방아공원'을 조성해놓기도 했다. 아울러 8월이면 용추계곡과 안의면 일대에서 '함양연암문화제'를 열어 박지원이 남긴 자취를 기리고 있다.

고택은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 잘 보존돼 있다. 개평마을 사람들은 '우함양'은 '우개평'으로 고쳐 쓰는 게 맞다고 할 정도로 자부심이 강하다. 풍천노씨와 하동정씨가 터를 정한 개평마을에는 일두 정여창 고택을 비롯해 하동정씨 고가, 노참판댁 고가, 풍천노씨 대종가 등이 국가 또는 경남도 지정문화재로 돼 있다. 함양군은 해마다 겨울이면 개평마을 한옥문화원에서 '한옥문화체험' 행사를 운영하고 있다.선비 정신을 기개와 낭만으로 애써 나눈다면 그 흔적은 고택과 서원 그리고 정자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함양 사람들은 안동 세도가들이 남긴 고택과 견줘 상대적으로 단출하고 소박한 함양 선비 고택을 높게 친다. 함양 선비들이 권세와 재물에 초연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함양에는 100여 채에 이르는 정자와 누각이 있다. 그중 서하면 화림동계곡 일대에 있는 정자들을 최고로 친다. 여기 계곡과 정자는 '함양 8경' 가운데 '제4경'으로 꼽히는 곳이다.

옛날 과거를 보러 떠나는 영남 유학생들은 덕유산 육십령을 넘기 전에 이곳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고 한다. 함양군은 거연정·영귀정·동호정·경모정·람천정·농월정을 잇는 6.2㎞를 '선비문화탐방로'로 조성해 정자와 계곡이 어우러진 풍류를 접하게 하고 있다.

-선비정신에 가려질 수 없는 불교문화

함양읍에서 휴천면을 지나 마천면으로 방향을 정하면 '오도재'로 들어서게 된다. 가파른 능선을 굽이굽이 거슬러 올라가면 왔던 길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이 있는데, 운전하기에 고약하기 짝이 없던 길이 멀리 지리산을 배경으로 어여쁜 그림을 만들어낸다. 오도재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길이기도 하다.

다시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정상에 '지리산 제1문'이 의젓하게 버티고 있다. 함양이 지리산을 독차지한 것은 분명히 아닌데, '지리산 제1문'을 지나는 순간만은 지리산이 마치 함양 것인 양 느껴진다.

지리산 제1문.

오르막 못지않게 고약한 내리막을 조심스레 따라가면 '지리산 둘레길' 함양군 안내센터를 만난다. '지리산 둘레길'은 전남·전북·경남 3개 도, 구례·남원·하동·산청·함양 5개 시·군 300㎞를 잇는 도보 길이다.

인월~금계(19㎞)·금계~동강(11.1㎞·벽송사를 거치면 15㎞)·동강~수철(11.9㎞) 구간이 함양을 지난다. 이 구간은 농로·임도·숲길 등이 전 구간에 고루 걸쳐 있다.

벽송사.

마천면 추성리에 있는 벽송사는 1520년 벽송 지엄선사가 창건한 절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호국불교 위상을 드높인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도를 깨친 곳이다.

함양은 '선비의 고장'이라는 말이 서원·누각·고택이 아니라 빼어난 유학자 덕에 나온 것이라면, 함양 불교문화가 선비정신에 가려서는 안 되는 이유 역시 사찰이 아니라 선승이다. 서산·사명대사와 더불어 조선 선맥을 빛낸 벽계정심(碧溪正心)·벽송지엄(碧松智嚴)·부용영관(芙蓉靈觀)·환성지안(喚醒志安)·서룡상민(瑞龍祥玟) 등 선승이 벽송사에서 수도했다.

서암정사.

벽송사 암자인 서암정사는 함양 8경 가운데 6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암자 전체가 오밀조밀하게 꾸며져 있어 잘 가꾼 정원 같은 인상을 풍긴다. 암자 입구부터 자연석에 새긴 양각과 석굴 속 불상은 종교적 상징 이전에 예술 작품이 주는 설렘으로 보는 이를 들뜨게 한다.

이와 더불어 안국사·금대암(마천면 가흥리)·영원사(마천면 삼정리)·상연대(백전면 백운리)·보림사(함양읍 운림리)·용추사(안의면 상원리)·영각사(서상면 상남리) 등 함양 곳곳에 고루 자리 잡은 사찰 덕에 함양이 지닌 문화적 자산은 더욱 풍족해진다.

-근현대사 두 영걸 문태서와 하준수

신라 최치원을 시작으로 조선 영남 사림 유학자까지 이어지는 함양 인물은 근·현대사로 넘어오면서 뚝 끊긴다. 이곳 사람들도 근·현대사 속 함양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저어한다. 그래도 구한말 의병대장인 문태서(1880~1912)와 마지막 빨치산 하준수(1921~1955) 이름은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함양 인물로 꼽히는 두 영걸이 오늘날 남긴 흔적은 사뭇 다르다.

서상면 상남리에서 태어난 문태서는 을사늑약 이후인 1906년 의병을 일으켰다. 덕유산을 중심으로 경남·전북·충북·경북을 오가며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전투 때마다 큰 전공을 올린 그를 일본군도 두려워해 '덕유산 호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1912년 체포돼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훗날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정부는 1963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함양군은 서상면 상남리 부지 3만 3609㎡에 문태서 생가 복원 사업을 벌여 2010년 준공했다.

병곡면 도천마을에서 태어난 하준수는 일찍이 동경 유학을 떠난 인텔리였다. 그는 학도병 징집을 거부하고 지리산 칠선골에 들어가 '보광당'이라는 조직을 결성해 일제에 대항했다. 최초의 빨치산(partizan)이었던 셈이다.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했으나 미군정은 오히려 건준을 탄압하고 친일파를 파트너로 삼았다. 이에 하준수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 1947년 '7·27 인민대회'와 1948년 '2·7 구국투쟁', '5·10 천왕봉 무장봉기' 등을 주도했다. 한국전쟁 때도 태백산과 일월산 일대에서 '남도부(南到釜)'라는 이름으로 빨치산 투쟁을 벌였던 하준수는 1954년 대구에서 체포돼 1955년 처형됨으로써 마지막 빨치산이 됐다.

병곡면 도천마을에 있는 하준수 생가는 폐허가 된 채 형체만 남아있다. 최근 하준수에 대해서는 단순한 '빨치산'이 아니라 남과 북 양쪽에서 모두 버림받은 '비운의 혁명가'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지역 사학계에서 고민해야 할 과제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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