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란 단어는 이제 아무에게도 낯설지 않다. 도아(都雅)한 신사가 흥얼거리는 음률이자, 샤넬 향을 풍기는 숙녀가 즐기는 액세서리다. 미국산 스테이크와 고급와인이 곁들여지면 운치가 더한다. 애들 무대처럼 과도한 소란은 없지만, 적당한 볼륨과 긴장이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어떤 명사 앞에도 붙일 수 있으며, 그럴 경우 그 명사는 독특하게 채색된다.

몇 년 전 미국에서 재즈를 공부하고 귀국한 음악인이 한 소리다. "재즈를 제대로 알기 위해 오랜 시간 미국에서 공부했어요! 귀국 후 일거리를 찾다가 강남을 무대로 여흥을 즐기는 한 무리 남녀를 만났는데, 재즈를 원하더라구요!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재즈를 이야기했어요. 보수도 두둑해 참 좋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진정으로 원한 게 재즈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팝문화에 젖어있자니 없는 애들과 동류로 인식될까 두렵고, 클래식을 듣자니 지루한데다 잘 모르고, 암튼 폼 나는 뭔가를 찾다가 나를 만난 것이었어요. 이 사실을 깨닫곤 바로 그들과 이별했어요. 두둑한 보수가 아깝긴 했지만, 그런 친구들에게 내 음악을 팔 순 없다는 생각을 했지요!"

경남도민일보가 2010년 11월 5일 마산 3·15아트센터에서 기획·주최한 3색 재즈콘서트. 말로 밴드

슬픈 이야기지만 현실이다. 밑바닥 음악으로 출발한 재즈는 사실 한국에서 가장 출세했다. 돈 많은 잡것(?)들이 가장 애호하는 음악이 되었으니까!

재즈란 단어는 이제 아무에게도 낯설지 않다. 소음 같은 팝음악에 지친 사람들이 찾는 안식처이자, 음악의 묘미를 제대로 느끼는 이들이 벗하는 장르다. 거기엔 미국산 스테이크나 고급와인이 필요 없다. 나물 안주에 걸쭉한 막걸리 한통이면 충분하다. 흥겨움에 몸통과 다리가 절로 리듬을 따라가니까!

재즈를 즐겨듣는 지인이 들려준 말이다. "쭉 록음악만 들었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쿵쿵딱쿵 하는 정형화된 리듬이 싫어지더라구요! 이게 저것 같고, 저게 이것 같고. 그러다 우연히 재즈를 들었어요. 자코 패스토리우스의 <치킨(chicken)>이란 곡이었는데, 펑키한 그 리듬을 처음 접한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재즈에 심취했어요. 지금은 빌리 할리데이의 노랫소리에서도 감흥을 느낄 정도가 됐어요. 재즈는 참 매력적인 음악이에요!"

경남도민일보가 2010년 11월 5일 마산 3·15아트센터에서 기획·주최한 3색 재즈콘서트. 젠 틀레인

이 이야기 또한 현실이다. 경기도 가평에서 매년 열리는 자라섬 재즈페스티벌에 가면 재즈를 온 몸으로 즐기는 젊은이들을 부지기수로 만날 수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건강하다. 좋은 음악 듣고, 연인과 데이트도 하고. 그런가 하면 나이 많은 고참(?)들도 적잖게 보인다. 재즈가 돈 없는 사람들도 즐기는 음악이란 증거다.

재즈를 보는 두 창(窓)은 크게 다르다. 하나는 키치즘이 물씬 풍긴다. 속물덩어리도 이런 덩어리가 없다. 또 하나는 온전히 즐기는 음악 그대로다. 건강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두 창을 종합하면 재즈는 상당히 '델리케이트하고, 콤플렉스'한 장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재즈는 한국에서 왜 이런 양면성을 띠게 됐을까? 재즈 스스로가 태생적으로 퇴폐와 예술이란 이중적 면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남도민일보가 2010년 11월 5일 마산 3·15아트센터에서 기획·주최한 3색 재즈콘서트. 라 벤타나

재즈가 한국사회에 도착한 때로 거슬러 가보자. 기억하는가? 그 유명한 판소리 영화 서편제를!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청산도 보릿길 타령'이라고 하지만-물론 그 외에도 멋진 장면은 많다-필자가 감명 깊게 본 장면은 '장터 소리'신이었다. 아비와 딸이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창을 한다. 한 올 한 올 땀을 따듯 목청을 돋우는 송화. 그런데 그 때 한 무리 음악패가 장터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들은 다름 아닌 브라스밴드다. 금속성 소리가 하늘을 지르는 그 무리에 홀려 사람들은 부녀를 뒤로 한 채 떠나버린다. 덩그러니 남은 부녀. 아비는 시대를 한탄하며 자리를 뜬다. 국악이 양악에, 전통이 외래문화에, 목소리가 나팔에 압도당하는 근대를 이토록 절절하게 묘사한 장면이 있을까?

엄밀히 말해서 브라스밴드와 재즈는 다르지만, 사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 둘은 동의어다. 브라스와 타악기로 시작한 재즈는 지금도 이 둘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20세기초 흑인빈민가에서 시작된 재즈는 태동 즉시 미국 대중음악을 석권한 데 이어, 아메리카란 힘을 업고 전 세계로 발걸음을 옮긴다.

재즈 레이블의 명가 블루노트에서 발매된 색소포니스트 캐논볼 애덜리의 기념비적 명반 <섬씽 엘스>

한국 또한 예외가 아니다. 팝음악이 지금처럼 분화되기 전에는 한국가요도 재즈세례를 무던히 많이 받았다. 50~60년대 한국 영화에는 재즈캄보밴드가 무대를 장악하고 춤을 이끄는 장면이 곧잘 나온다. 그리고 이 문화는 카바레와 제비를 양산하면서 '재즈=퇴폐'라는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런가 하면 본토에서 시작된 비밥문화는 또 다른 흐름으로 이어져 재즈를 음악예술로 완성시킨다. 후자는 특히 50~60년대 퇴폐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 깊이 있게 각인됐다. 거칠게 말하면 한국에서 재즈란 이 두 흐름이 이런 저런 모습으로 변용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 외래음악은 이제 한국 대중음악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토양이다.

일전에 EBS 중용강의에서 도올이 반주에 맞춰 <섬머타임(summertime)>을 멋지게 불러제끼는 걸 본 적이 있다. 이 독특한 철학자는 자칭 '재즈 마니아'다. 왜? 음악과는 전혀 문외한인 듯한 그가 어떻게? 그가 재즈를 음악적으로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재즈에 담긴 본질만큼은 한 눈에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하층흑인들이 그들의 노동과 한(恨)을 풀어낸 양식이 재즈가 아닌가! 철학자 눈에는 그런 재즈에 담긴 역사와 서사, 음률이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강남 유흥족과 자라섬 관객들, 그리고 철학자를 잇는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재즈다. 재즈에는 우리를 숙연하게 만드는 역사가 있고, 깔깔거리는 젊음을 대변하는 리듬이 있고, 돈 많은 여가족(餘暇族)을 만족시키는 세련(?)이 있다. 그렇지만 아무렴 어떤가? 음악이란 본시 그냥 즐기는 것이다. 폼으로 듣던, 가슴으로 듣던, 머리로 듣던 재즈는 재즈다.

캐논볼 애덜리의 명반 <섬씽 엘스(something else)>에는 작곡가 콜 포터의 명곡 <러브 포 세일(love for sale)>이 있다. 복잡한 근심걱정 한 방에 날려버리는, 시원하게 내지르는 색소폰이 일품이다. 뜻은 '사랑을 팝니다'지만, 사실은 몸 파는 여인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시원한 재즈 기악은 그런 복잡한 상념조차 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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