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에게 진정한 민중의식 가르쳐야…홀로 외롭게 유서 남기는 일 사라질 것

지난해 말쯤 대구와 광주에서 연이어 동급생 폭력에 시달린 학생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대한민국은 온통 소위 '학교폭력'에 대한 담론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학교폭력'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학교가 무슨 폭력을 휘두른다는 말입니까.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면 그렇게 표현해도 되겠습니다만 이번 사건들의 핵심은 동급생이나 선배 등의 폭력을 두고 하는 말이므로 '학생폭력' 정도로 표현하는 게 맞겠다 싶습니다.

각 언론의 기획기사부터 여러 기고를 읽어보았습니다. 하지만, 가슴이 확 뚫리는 대안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경찰의 역할이나 선생님의 역할, 또 부모님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지만 지속적일 수도 없을뿐더러 가해학생들에겐 오히려 반발심을 사게 할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해학생 역시 마찬가지로 학교에 교실에 평화가 깃들지 않는 한 폭력학생들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돌이켜봅니다. 내가 중학교나 고등학교 다닐 때에도 이런 폭력현상은 있었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요. 조선시대 서당에선들 학생폭력이 없었겠습니까. 고대 때에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어느 시대이든 어느 사회, 어느 조직이든 갖가지 이유로 힘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서 권력이 생겨나고 그 권력은 조직이나 사회를 장악하려고 때로는 유화정책,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게 되지요. 역사에서 배운 대로 풀이를 하자면, 정당성이 없는 권력은 다른 이를 지배하려고 폭력을 씁니다.

현대사에서만 보아도 몇몇 사람이 떠오르네요.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전두환…. 이런 권력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폭압정치에는 민란이 따른다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이니까요. 대신에 평화로운 권력이 지배하게 되면 백성은 불만을 표출하지 않습니다.

좁혀서 교실로 초점을 옮겨보겠습니다. 교실의 '짱'은 선생님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일종의 유엔군입니다. 교실은 소위 싸움 잘하고 몇몇 '쫄따구'를 거느린 '짱'이 지배합니다. 이문열 작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엄석대 쯤 되겠지요. 이런 '짱'들은 일종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양아치 같은 아이들 두어 명 있으면 교실 조직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양순한 아이들이니까요.

돈을 뜯어내거나 심부름을 시키거나 혹은 기분이 나쁘거나 할 때 겁 한 번 주고 주먹질을 해도 이들은 고개 푹 숙이고 대들지 못하는 아이들이니까요. '짱'으로 보아선 이처럼 지배하기 좋은 교실이 없을 겁니다. 한두 친구가 불만을 드러내고 부당성을 따지면 여럿이서 집단으로 폭행을 합니다. 교실은 다시 쥐죽은 듯 '짱'의 눈치를 보며 조용해집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우리 부모들과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우리들,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괜히 나섰다가 다친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지요? 학교에선 어떻습니까. 교과서를 달달 볶듯이 외우고 8절지 종이에 인쇄되어 나온 문제만 잘 풀면 다 잘된다고 가르치지는 않나요? 역사에서 폭군에 대항해 일어선 민란으로 정권이 바뀌고 역사의 흐름이 바뀌어온 것을 암기식 선다형 문제로만 풀 일이 아닙니다.

   
 

3·1만세운동 때나 3·15나 4·19의거 때, 또 온갖 민주·민중항쟁 때 만약 한둘만 일어섰다면 저만 다치고 말겠지요. 하지만, 만백성이 함께 떨쳐 일어섰을 때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분명히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민중의식을 아이들 몸에 배어들게 해야 대구 자살학생처럼 혼자 외로이 괴로이 유서를 남기는 일이 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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