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이 부부가 사는 법] 창원 도계동 조은약국 김지수·박재영 부부

“처음 보는 순간 이방인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희도 경남에서 이방인이거든요. 늘 이방인에 대한 상대방의 거부감을 의식하고 살죠.” 김지수(41)·박재영(43) 부부. 날 더러 이방인이란다. 나는 부적응자에 가깝다. 정작 진짜 이방인인 이 부부, 누구보다 경남에 잘 적응해 산다.

이 부부는 지난 2002년부터 창원시 의창구 도계동에서 약국을 운영한다. 현재 김지수 씨는 민주당 경남도당 여성위원장에다 창원 갑 지역위원장이고, 박재영 씨는 창원시약사회 총무이며 경남도민일보 이사다. 그런데 약사 부부라고만 하기엔 인텔리 성향이 강하고 인문학 냄새가 많이 난다. 그리고 지역 사회 중견이라고 하기에도 아직 젊고 자유분방하다. 도대체 이 독특한 부부는 어느 별에서 왔을까.

이야기의 시작은 인터뷰에 대한 부담감이다

박재영 씨./김구연 기자

박재영 - 이런 인터뷰 자주 했으면 좋겠어요. 이거 하기로 하고 나서 정말 책도 많이 보고 신문을 봐도 정독을 하게 되고 그렇더라고요. 그동안 정리 안 하고 막 살았어요. 정리를 해야 하는데 정리가 안 되는 거야. 제가 신문도 스크랩을 많이 해놨어요.

김지수 - 원래 항상 정보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근데 재밌는 게 뭐냐면 정보를 체화하는데 대부분은 전형적인 틀 거리 안에서 자기 체화를 하잖아요? 이분은 자기 체화방식이 특이해요. 기발하다 해야 하나 창의적이라 해야 하나. 늘 비슷한 사고를 하는 사람 중에서 좀 비전형적인 생각을 하니까.

박재영 - 아무튼 그래서 인터뷰에 대한 고민은 인제 시작됐잖아요? 혼자 스타벅스 가서 홍보물을 보면서도 아, 내가 무슨 얘기를 해야겠구나 하는 걸 발견하고, 신문을 보면서도 아, 이런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하고. 예를 들어 스타벅스 팸플릿을 보니까 공정무역을 상당히 강조하는 거예요. 자신들이 세계적으로 커피산업에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하는지 이미지를 심어주는 거죠. 이런 식으로 자기를 포장했구나. 그런 걸 보면서 만약에 제 이야기가 기사로 나간다면 이런 식으로 한 줄로 표현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해보고.

김지수 - 근데 스타벅스를 가는데 돈 내고 먹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박재영 - 저는 체리피커에요. (체리피커 cherry picker - 마케팅 용어. 주로 신용카드 회사에서 부가 혜택만 이용하고 실제 돈은 거의 쓰지 않는 실속 소비자를 일컬음.) 제가 가진 카드 하나가 스타벅스 월 1회 공짜에요. 스타벅스를 왜 가느냐? 공부하러 가거든요. 가면 항상 포장을 해달라고 그래요. 포장이 매달 바뀌는 거예요. 더 안전하게. 제가 배우는 거죠. 이걸 약국에 어떻게 적용하느냐. 고민하는 거예요.

김지수 씨./김구연 기자

김지수 - 남편은 생활이 굉장히 알뜰하다고 그럴까요. 여행을 할 때 시장 골목 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그런 외진 데를 잘 찾아요. 쿠폰 진짜 잘 찾고. 쿠폰 왕이에요.

박재영 - 애들이 지금 당장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기잖아요? 그러면 애들한테 지금 말고 내일도 살 수 있겠느냐, 할인되는 카드가 있을까, 어디서 쿠폰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더 싼 가격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는 거죠.

김지수 - 그러면서 사실 물건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거죠. 이게 꼭 필요한 건가. 애들한테는 이걸 바로 사지 말고 더 기다려보자, 같은 값에 더 큰 걸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박재영 - 저희는 사실 바닥부터 자수성가했거든요. 지금 이 시간에 밖에 나와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약사들이 1%도 안 되거든요. 저는 돈 몇 푼 더 버는 거보다 기회비용이 높은 일이 있으면 기꺼이 그걸 하죠.

김지수 - 그래도 이렇게 기회비용을 지급하고 약국에 시간을 좀 덜 쓰게 될 때까지는 열심히 일했어요.

박재영 - 처음 창원에 자리를 잡았을 때는 추석하고 설날에만 하루씩 쉬었어요. 다들 일하기 싫은데 나쁜 날은 우리가 다 일했어요. 몇 년을 아침에는 집사람이 나왔고요. 저는 새벽 두 시까지 약국에 있었어요. 그러면서 일을 거의 다 파악하고 있어요. 이제는 지금 바로 들어가도 몇 사람이 왔고 무엇을 얼마나 팔았나! 다 알아요. 무얼 하려면 잠깐 완전히 집중해야 해요. 그러면 그 일에서 벗어날 여유가 생겨요. 사실 이런 건 몇 년 전까지 꿈도 못 꿨죠! 어디 둘이 나가서 점심을 먹어?

김지수 - 약사님들 중에는 저희보다 훨씬 부유하신 분들이 많은데 기회비용을 투자하겠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계신 분이 많진 않아요. 제가 서울에만 있다 와서 그런지 되게 놀랐던 건 지역은 학연이라든지 지연이라든지 강한 탓도 있지만, 사람들이 바뀌는 거에 대해서 상당히 거부감을 느낀다는 거죠. 그러면 당연히 고사할 수밖에 없는 거죠. 저희 부부는 약사회에서도 파격적이에요. 약사회 행사에 부부가 같이 참석한다거나 심지어 아이까지 데리고 오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여성 약사들이 50%를 차지함에도 약사회 행사에는 주로 남성이 혼자 오죠.

김지수, 박재영 부부./김구연 기자

서울 생활을 접고 창원에 오다, 그리고 정치를 시작하다

박재영 - 유목민 기질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자기가 할 수 있고 자기 뜻을 펼칠 수 있다면 어디든 가고 싶어요. 안주할 때 떠나고 싶고 유랑할 때는 안정하고 싶고.

김지수 - 장소는 중요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 살 건가 생각하는 거죠. 어디에 합당한 장소가 있으면 떠난다.

박재영 - 창원에 온 게 2002년 12월이에요. 원래는 미국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한국 생활을 정리하려는 찰나에 마침 창원에 기회가 생겨서 온 거죠.

김지수 - 당시 의약분업이 시행되면서 창원에 병원을 개업하는 의사가 파트너를 찾고 있었던 거죠. 처음 부산에 가서 뵀는데 의사가 마음에 들었어요.

박재영 - 서로 의기투합해서 환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자 하고 창원에 건물을 새로 지어 왔어요.

김지수 - 객지 생활 연습도 할 겸.

박재영, 김지수 부부./김구연 기자

박재영 - 중간에 아내는 미국에 갔다 왔어요. 미국에 가서 일 년 반 있으면서 약사 면허를 따가지고 왔죠. 뭐, 언제라도 미국으로 간다면 필요하니까.

그렇게 하고 2007년에 다시 창원으로 돌아왔고요. 그러다가 작년 6.2 지방선거 때 우리 집사람이 민주당에서 도의원 비례대표 공천을 받았어요. 그전까지 정치에 대해서는 기회가 없었는데, 그때 기회가 왔으니 한번 해보자 했어요.

그런데 아니구나 하는 부분도 있고 해서 저는 그만두고 싶었는데, 아내 성격은 또 그런 게 아니에요. 한번 했으면 잘 해보자는 거죠. 민주당이란 곳이 경남에서 세력이 약하잖아요. 아무래도 제도화된 부분이 약해. 그래도 저희는 제도권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잖아요. 안타깝기도 하고. 지방선거에서 비례대표는 돕는 거라 하대요. 2번을 받았어요. 안 될 거 알면서도 아주 열심히 했어요. 또 김두관 도지사 캠프에서 부대변인을 하면서 정치 경험을 했고요.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민주당에서 여성위원장이 필요하대서 했고, 창원 갑 지역위원장을 뽑을 때도 해보는 게 어떻겠냐 제안이 와서 하게 됐어요.

김지수 - 창원은 외지인이 많잖아요? 우리같이 7,8년 이상 된 분도 매우 많으신데 이분들이 사실 지역사회에 등장하고 있지 않아요. 그분들 대부분이 언제가 여기 떠날 거라 생각을 많이 하시기도 하고.

저는 이 지역에 있는 많은 저 같은 분들이 여러 가지 활동에 나서야 한다고 봐요. 외지인들에게 사실 지역 정당 활동은 문턱이 높아요. 진입하기가 참 어렵죠. 이런 데서 지역이 낙후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고 보죠. 또 사실은 그러기에 인프라가 얕잖아요. 하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크게 나아질 기회도 많고 가능성이 크다고 봐요.

여기는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는 구조가 선명해요. 중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거죠. 사실 중간이 대다수를 차지함에도 그런 사람을 대변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죠. 우리가 고민해야 할 거는 중간의 목소리를 어떻게 더 드러낼 수 있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연대하고 활동을 통해서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조직의 힘이 그런 데서 발현되는 거잖아요.

나눔과 저울, 삶의 의미 혹은 원칙

박재영 - 제가 텔레비전을 보다가 저울이라는 얘길 들었어요. 제가 살려고 하는 게 뭘까. 저는 한마디로 나눔이라고 하고 싶어요. 그 나눔이라는 걸 후배가 가르쳐 줬거든요. 어떤 후배한테 앞으로 뭐하고 살 것인지 쭉 이야기하니까 ‘선배의 삶은 나눔이라고 정의하면 되겠네요’ 이렇게 정리를 하더라고. 아, 이거 참 좋은 얘기다. 내가 어디 가서 내 재능을 나누든 재산을 나누든 인프라를 나누든, 나눔이란 걸로 내 삶을 정의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죠.

저울이라는 건 제가 편향된 사고를 할 수 있잖아요. 사회 균형을 맞추는 저울이 되고 싶다. 나는 이런 편향으로 살았지만, 이걸 글로 쏟아내면 저쪽 편향에 있는 사람이 내 글을 보고 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그러면서 사회 중간지점으로 올 수 있는 저울이 되겠다.

예전에 우리 때, 제가 87학번인데 그때 사회가 혼란했잖아요. 학생운동 한다는 사람이 미국으로 간다고 그러니 비난을 많이 받았어요. 남들은 양키고홈 하는데 저는 미국을 더 알아서 그래서 더 이겨야겠다, 미국에 가서 미국을 더 알고 양키고홈을 해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후배들에게는 안 먹히는 거야.

김지수, 박재영 부부./김구연 기자

김지수 - 남편은 사고가 굉장히 자유로워요. 사실은 당시 학생회는 경직돼 있었죠. 남편 사고 자체가 소위 말해서 학생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특이한 스타일인 거죠. 미국을 가려는 거는 늘 넓은 세계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죠.

박재영 - 아주 어렸을 때부터 큰 세계로 가야 한다 생각했어요. 대학도 서울로 간 건 다른 이유는 하나고 없고 무조건 큰 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서울에 살면서도 무조건 더욱 큰 세계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제가 돈을 많이 번다면 교육 사업을 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지역에서 중학생 고등학생을 선발해서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거예요.

미국이나 영국, 호주, 뉴질랜드 같은 데서 배우고 돌아오면 그 친구는 분명히 고향에 오고 싶어 할 거거든요. 중고등학생 때 떠났으니 아는 곳이라고는 고향뿐이니까. 저는 그걸 조금 더 발전시켜서 자치단체에서 학생들을 발굴해서 같이 하면 좋지 않겠나 싶어요. 그래서 제가 유학원을 할 생각도 있었어요. 10명으로 돈을 벌었다면 그중에 10%는 장학생으로 뽑아서 보내는 거죠.

아무튼, 그 나눔과 저울이 제가 지금까지 살려고 하는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