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26) 낙동강 역사문화탐사 마지막 여정

드디어 오늘로써 낙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인 하구(河口)에 닿게 됩니다. 지난해 1월 시작한 낙동강 역사문화탐사의 대단원이 마무리되는 지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하구에 가까워질수록 하상이 넓어지고 강물에선 갯내가 묻어나옵니다. 금곡동에서 하단동에 이르는 둔치에는 잘 정비된 체육공원이 자리해 추운 날씨에도 운동 나온 시민들의 모습이 더러 눈에 듭니다.

■모라동(毛羅洞)에서 찾은 옛말

지난 연재에서 살폈던 구포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모라동인데, 모라(牟羅)는 우리말 '마을'의 옛말입니다. 모라는 한자의 소리를 빌려온 말이기 때문에 모를 모(毛)라 썼다고 다른 말이 되는 게 아니지요. 이 말이 일본으로 전해져 무라(村)가 되었는데, 오히려 그쪽에 원형에 더욱 가까운 말이 남은 셈입니다. 당시 도시를 이른 말은 건모라(健牟羅)라 했으니 큰 마을이란 뜻입니다.

■사람을 살린 나무 활인수(活人樹)

활인수는 대저도 동쪽에 있던 소요저도(所要渚島) 혹은 유도(柳島)라 불리던 작은 섬에 있었는데, 지금은 강서구 대저동이 되었습니다. <양산읍지초>에는 소요저도로 나오고, <양산군지>에는 유도라 했습니다. <양산읍지초>에 "대저도 동쪽에 있으며, 전답이 수백 경이 되고 토질이 매우 비옥하나 바닷물이 넘치면 잠긴다. 섬 언덕에 나무가 심어져 있으니 이를 활인수라 한다. 김준옥이란 사람이 심었는데 바닷물이 넘쳐 들어오면 사람들이 모두 이 나무에 의지하여 목숨을 구하기 때문이다"라고 활인수의 내력을 밝혀 두었습니다.

모라주공아파트 3단지 뒤에는 유도의 수해를 막게 해 준 김준옥의 무덤이 있습니다. 무덤의 비갈은 앞의 공을 기리기 위해 양산군수 유인목이 세운 것이며, 김준옥의 공적에 대해 <양산군지> 산천에 '유도는 강 가운데 있다. 섬사람들이 해마다 범람의 피해가 많아 이를 큰 걱정으로 여겼는데, 김준옥이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물 피해를 막았다. 후세 사람들은 여기서 심은 정자나무가 물난리 때 사람을 살렸으므로 활인수라 하였다'고 전합니다. 이곳의 활인수는 지나온 길에 보았던 합천 율지의 활인대(活人臺), 창녕 남지의 피수대(避水臺)와 학포리의 하린대(활인대)-걸과 더불어 낙동강 언저리에 살던 사람들이 물난리에 대처한 지혜의 산물인 것입니다.

모라동의 남쪽은 삼락동인데, 이곳에는 낙동강 가에 제방을 쌓은 부사의 은덕을 기리는 비석 3기가 서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둑을 쌓는 것은 곧 목숨을 보전하는 일이었으니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삼락동 축제기념비(築堤記念碑)

이 빗돌은 삼락동 상강선대(上降仙臺)에 있습니다.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부터 부사 이경일(李敬一)ㆍ이명적(李明迪)ㆍ박제명(朴齊明)이 둑을 쌓은 것을 기리는 빗돌입니다. 처음 둑을 쌓은 것은 정조 12년인 1788년이었으니 불과 2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그 뒤에도 둑이 무너져 다시 쌓은 일이 두 번 더 있었음을 나란히 서 있는 빗돌이 전하는데,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그 곁에는 효자 구주성의 정려비가 있고, 뒤에는 할배당집이 있으며, 할매당집은 하강선대에 있습니다. 당제는 매년 12월에 진선회(津船會)에서 모십니다.

■몰운대(沒雲臺)

다대곶 동쪽에 있는데, 그 이름은 이 일대가 해류의 영향으로 짙은 안개가 자주 끼어 그 속에 잠겨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몰운대라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16세기 이전에는 몰운도(沒雲島)라는 섬이었다가 낙동강에서 밀려온 토사가 쌓여 지금과 같은 육계도가 된 것입니다. 이곳은 대마도와 가까워 일본과의 바닷길로 이용되었으며 왜구들이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 몰운대는 백두대간의 태백산 줄기인 구봉산에서 갈라져 나와 낙동강의 동쪽을 에운 낙동정맥(洛東正脈)의 종결지점입니다. 이 산줄기는 태백산에서 시작하여 울진의 백병산, 영해의 용두산, 청송의 주방산, 경주의 단석산, 청도의 운문산, 언양의 가지산, 부산의 금정산, 동래의 몰운대까지 곧게 이어지는 산줄기입니다. 그러니 낙동정맥은 낙남정간이 낙동강의 남쪽에서 해안과 내륙을 가르는 분수령으로 기능하듯 낙동강의 동쪽을 에워 이 강으로 흘러드는 샛강과 그 유역의 땅을 보듬고 있는 것이지요.

몰운대에 있는 다대포 첨절제사영 객사.

몰운대 정상에는 회원관(懷遠館)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대포 첨절제사영에서 옮겨온 객사(客舍)가 있습니다. 객사는 그 이름에서 보듯 사행의 임무를 띠고 온 공직자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향궐망배(向闕望拜)의 기능이 추가됩니다. 그래서 객사 건물은 국왕과 궁궐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모시는 정당의 좌우에 익실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건물은 사진에서 볼 수 있듯 대청이 개방되어 있습니다. 원래의 모습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데, 아마 이곳으로 옮겨 세우면서 누의 기능을 강조하기 위해 익실을 없앤 듯합니다. 원래의 모습은 거제 장목진 객사에서 보듯 양쪽에 방을 두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년의 왜란에는 이순신 장군의 선봉장으로 용맹을 떨친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이 이곳 몰운대 앞바다에서 순절하였습니다. 그는 이곳의 지명이 몰운대임을 듣고 구름 운(雲)과 그의 이름인 운(運)이 소리가 같으므로 구름이 이 대에서 몰하였듯 "내가 이 대에서 죽을 것이다(아몰차대: 我沒此臺)"라는 각오로 분전하다가 순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정운의 순절을 기려 정조 22년(1798)에 세운 '정운공순의비(鄭運公殉義碑)'가 있는데, 군사시설지구라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몰운대 해안에서 본 해넘이. 멀리 가덕도로 해가 넘어간다.

내려오는 길에 몰운대 해안에서 낙조를 바라보며, 지난 여정을 반추해 보니 몹쓸 사업에 신음하는 강을 바라보며 마음 아팠던 기억도 많았지만 여러분과의 만남은 행복한 추억으로 남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하시길 기원하며 글을 맺습니다. <끝>

/글·사진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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