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ccess Story -법무법인 미래로 이재철 대표변호사

점심때를 넘겨 찾은 사무실은 차분하지만 분주했다. 법무법인 미래로. 최근 애플 소송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바쁘게 업무를 보던 이재철(52) 대표변호사가 옷매무시를 가다듬는다. 며칠 전 그에게 인터뷰하자고 했더니 질문을 미리 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질문에 맞게 답변을 다시 보내왔다. 이건 뭐 재판 준비를 하는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애플 소송 준비는 잘 되고 있다고 한다. 애플은 이번 소송에서 김앤장 법률사무소를 대리인으로 했다. 이 로펌은 변호사 업계 1위라던데,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다. 그런데 이재철 변호사는 해볼 만하다고 했다.

"애플이 이번에 창원이 어딘지 처음 알았을 거예요. 하하. 어차피 소송은 일대일 싸움이거든요. 변호사 사무소 대표 선수들끼리의 싸움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안 밀립니다. 지금까지 대형로펌하고고 소송을 많이 해봤지만, 창원지법에서 하는 것은 진 기억이 거의 없어요. 지역 변호사가 김앤장보다 낫다는 걸 입증하겠습니다. 실제로도 낫고요."

미래로가 이 소송으로 돈을 많이 벌게 될까? 이 변호사는 고개를 젓는다. 이 소송이 미래로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단다.

"수익을 보고 한 건 아니에요. 전문가 자문만 해도 엄청난 돈이 들어가거든요. 김앤장이 애플에서 받는 수임료도 미래로가 소송 참여자에게 받는 돈의 열 배 이상일 겁니다. 사실 소송이 길어질수록 적자 볼까 봐 걱정이에요. 일부러 창원지법에다 소송을 낸 것도 재판 기간을 짧게 하려는 의도가 있어요. 물론 애플 쪽에서는 길게 가려고 하겠죠. "

/김구연 기자

퇴계 할배의 후손

그의 사무실은 어지러웠다. 경험상 연구를 열심히 하는 교수 연구실, 일 많이 하는 변호사 사무실은 대게 정리가 잘 안 돼 있다. 이렇게 말하니 자신은 그저 정리에 서툰 사람일 뿐이란다. 사무실 정리는 서툴지만, 그의 인생은 지금까지 정리가 잘 돼온 편이다. 그는 퇴계의 후손이다. 고향 집은 안동시 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한옥이다. 원대구택이라 불리는 데 퇴계의 5대손인 원대처사 이구(1681~1761)가 살던 집으로 진성이씨 원촌파의 종택이다. 그러니까 그는 퇴계 집안의 장손 중 한 명이다.

"고향이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요. 안동댐이 생기면서 수몰지구였는데, 다행히 지대가 높아 집이 살아남았어요. 아버지가 교사여서 고향에 계속 살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고향에 가면 동네 노인들이 지나가다가 누구 집 아들이냐, 몇 대 할아버지 성함이 어찌 되느냐고 묻고는 모르면 호통을 치고 그랬어요. 퇴계 할배 이야기는 한 300번은 들은 것 같은 데 이런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삶에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그랬다. 그는 태어나기를 잘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예로부터 과거에 급제하거나 책 내는 걸 최고로 쳐 줬다. 이재철 변호사가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도 따지고 보면 과거 급제 아닌가. 그는 경북고, 서울대 법대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TK(대구, 경북) 권력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다 어머니의 노력 덕분이란다.

"맹모삼천지교였던 셈이지요. 어머니가 중3 때 대구로 전학을 시켰어요. 경북고에 들어가게 하려고요. 외가가 대구에 있어 낯선 동네는 아니었죠. 제가 입학할 때 신입생 중에 중학교 때 전교 수석 하던 애들이 100명이 넘었다고 들었어요. 특히 부산에서도 평준화를 피해서 온 아이들이 많았죠. 대단한 친구들이었어요. 아마 제 고등학교 동기가 경북고 사상 고시 합격생이 제일 많을 거예요."

그는 서울대 법대를 지원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때는 공부 잘하면 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단다. 학자나 관리가 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안 분위기도 한몫했다. 그리고 1982년 제24회 사법고시에 합격한다. 서울대 대학원 1학년 때였다. 그는 사법연수원 14기인데 추미애 민주당 의원,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 주호영 한나라당 의원이 동기다. 이들은 모두 대구 출신으로 인연이 있다.

"당시 여자 동기 3명이었는데 공부는 조경란 현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제일 잘했지요. 예쁘기는 추미애 의원이 제일 예뻤고요. 추 의원은 처음 판사생활을 춘천서 했는데 내가 군 법무관 생활을 또 춘천서 했어요. 가끔 춘천 거리에서 지금은 남편이 된 분이랑 손잡고 지나가는 걸 보기도 했지요. 홍준표 대표는 옛날에 영남대 도서관에서 같이 고시 공부를 했어요. 나는 조용히 공부하는 스타일인데 홍 대표는 사람들을 모아서 얘기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딱 보니 그때부터 대표였네. 주호영 의원도 붙임성이 좋아서 판사일 때 대한민국 판사 중에 제일 발이 넓다 그랬어요. 모든 사람이 좋아하더라고. 정치할만한 인물이죠."

판사 소신보다 일반적인 상식이 우선

군 법무관을 마친 이재철 변호사는 서울남부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민사지법 단독 판사 시절 내린 판결 하나가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일이 있다. 지난 1991년 대공분실 입회를 거부당한 김한주 변호사가 국가를 상대로 낸 위자료 청구 소송에서 200만 원을 받아냈다. 이때 판사가 이재철 변호사였다.

/김구연 기자

"당연한 판결이었는데 법원장이 벌벌 떨더라고요. 사건이 들어오는 순간 이건 조금 민감한 사안이다 싶었지요. 나도 몰랐는데 그때만 해도 그런 중요 사건들은 따로 관리해서 윗선에 보고를 해왔더군요. 당시 담당계장이 중요한 사건으로 보지 않고 보고를 안 했던 거지요. 나중에 듣기로는 선고하기 직전에 과장이 발견했는데 계장이 보고 안 했다고 되게 깨졌대요. 아무튼, 그게 접견 거부 손해 배상으로는 최초 판결이었어요. 이 이후에 계속 비슷한 사건이 많았는데 위자료 200만 원이 표준이 됐어요."

경상대 장상환 교수 등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됐던 <한국 사회의 이해> 사건을 기억하는가. 지난 2000년 무죄 판결을 내린 것도 이재철 당시 창원지법 부장판사였다. 하지만 판사 시절 주요 판결을 훑어 볼 때 그를 보수다 진보다 하는 방식으로 분류하기는 어려웠다. 그저 합리적이랄까. 물론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판사로서 판결은 일반 상식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개인의 소신과 법관으로서의 소신은 다르죠. 소신이 고집이어서는 안 되고 사회를 널리 이해한 선에서 나온 판결이어야 정당하고 인정을 받는 거지요. 원칙은 있어야 하지만, 사회 돌아가는 거 하고 같이 가야지요. 자기 혼자 맞다 그래도 남들 아니라면 한 번 생각해 봐야 해요. 그런데 사회 일반적인 인식 수준에 맞추는 게 참 어려운 거에요."

지난 2001년 3월 창원지법 부장판사 이재철은 판사복을 벗고 창원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다. 만 40세였다. 그런데 이것이 당시 지역 사회에서는 드문 일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나름 젊은 나이에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승진 가능성도 다분한 부장판사가 자기 출신 지역도 아닌 곳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으니까요. 저 나름대로 생각을 한 거지요. 서울에서 사무실을 내려면 3,4년은 걸릴 것이고 앞으로 변호사 업무 환경도 많이 바뀔 것이라 봤지요. 제가 또 창원을 좋아하거든요. 저 이후로는 부장판사 출신이 꾸준히 창원에 사무실을 내고 있어요."

이것 말고도 2006년 경남 최초 로펌 법무법인 미래로 출범, 창원지법 국민 참여 재판 1호 변호사 등 유독 그에게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이게 다 전략이다. 맞붙어 싸우는 경쟁에는 약하니 남들보다 먼저 출발해서 선점하는 게 자신의 방식이란다.

기부야 말로 자본주의가 살 길

먹고 살기 바쁜 중에도 이재철 변호사는 사회활동을 열심히 한다. 그는 올해 1월에 경남지방변호사회 회장 임기가 끝나자마자 2월에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으로 취임한다.

"변호사라는 게 어디 가서 감투 쓰기 좋은 자리잖아요. 모금회가 어려울 때 사양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고, 변호사인 제가 회장을 맡는 게 투명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더라고요. 뜻밖에 모금 성적이 좋아요. 경북, 충북이 지난해 100억씩 모금했거든요. 그런데 경남은 겨우 60억이에요. 앞으로 개발할 여지가 많은 거죠. 내년에는 경남도 100억 모금을 달성해보려고요."

기부문화에 대한 그의 생각도 남다르다. 단순히 불쌍하니까 도와줘야 한다는 수준이 아니다. 기부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들이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자본주의가 살려면 결국 기부 없이는 안 됩니다. 최근 미국이나 유럽 부자들이 세금 더 내겠다고 나서는데 그게 바로 부자들이 살길이에요. 가난한 사람이 숫자가 훨씬 많지요? 공생하지 않으면 부자 자신도 못 살아요.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그냥 도와달라 하면 잘 안 도와줘요. 인정에 호소하기보다는 기부 자체가 자기한테 이익이라고 생각하게 해야죠. 하다못해 기분이라도 좋아지잖아요."

/김구연 기자

돌이켜보면 큰 좌절 없이 승승장구한 인생이다. 그런 그가 젊은이들에게는 부채의식이 있다. 그의 성공이 아름다운 이유다.

"요새 학생들은 우리 때보다 확실히 공부를 많이 하고 실력도 있는 것 같아요. 영어, 컴퓨터도 잘하지. 열심히 하고 실력도 되는데 취직이 안 돼요.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나요. 우리 세대는 취직 걱정 없이 학교에 다녔고 졸업해도 편하게 취직했어요. 우리 세대가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그 빚을 갚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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