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23)황산역을 지나다

오늘은 황산도의 본역인 옛 황산역 자리에서 길을 잡습니다. 바로 지금의 물금정수장 일원인데, 이 일대는 불과 100여 년 전까지 낙동강의 하구가 형성되었던 곳입니다. 지금은 낙동강의 하구가 멀리 남쪽의 부산 다대포 몰운대 근처로 밀려나 있지만, 조선시대 후기에 그려진 옛 지도들에는 이곳 물금이 낙동강의 하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황산역(黃山驛)

지난번의 마지막 여정이었던 용화사를 지나면 바로 옛 황산도(黃山道)를 관할했던 찰방(察訪)이 주재한 황산역이 있던 곳으로 듭니다. 지금의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구물금 마을의 692번지 일원이 황산도를 총괄한 황산역 자리입니다. 지금은 역 자리에 물금정수장이 들어서, 수원 관리를 위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습니다.

맞은편 언덕에서 본 황산역과 물금 둔치.

옛 황산역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고산자(古山子)의 <대동지지>에 물금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양산군읍지>에는 철종 8년(1857)에 수해를 당해 군의 북쪽 20리로 이설하였다고 전합니다. 이때 옮겨간 곳이 상삼리 황산 마을 439-3번지인데, 이곳에 동헌-터 황산역-터 구역-터란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런 모습은 역제 폐지 직후인 1897년에 측량된 <구한말한반도지형도>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황산역은 황산강 기슭에 있는데, 11개의 속역을 거느리고 있으며, 중종 5년(1510)에 승을 혁파하고 찰방을 두었다고 전합니다. 황산역을 이곳에 둔 것은 <양산군읍지> 관애에 실린 다음 내용을 참고할 만합니다. '황산역 뒤에 산이 있는데 둘레를 곧추서 두르고 있어서 산성이라고 할만하다. 그 가운데 임경암이 있고 그 앞에는 임경대가 있다.산세가 빼어나고 험준하며 그 아래에 한줄기 물이 흐르는데 이것은 낙동대강(洛東大江)의 하류이다. 강의 서쪽 벼랑은 김해의 한산(旱山)이고 강의 동쪽 벼랑은 임경대 아래의 잔도(棧道)다. 부산에서 시작하여 조령(鳥嶺) 아래로 통하는 물길과 뭍길은 이곳을 통하지 않으면 이어지지 않는다. 만약 임경대 뒤쪽에 성을 쌓는다면, 우뚝한 봉우리들과 크고 작은 암석들이 자연스럽게 성 모양이 되니 만약 위급한 일을 당하더라도 깃발을 세우고 돌을 굴리면 채찍으로 치는 것보다 나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물길과 뭍길은 끊어 놓게 될 것이니 반드시 건너갈 수 없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황산역 찰방 선정비.

황산역 배후에 성을 쌓는 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 주변은 천험의 길임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물길이 아닌 뭍길로 이동할 때에는 반드시 이 길을 통해야 하므로 낙동강 하류와 역로가 결절되는 이곳에 황산역을 둔 것일 거라 여겨집니다. 황산역에서 유산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양산향교에는 황산역에서 옮겨온 찰방 선정비 9기가 있어 사진을 올렸습니다. <여지도서> 장시에는 5일과 10일에 선 황산장이 있다고 나오며, 지금은 물금장이 그 전통을 이어 같은 날에 장이 섭니다.

황산언(黃山堰)

황산역 옛터를 지나 둔치로 내려서면 황산역에서 관장해서 역언(驛堰)이라고도 했던 이제는 유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황산언을 만나게 됩니다. 황산언은 영조 때 간행된 <여지도서>에 처음 나옵니다. 이 책에 '황산언은 중년에 무너진 것을 흙과 돌로 다시 쌓고, 대를 심어 농민들이 이익을 얻도록 했다'고 전합니다. <영남읍지>(1832)에 실린 지도에는 서쪽 큰 방죽에 대를 심었다고 쓰고, 대숲에 덮인 황산언을 그렸습니다. <정조실록>에는 16년(1792) 9월 15일에 양산 군수 성종인(成種仁)이 여름 홍수에 무너진 양산의 읍언(邑堰 : 양산읍에서 양산천에 쌓아 관리했던 둑)과 역언, 도언(島堰 : 대저도 북쪽 기슭에 쌓은 둑)의 복구 문제로 상소한 기사에 황산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상소하여 이르기를, '5월 16일의 비와 6월 16일의 비, 25일의 비바람으로 말미암아 강해(江海)가 분탕되고 온 고을이 침몰되어 어디를 봐도 남은 곡식이 없이 붉은 땅만 있었는데, 7월 23일 밤중의 비바람은 임술년(영조 16년(1740)의 대홍수)과 을해년(영조 31년의 대홍수)에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익사한 사람과 떠내려간 가축이 매우 많았으니, 산과 들이 뒤바뀌고 가옥이 허물어진 것은 또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 본군에 3개의 큰 제방이 있는데, 그 하나는 읍평(邑坪)의 20리 되는 제방이고 그 하나는 본군 남쪽 거도(巨島 : 대저도를 말함)의 30리 되는 동서로 이어진 제방이고 그 하나는 황산역의 좌우로 이어진 긴 제방입니다. …… 이른바 황산언은 우관(郵館)이 있는 곳으로서 제방 안의 농토가 모두 마위전(馬位田 : 역마를 기르기 위한 재원으로 설정한 토지)이며 그곳에서 생산되는 곡식의 힘을 많이 받고 있는데, 금년 여름의 큰 홍수에 떠내려간 가옥이 얼마인지 헤아릴 수도 없으며 제방 아래 논과 밭이 물에 잠겨 늪지로 변해 버렸으니 역민(驛民)인들 어떻게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 이상 3개의 제방은 실로 백성의 목숨과 관계된 것이어서 개축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황산언은 보수하는 것이 편리한지 폐지하는 것이 편리한지 본군에서 억측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만, 도언은 쌓지 않을 수 없으며 읍언은 아주 파손된 곳은 다시 쌓을 수 없으나 마구 흐르는 물줄기를 또 막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라 하였습니다.

상소에서 요청한 대로 조치되었고, 황산언의 보수 문제를 본군에서 단정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보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군수의 소관 업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 황산도 찰방이 두량하여 역민들이 보수하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뒤에도 수해를 입었는데, 철종 8년(1857년)에 수해를 당해 결국 군의 북쪽 20리로 역을 옮겼다고 <양산군읍지>에 전할 정도입니다.

이 책에서 무너진 황산언을 다시 쌓은 사실은 <여지도서>에 전하는 바와 같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지보(誌補)에 "방죽의 서쪽 가는 낙동강이고, 동쪽 가는 메기들이니 모두 역 사람들이 쌓았다. 동쪽 방죽에 있는 작은 빗돌에 새기기를 '방죽을 쌓은 은혜는 찰방이 남기신 사랑이라' 새겨져 있다"고 나옵니다. 예서 읍언과 역언 사이의 들을 메기들이라 했으니, 그것은 이곳이 습지임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양산군지>에는 이 방죽과 빗돌이 1935년의 하천 정리로 지금은 없어졌다고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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