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22) 황산베리를 걷다

온 몸으로 느껴지는 선선한 바람이 뭘 해도 좋은 철이니 자리를 박차고 길에 서라고 이릅니다. 바람에 등 떠밀려 낙동강 가에 서서 지난 여정을 마친 화제리 토교마을에서 길을 잡습니다. 예서 물금에 이르는 길은 강가 바위 벼랑을 깎아 만든 험한 길이라 잔도(殘徒) 또는 잔로(棧路)라 불립니다. 이곳에서는 이 길을 황산베리 또는 물고미잔로라 하는데,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에 그 험한 사정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임경대(臨鏡臺)와 경파대(鏡波臺)

토교마을을 지나면 머지 않은 곳에 고운 최치원과 관련된 유적인 임경대와 경파대가 있습니다. 지금은 옛 터 위 길가에 새로 정자를 짓고 임경대라 하는데, 가히 낙동강 하류의 풍광을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이만도의 <양산군읍지>에도 아직도 남은 터가 완연하다 했듯이, 지금도 강가 바위 위에 옛 터가 남아 복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토교 남쪽 낙동강 가에는 최치원이 이름을 지었다는 경파대(鏡波臺)가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산군 고적에 '임경대는 혹은 최공대(崔公臺)라고 하는데, 황산역 서쪽 절벽 위에 있으며, 최치원이 놀고 즐기던 곳이다'라고 했고, 최치원과 김극기가 남긴 시를 실었습니다.

최치원의 시에

"연기 낀 봉우리 빽빽하고 물은 넓고 넓은데/ 물속에 비친 인가(人家) 푸른 봉우리에 마주섰네./ 어느 곳 외로운 돛대 바람 싣고 가노니/ 아득히 나는 저 새 날아간 자취 없네."

김극기의 시에

"맑은 강물 거울 같아 푸르고 또 넓은데/ 아득한 물 외로운 마을 어지러운 봉우리를 등졌네./ 고기잡이 노래 한 마디/ 푸른 버들 깊은 곳에 사람의 자취 없네."

옛사람의 시에 노래한 거울 같이 맑은 강물은 그저 옛말이 되었고, 지금은 탁류만 흐를 뿐입니다.

황산베리

이곳에서는 임경대에서 황산역에 이르는 비탈길을 일러 황산천(黃山遷; 황산베리) 또는 물금천(勿禁遷; 물고미잔로)이라고 합니다. 밀양 검세리의 까치비리와 함께 낙동강 하류의 대표적인 비리길이지요. 좁고 험하여 사고가 잦았는데, 이만도의 <양산군읍지>에 이르기를 "황산천은 군 서쪽 20리에 있으니 서울에서 동래까지 이르는 큰길이다. 험산을 깎아 아래로 낙동강을 굽어보면서 헤쳐나가는 험한 길이라 뾰족한 석각과 크고 험한 바위는 수레바퀴를 망가뜨리고, 말을 전폐케 하는 우환이 일어나기가 상사였다. 갑술년(1694)에 군수 권성구(權聖矩)가 중 탄해(坦海)와 별장 김효의(金孝義)를 시켜 재력을 모집하여 깊은 곳을 메우고 험한 곳은 깎아내어 거의 평탄한 도로를 만드니 행려자의 편익이 이에 더할 바 없어 그 공을 기리고저 비를 세워 사적을 기록하였다"고 전합니다. 아마 이 내용은 갑술년기사비를 채록하여 옮긴 것일 겁니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낙동강 가의 황산베리.

또 1739년에 군수 박규환(朴奎煥)이 밀양부사 임수적(任守迪)과 작원(鵲院) 황산(黃山) 등의 벼리길을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앞서 살펴 본 화제석교를 설치한 이듬해 일인데, 내용을 살펴보면 '갑술 후 42년 병진년(1736)에 군수 임진하가 중 학능(學能)에게 명하여 재원을 마련하게 하고 4년 뒤 기미년(1739)에 군수 박규환이 밀양부사 임수적과 힘을 합해 작원 황산 두 잔도를 고쳤다'고 했으니, 이것은 기미기사비의 내용을 참조한 것입니다. 이즈음에 군수 박규환이 두량하여 돌다리를 놓고 잔도를 수리하는 등 관도 보수작업이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공적에도 봉산(封山)의 송금(松禁)을 다스리지 못해 이듬해 물러납니다. <양산군읍지>에 수록된 내용으로 보아 잔도를 수리한 뒤 각각 내용을 적은 기사비를 세운 것으로 보이며, 이 책을 찬술할 때도 이 비석을 살펴 수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이 책에는 영조 24년(1748)에 이곳 잔도 상의 임경대 뒤에 성을 쌓으려 논의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이곳 지세가 험해 가히 천연의 성이라 할 만하니 이곳을 막아 적이 침입할 때 물길과 뭍길을 제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판서 민백상(閔百祥)이 안찰할 때 양산군수 권만(權萬)이 함께 임경대에 올라 둘러봤습니다. 그때 관방을 두기에 합당하니 축성하기로 하고, 마침 통신사 상사로 일본에 다녀오던 홍계희(洪啓禧)를 군수가 만나 둘러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축성의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되었으나 결국 쌓지는 못했습니다.

이곳 비리길은 옛 동래로(東萊路)에서 작원잔도와 새재 부근의 고갯길과 함께 가장 험한 곳이었습니다. 황산역을 나서면 바로 황산베리끝이라 불리는 황산잔도를 더듬어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김정한은 소설 <수라도>에서 "비록 서울로 빠지는 국도라고는 해도 그 당시의 '황산베리끝' 하면 좁기로 이름난 벼룻길로서…"라거나, "제사장을 보아서 머리에 이고 그놈의 베리끝을 돌아오자니, 언덕 위에 쌓였던 눈까지 휘몰아쳐 부치는 바람결에 인제 곱다시 얼어서 쓰러질 것만 같아서…"라고 황산잔도의 험한 도로 사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황산비리가 시작되는 곳에 정현덕(鄭顯德)의 공적을 기리는 불망비 한 기가 있습니다. 고종 8년(1871)에 세웠는데, 지금은 철로 구간에 포함되어 직접 살피기가 쉽지 않습니다.

황산잔로비(黃山棧路碑)

   
 

이 빗돌은 황산잔로가 시작되는 곳에 있었겠으나 지금은 용화사 대웅전 옆에 옮겨져 있습니다. 비제는 황산잔로비라 했으나, 마멸이 심한데다 이끼까지 덮여 있어 내용을 살피기는 어렵습니다. 황산잔로를 수리하고 사적을 적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세운 때는 <문화유적분포지도 -양산시->에는 도광 23년인 1843년이라 했습니다. 연호는 잘 파악되지 않으나 그 아래에 새긴 해는 33년이 분명하므로 도광 연간에 세웠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즈음 33년 이상 사용한 연호는 강희와 건륭뿐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빗돌에 새긴 것을 헤아릴 수 있는 내용이 이만도가 고쳐 쓴 <양산군읍지>에 실려 있습니다. 앞서 본 갑술년(1694)에 군수 권성구가 중 탄해와 별장 김효의를 시켜 깊은 곳을 메우고 험한 곳은 깎아 평탄한 도로를 만든 공을 기려 세운 바로 그것일 테지요. 이 책에서 갑술기사비라 한 것이 이 빗돌인데, 공사를 마치고 비를 세운 갑술년은 바로 강희(康熙) 33년이니 1694년에 이뤄진 역사(役事)임을 알 수 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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