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인정받은 독립운동] (4) 서분덕 씨를 도운 사람들

서분덕 씨는 하계업 씨와 관련된 자료를 있는 대로 모았다. 그런데 막상 하계업 씨 수용 관련 기록을 찾으려니 막막했다. 하계업 씨는 생전에 형무소에 있던 자료를 구하고자 일본에 수없이 진정서를 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남은 기록이 없다'였다.

"정식으로 재판을 받았으면 자료가 남았을 텐데 미결수로 있다가 보니 남아 있는 자료가 없다더라고요. 그래서 남편은 꼭 일본에 한 번 갔으면 했어요. 옛날 신문이라도 뒤지면 남아 있는 기록이 있으리라 생각했지요."

하계업 씨의 독립운동 공적을 증명하는데 큰 도움을 준 최규식 행정사. /김구연 기자

서분덕 씨는 국가보훈처를 찾아갔다. 홀로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서 내려 영등포에 있는 국가보훈처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그리고 담당자에게 남편 관련 기록과 증언을 정리한 글, 편지 등을 보여줬다. 나름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부족한 증거에 양식조차 갖추지 못한 서류로는 하계업 씨 공적을 증명할 수 없었다. 담당자를 설득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한 증거지 정성이 아니었다. 서분덕 씨 방문이 잦아지자 보다 못한 담당자는 보훈청에 있는 한 사무실로 그를 안내했다. 독립운동 유공을 인정해달라는 사람들이 제출한 자료를 모아놓은 방이었다. 방대한 자료를 본 서분덕 씨는 그만 좌절하고 만다.

"그 많은 자료를 보니 제가 가진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무리 와도 소용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포기하기로 했지요."

서분덕 씨는 눈물을 훔쳤다.

"모친이 준비한 자료를 보니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공무원들이 척 보면 알 수 있게 정리해야 하는데, 그런 양식이 전혀 없어요. 제가 또 그런 부분은 전문이거든요."

전직 경찰이었던 최규식 행정사는 지난해 12월 서분덕 씨를 만났다. 최규식 씨는 단박에 서류상 문제점을 짚어냈다.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서류를 정리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당연히 서분덕 씨는 몰랐던 요령이었다. 서류를 정리하고 나니 더욱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는 게 보였다. 하계업 씨 관련 문서면 문서, 증인이면 증인이 있어야 했다. 최규식 행정사는 하계업 씨 고향인 김해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모친이 50년 만에 고향을 갔나요? 한참 헤맸지요. 동네를 몇 바퀴 돌고 또 돌고 하면서 결국 증언해줄 사람을 찾았다는 거 아닙니까."

하계업 씨가 살아있을 때부터 30년 남짓 끌어오던 일이었다. 그 시간에 견주면 쏜살같은 일 처리 속도였다. 서분덕 씨는 오히려 너무 일 처리가 빨라서 의심이 들 정도였다.

"무슨 사기를 당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너무 일이 빠르게 진행돼서요. 오죽하면 유공자 확정이 됐는데도 믿지 못했겠습니까. 우리 자식들도 전혀 믿지 않았어요. 모두 행정사님 덕분이지요."

"아닙니다. 이게 다 모친 집념 덕분입니다. 제가 뭘 했다고…."

서분덕 씨와 최규식 씨는 정해놓은 대사처럼 같은 말을 여러 차례 주고받았다. 서분덕 씨 말대로 하계업 씨 공적을 증명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최규식 행정사였다. 그는 서류 만들고 증명하고 사람 찾고 하는 일은 경찰들이 가장 잘하는 일 아니냐며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하지만, 그 별것 아닌 일이 서분덕 씨에게는 너무나 어려웠고 그래서 한으로 남을 뻔했다. 어쨌거나 최규식 씨가 아니었다면 지난 30년은 분명히 허송세월이었다. 결과적으로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었기에, 그래서 남편에게 부끄럽지 않기에 서분덕 씨는 거듭 최규식 씨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그리고 창원보훈지청에 이세해 씨라고 있습니다. 그분이 자료를 찾아주지 않았다면 저는 다시 시작할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어찌나 친절하고 야무지게 일을 하시던지. 그분에게도 매우 고마워요."

창원보훈지청에 근무하는 이세해 씨는 지금 출산휴가 중이다. 그는 어렴풋이 서분덕 씨를 기억했다. "지난해 12월쯤 어르신이 유공자 신청을 하셨는데 자료가 없어서 곤란해 하셨어요. 그래서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공훈전자사료관을 검색해서 관련 자료를 찾아드렸어요. 그거 간단한 작업인데…. 제가 그렇게 감사받을 만한 일이 아니에요."

결정적 증언을 해준 안원호 씨도 있다. 안원호 씨는 하계업 씨가 형무소에서 나올 때 그를 부축했던 안상근 씨 아들이다. 안원호 씨는 아버지가 홋카이도 무로란시에서 강제노역을 당했던 일, 그곳에서 하계업 씨를 만났던 일, 하계업 씨가 격문을 써 붙인 일, 고문을 당해 반죽음이 된 하계업 씨를 부축했던 일, 하계업 씨가 탈출하고 대신 고문을 당했던 일 등을 정리해 사실확인서를 작성했다. 그는 서분덕 씨에게 사실확인서를 전하며 거듭 일이 잘 풀리기를 바란다고 격려했다.

"우리 행정사님, 그리고 이세해 씨, 안원호 씨에게는 제가 큰 빚을 졌습니다. 고맙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서분덕 씨가 또 울먹거렸다. <계속>

<30년 만에 인정받은 독립운동>
1. 영감, 이제 한이 좀 풀리시나요
2. 일본 강제노역장에 새긴 독립만세
3. 모진 고문 피해 탄광촌서 숨어지내
4. 30년 동안 못한 일 순식간에 해내
5. "저 같은 사람들이 어서 한을 풀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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