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21) 원동을 지나서 도자기 굽던 화제리까지

용당나룻가에 있던 가야진사를 지나 물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잡아드니 골마다 나루가 있던 원동입니다. 원동은 원이 있었음이 짐작되는 이름입니다.

-골마다 나루가 있던 마을

지금 원동역이 있는 원동에는 원포부곡(源浦部谷)이 있었으며, 전에는 원포역(源浦驛)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원동천이 낙동강에 드는 곳에 원포라는 나루가 있었음을 일러주는 이름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산군 고적에 '원포부곡이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옛날 원포역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역이 부곡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을 말해주는데, 역과 부곡은 규모나 신분이 비슷해 전환이 용이했습니다.

원포는 지금의 원동나루 즈음에 있었을 텐데, 예서 내를 거슬러 4km 정도 오르면 내포(內浦)가 있습니다. 이름이 내포인 것은 예까지 배가 드나들었다는 얘기일 터, 그래서 여기 내포원이 있었다고 앞 책 역원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배가 들 만큼 물이 많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양산군읍지> 교량에서 내포를 살펴보면 '산내의 물이 얕아 교량을 가설할 곳이 없어 보인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즈음 나루가 하구로 내려온 듯한데, 읍지보다 약간 앞서 만들어진 <대동여지도>도 내포진을 지금의 원동진에 그렸습니다. 내포교는 돌다리였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막기 위해 밀양부사 박진이 헐어버린 뒤 복구되지 않은 듯, <양산군읍지>를 쓴 이만도(李晩燾)가 찾았을 때도 원동 나루터 가운데 돌이 드러나 있다고 했습니다.

원동천이 낙동강에 드는 모습. 원동역이 있는 양산 원동에는 원포부곡, 그 전에는 원포역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최헌섭

내포 앞 내를 지금은 원동천이라 하지만 옛 이름은 배내입니다. 물이 성하던 시절 배티(배태고개=이치(梨峙)) 아래까지 배가 드나들었기에 붙은 이름이랍니다. 한자로는 이천(梨川) 포천(布川) 선천(船川) 등이지만, 모두 배내를 한자의 뜻을 빌려 쓴 것입니다. 원동을 지나 강가 비탈길을 따라 가면 삼정지 동남쪽에 김해 감로리와 오가는 감로나루가 있습니다. 예서 비탈길을 빠져 나가면 서룡리에 나루가 있던 시절을 일러 주는 배나리=주진(舟津) 마을이 있습니다.

주진에서 신주막을 돌아서면 원동에서 큰 마을인 화제리가 오봉산(五峰山) 자락 아래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산 곳인데, 화제초등학교 뒤에서 채집된 늦은 구석기시대의 몸돌이 근거입니다. 또 삼국~통일신라시대 질그릇이 흩어져 있는 곳이 여럿 있고, 고려시대 이래 자기를 구운 가마도 많습니다. 화제초교 뒤에는 일찍부터 녹청자(綠靑瓷) 요지(경남도 기념물 제195호)가 알려져 있는데, 이 가마터에서 몸돌이 채집됐습니다.

화제리 지라마을에는 분청사기 요지가 두 곳 알려져 있는데, 앞들 이름이 사기들일 정도로 가마의 범위가 넓습니다. 분청사기는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졌는데, 도자기전쟁이라고도 하는 이 전란을 거치면서 사라졌습니다. 그 뒤 한동안 자기 생산이 주춤했는데, 많은 도공이 일본으로 납치되고 생산시설까지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화제리에는 임진왜란 이후 재개된 백자요지가 두 곳이나 있고, 독점마을에는 독을 만든 가마가 있어 주목됩니다. 화제리 일원은 고려시대 이래 자기·독 생산이 집중된 곳이었습니다. 흙과 풍부한 땔감, 화자포(火者浦)를 통한 편리한 수운 등이 자기 생산에 적합했기 때문이겠습니다.

화제리는 이곳에 있던 화자포에서 비롯한 이름인데, 포구는 화제천 하구에 있었을 것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산군 교량에는 이곳에 화자교(火者橋)가 있다 했습니다. 그 때라면 흙다리였을 터, 다리가 있던 동네에 토교(土橋)라는 이름을 남겼습니다. 앞 책 토산에는 '쇠가 화자포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화자포가 있던 화제리 불메골에는 예전 쇠를 벼리던 쇠부리터가 있어 이 기록을 뒷받침합니다. 생산된 철은 화자포를 통해 바깥으로 전해졌을 겁니다.

화제리는 요산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의 배경지로도 유명합니다. 소설에 나오는 오봉산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산군 고적에 나오는 고장성(古長城)이 있습니다. 책은 '고장성이 황산강 동북쪽 언덕에 있으며, 흙과 돌을 섞어 쌓았다'고 했습니다만 실은 돌로 쌓은 성이 무너지고 그 위로 흙이 덮인 것입니다.

흙다리가 있던 화제에서 남쪽으로 잡아들면, 고운 최치원과 관련한 임경대가 나오는데, 예서 그곳으로 가려면 흙다리가 놓였던 화제천을 건너야 합니다. <해동지도>에는 이곳에 화제토교(火濟土橋)를 표시해 두었습니다. 흙다리는 없어지고 지금은 토교라는 이름만 남았습니다. 흙다리는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잘 허물어져 수시로 고쳐야 하는 폐단이 있었으니, 마침내 영조 때 돌다리로 고쳐 쌓습니다. 그 기념비가 토교마을의 양산화제석교비(梁山花濟石橋碑)입니다.

-양산화제석교비(梁山花濟石橋碑)

경부선 철도 아래쪽에 유실돼 있던 것을 수자원공사 건물을 지을 때 발견해 다리 곁에 뒀다가 이곳에 도로가 나면서 마을 안으로 옮겼습니다. 이때 비면이 훼손돼 내용을 헤아리기 어렵게 됐습니다. 또 급하게 옮긴다고 그랬는지 비가 돌아서 있습니다. 비석에는 석교의 이름과 위치, 세운 내력과 동원된 마을, 시주자와 감역한 관리들 이름이 나와 있어 당시 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화자로 불리던 마을이 이때는 화제였음도 빗돌에서 알 수 있습니다.

비석은 이 화제석교가 황산도(黃山道) 나아가 제4로(동래로)상의 관로(官路)를 잇는 다리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깨져나간 글자가 있지만 내용은 살필 수 있습니다. '다리는 군의 서쪽 화제에 있는데 이는 관로의 중요한 자리다. …흙과 나무를 모아 완성했으나 큰 비를 만나면 붕괴돼 비록 바쁜 농사철이라도 갑작스레 보수해야 하니 백성들이 매우 번거롭게 생각했다. (새로 온 누군가가 그것을 고치고자 하니 백성들이 마음으로 기뻐해 몇 년을 두루 정사를 베풀다) 지주 박공에게 시켜서 두 사람을 감동(監董)을 맡기고 돌을 잘라서 깎았다. 마침 방백인 이공께서 순행하다 보시고 곡물을 내어 도우셨다. 공사가 끝나고 보고하니 그 완전하고 치밀함이 나중에 번거로운 일이 없게 되었다. 길손들이 축하하며 말하기를 '양산 서쪽 백성들은 노역의 고통이 없게 됐으니 이 아름다운 일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 했습니다. 이때 공역에 참석한 여덟 동네는 이천·내포·범서·화제·증산·범어·별양·어곡리 등이고, 세운 때는 영조 15년(건륭乾隆 4. 1739) 기미 삼월입니다. 오늘은 예서 여정을 마감합니다. 독자 여러분 즐거운 한가위 맞으시기 바랍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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