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인정받은 독립운동] (2) 하계업 씨

기록에 남은 하계업(1925~1990·사진) 씨 원적은 '경남 김해군 김해읍 조일정 67'로 돼 있다. 아버지 하태원 씨는 한학을 가르치는 훈장이었다. 하계업 씨는 6살 때부터 2년 동안 아버지가 운영하는 서당에서 배웠다. 1933년 8살이 되던 해 김해 동광초등학교에 입학해 1939년에 졸업하고 그해 김해고등소학교에 들어간다. 그리고 1941년 졸업하고 나서 집에서 농사를 짓는다. 지금으로 따지면 중학교 학력이다.

1942년 12월, 17세 소년 하계업도 청년기를 앞둔 여느 사내처럼 강제 동원령을 피하지 못했다.

   
 

아버지 하태원 씨는 엄혹하고 거대한 힘 앞에서 무력했다. 나라 잃은 설움이었다. 소년은 북으로, 북으로 향했다. 소년이 도착한 곳은 홋카이도(北海道) 무로란(室蘭)시에 있는 영서제철소였다. 남쪽 지방 겨울이라고 만만했던 적이 없는 소년에게 북해도 추위는 더욱 낯설고 훨씬 사나웠다. 노동력이라고 끌려왔지만 여위고 허약한 소년일 뿐이었다. 홋카이도에 주재하는 한 검사의 아내는 멀리서 끌려온 소년을 보자 누비옷을 건넸다. 연민이었고 소년이 그곳에서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사람대접이었다.

식민지에서 끌고 온 노동력에 허락된 여유는 없었다. 몸도 마음도 혹독하게 몰아붙였고 그것은 어른이라고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소년 계업은 3개월 만에 미래가 없음을 감지한다. 사는 고통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혹독한 현실 속에서 소년은 이상하리만큼 머릿속만 맑아졌다. 1943년 3월 어느 날, 소년은 머릿속에 떠오른 글귀를 숙소와 숙소에 있는 화장실벽에 휘갈겼다.

'조선독립 만세', '이 한세상 인간은 고생하는가', '조선군인 많이 만들라 조선독립 만세', '반도청년 만세'.

사는 게 덧없는 만큼 계업은 거침 없었다. 격한 글귀를 내뱉은 결과는 당연히 구속이었다. 소년은 무로란 경찰서에 갇힌다. 소년에게 적용한 혐의는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격문을 써 독립 계책을 선동했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이후 계업은 무로란 검사국을 거쳐 삿포로(札幌) 형무소로 옮겨진다. 1943년 형무소에 갇힌 조선인, 더군다나 '치안유지법'을 어긴 조선인이 받을 대접은 뻔했다. 소년이라고 그런 대접을 비켜갈 수 없었다. 모진 고문이 시작됐다.

서분덕 씨는 1951년 하계업 씨와 결혼했다. 서분덕 씨는 23세, 하계업 씨는 27세였다. 소년 시절 일본에서 고생했던 얘기를 하계업 씨가 꺼낸 것은 결혼하고 한참 지나서였다. 하계업 씨는 생전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를 고대했다.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일본 외교관, 무로란 경찰서·검사국 등에 편지를 보냈다. 수감 기록이 있다면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무심한 답만 돌아왔다.

"제가 외동딸이어서 고등교육을 받았어요. 일본말이나 글을 곧잘 했지요. 남편은 저와 꼭 일본에 한 번 가기를 원했어요. 그곳에서 수감 기록만 찾으면 쉽게 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무로란 시를 가면 어떤 기록이라도 남아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다못해 수감자 관련 보도가 나온 신문 조각이라도 찾을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하계업 씨는 끝내 일본을 가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일본 한번 가고 싶다'는 하계업 씨 말은 서분덕 씨 가슴에 못이 됐다.

매질은 끝이 없었다. 어른이라면 더했을지 모르겠지만 소년이라고 봐줄 리 없는 매질이었다. 계업을 고문하던 이들은 배후를 대라며 다그쳤다. 소년이 휘갈긴 글이라고 보기에는 정연하다는 게 이유였다. 남들보다 좀 더 배웠고 오기는 있되 배후는 몰랐던 소년은 할 말이 없었다. 원하는 답은 없고 비명만 내뱉는 소년에게 고문은 더해졌다.

매질보다 혹독한 것은 물고문이었다. 매질이 덜해서가 아니라 물고문이 더욱 가혹했다. 매질보다 더한 고통은 없으리라 여겼던 계업이 더한 고통을 깨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홋카이도에서 물고문이 혹독한 이유는 가쁜 호흡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곳 냉기를 고스란히 품은 채 몸에 뿌려지는 물이 안기는 고통은 어떤 매질보다 고약했다. 계업에게 물벼락은 매질보다 아팠다. 머리가 처박히며 호흡이 곤란해져 생긴 고통은 다음이었다. 하계업 씨는 고국에 돌아와 결혼하고 나서 세상을 등질 때까지 물고문에 대한 기억에 간혹 몸서리치곤 했다. <계속>

<30년 만에 인정받은 독립운동>
1. 영감, 이제 한이 좀 풀리시나요
2. 일본 강제노역장에 새긴 독립만세
3. 모진 고문 피해 탄광촌서 숨어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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