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의 영국에서 본 한국] (8) 더불어 사는 길, 착한 소비와 공정무역

'세계화와 이민'이란 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한 교수가 특강을 한 적이 있다. 워낙 그 분야의 태두로 알려진데다 미리 배포된 강의 요약 내용이 아주 흥미로워 제법 많은 학생들이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제목 또한 범상치 않아 '상추 싸게 먹을 수 있어 행복합니까?'란 것이었다. 내용인즉슨, 슈퍼마켓에서 대단히 싼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상추(또는 '상추'로 대표되는 각종 채소) 이면엔 아프리카에서 목숨 걸고 유럽에 상륙한 불법이민자들의 설움과 애환이 숨어있으니 무조건 싸게 먹을 수 있다고 행복해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특강의 시작은 세계화의 본질과 어두운 그늘에 대한 지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세계화란 단지 자본 사이의 장벽을 없앤 것에 불과하며 노동력의 이동은 갈수록 견고해지고 높아져만 가는 국경 앞에 원천적으로 차단될 수밖에 없으니 그 와중에 각종 불법, 탈법 착취가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살인적 기아와 질병의 공포 속에 유럽으로 탈출한 불법 이민자들의 약점을 전문 브로커들이 악용해 영국으로 몰래 잠입시켜 대형 농장에 취업을 시키는데 그 과정 속에 법이 정한 최저임금(2010년 기준 5.93파운드, 우리돈으로 약 1만 1000원 정도)이 지불되는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사회에도 공정무역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사진은 공정무역 캠페인 모습. /뉴시스

이어서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오기 위해 도로에서 몰래 트레일러 뒤에 올라타다 벌어지는 목숨 건 사투, 그 속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게 된 수많은 이민자들의 서글픈 사연을 소개하며 유럽 사회 전반의 반인권적 행태에 분노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말미에 제시된 결론은 크게 두 방향이었는데 하나는 정부를 향한 경고였고 나머지 하나는 소비자를 향한 호소였다. 정부는 조금이라도 저렴한 상품을 구입하고 싶어하는 시민들의 요구에만 부응해 모르는 척 눈감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각지에서 자행되고 있는 불법, 탈법 행위 근절을 위해 강력한 대응책을 만들어야 하며 시민들 또한 근원적 양심에 기대 무조건 싸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그 '비정상적' 가격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철저히 따져보는 '착한 소비'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특강 후반에 진행된 질의 응답 시간은 뜨거웠다. 하지만 논의의 방향은 일치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이중 잣대가 아니라 보편적 가치에 기댄 착한 소비, 공정 무역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민이란 부분은 단지 신체와 주거지의 이동이란 차원이 아닌 인권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유럽 각국이 취하고 있는 반이민 정책의 일방성과 무책임성 그리고 반인권적 측면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남이 아닌 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질타와 반성이라 더욱 인상 깊었다.

몇달이 지난 후, 특강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우 흥미로운 '사건' 하나와 조우하게 됐다. 대형마트에서 기획한 특가 판매와 관련된 '작은 파동'이 그것이었는데 출발지점은 영국 최대의 슈퍼마켓 체인 '테스코'의 와인 코너였다. 일반적으로 영국 마트에서 판매하는 와인의 최저가는 대략 한 병에 3.33파운드, 우리돈으로 약 6000원 정도였다. 세 병에 10파운드로 묶어 파는 전략이 일반적이었고 그 어떤 마트나 소비자도 그 이하의 가격을 기대하지 않는 일종의 심리적 마지노 선이 그 수준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테스코에서 5000원도 안되는 2.5파운드에 와인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상품은 예외없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생산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사달이 났으니 소비자 단체에서 강력한 이의제기를 한 것이다. 항의가 빗발쳤다. 내용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의혹 일색이었으니 대체 포도를 따고 와인을 만드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얼마나 쥐어짰기에 이리도 터무니없는 가격에 와인을 판매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경쟁 마트도 아닌 소비자 단체에서 그와 같은 조직적 항의를 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반가웠다. 결국 불과 하루만에 특가 판매는 중지됐고 모든 남아공 와인은 '정상가'를 되찾았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딸 아이는 귀국한 지 8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틈만 나면 전형적인 영국 억양으로 '잇츠 놋 페어!'(It's not fair!, 그것 불공정해!)를 외친다. 엄마 아빠는 마음대로 TV를 보면서 자기는 그렇지 못한 것에도, 밤 9시만 되면 잠이 오지 않아도 서둘러 잠자리로 밀어 넣는 엄마를 향해서도 늘 '공정'하기를 강조한다. 그럴 때마다 작은 토론이 벌어지기 일쑤다. 물론 논리와 윽박지름으로 무장한 부모 앞에 승복과 굴복의 한 지점을 택할 수밖에 없는 아이는 늘 씁쓸한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조금이라도 불공정한 것들에 쉼없이 이의제기를 하는 아이가 대견해 돌아서 미소짓곤 한다.

얼마 전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다 질문을 받았다. '아빠, 공정무역이 뭐야?'.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가운데 하나가 어려운 뭔가를 짧고 쉽게 설명하는 것이라 했던가.

   
 

땀 뻘뻘 흘리며 열심히 이것저것 동원해 설명하는데 아이가 한마디로 정리한다. '그거 착하게 물건 사는 거네'. 계면쩍어 헛웃음 치며 누군가 했다는 아주 멋진 말을 떠올렸다. '공정함이란 태도가 아니다. 끊임없이 개발되고 연습되어야 할 전문적 기술이다'. 그리고 공정무역 전문 사이트에 들어가 초콜릿 몇 개를 주문했다. 오늘쯤 도착할 때가 됐는데 좋아할 아이의 미소가 기대된다.

/김갑수(방송인·영국 셰필드대학 정치학 석사)

<김갑수의 영국에서 본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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