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20) 황산강가의 가야진을 지나

지난 여정에서는 낙동강가의 가장 거친 길인 까치비리(작천: 鵲遷)를 지났고, 오늘은 강이 실어 나른 질감 좋은 모래 둔치를 따라 걷습니다. 이제 낙동강 문화 탐사가 하구에 가까워져가니 강 이름은 황산강(黃山江)으로 바뀌면서 양산 고을에 듭니다. 이곳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낙동강의 옛 이름으로 실린 황산강(황산하)이 태동한 곳이며, 가야가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영토를 다투었던 역사의 현장입니다.

-황산강(黃山江)

옛적에는 지금 양산 땅에 드는 낙동강 하류를 황산강이라 했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가야의 영역을 설명하는 부분에 동쪽은 황산강(黃山江)으로 경계를 삼는다고 한 기사에 처음 나옵니다. 삼국시대에는 황산강을 사이에 두고 신라와 가야가 영토를 다투었으니,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나오는 황산진(黃山津) 전투가 그 예입니다. 기년상의 문제가 있긴 하나 탈해이사금 21년(77) 8월에 아찬 길문이 가야병과 황산진 들머리에서 싸워 1천여 급을 거두었다고 했습니다. 지마이사금 4년(115)에는 가야가 남쪽 변경을 약탈하니 7월에 친히 가야를 치러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를 건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미추이사금 3년(264) 3월에는 왕이 황산(黃山)에 거둥하여 나이든 자와 가난한 자 및 자존할 수 없는 자를 물어 진휼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임경대 뒤에서 본 황산강 상류. 가야진과 용당나루도 보인다. /최헌섭

이 사례에서 황산은 지금의 양산 물금 일대를 이르는 지역 명칭으로 사용되었고, 이곳과 붙어 흐르는 강을 황산강 또는 황산하라 했으며, 그곳에 있던 나루를 황산진이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도 그렇듯 황산강이 낙동강 전체를 이르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고려사> 지리에 나오는 대로 가야진에서 낙동강 하구까지를 황산강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 지리 양주(梁州)에는 가야진과 더불어 황산강이 나옵니다. 그 협주에 무안의 용진(龍津), 광양의 섬진(蟾津)과 더불어 거꾸로 흐르는 3대강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지리적으로 서남해와 남해로 하구를 두고 있는 강이 만조 때 역류하는 것을 그리 보았을 것이니, 침강해안으로 하구를 두고 있는 강이라면 어디 이 세 강만 그랬겠습니까.

-가야진(伽耶津)

가야진(伽耶津)은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낙동강가에 있던 나루입니다. <태종실록> 14년(1414) 8월 21일 기사에 예조에서 산천 제사를 규정할 때 "<당서> 예악지의 옛 제도에 따라 중사(中祀)가 되었다"고 실려 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3년(1421) 4월 13일 기사에 "용이 경상도 가야진에 나타났다"고 나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큰 하천이 가야진과 가야진 연연(衍淵)이라 했고, 그 협주에 '가야진은 군 서쪽 33리에 있다. 속칭은 옥지연(玉池淵)인데, 신룡(神龍)이 있다는 곳으로, 해마다 봄 가을에 향촉을 내려 제사를 지낸다. 중사이다. 이 임금 3년에 붉은 용이 진 가운데 나타났었다"고 했습니다. <동국여지승람> 양산 산천에는 위의 내용을 추려 실었고, 다만 그 위치를 고을 서쪽 40리 황산강 상류에 있다고 한 것이 다릅니다. 가야진사는 가야진에 있던 사당이니 둘이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은 합당하다 할 것입니다. <해동지도>에는 이곳에 두 채의 건물을 그리고 가야진단(伽耶津壇)이라 적었습니다. 가야진은 달리 옥지연이라고도 하며, 가뭄에 하늘에 비를 빌던 곳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가야진을 일러 신라가 가야를 정벌할 때 전진 기지가 되었던 나루라 하는 데 대해서는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양산군수를 지낸 이연상(李淵相)이 1832년 무렵 찬술한 <양산군읍지> 사묘에서 "가야진은 신라가 가야국을 칠 때 오갔던 나루다"고 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1878년에 <양산군읍지>를 수정한 이만도(李晩燾)의 지적처럼 고려 때 가야진연소(伽耶津淵所)로 불렸던 적석용당(赤石龍堂)을 가야를 치러 가던 길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는 이 책에서 "가야진은 신라가 가야를 칠 때 오간 나루라 했지만 지형을 헤아려 보면, 군사가 나아갈 때는 마땅히 평탄한 길로 움직이는데 계림에서 가락국으로 이를 때 이 적석용당의 평탄한 길을 버리고 어찌 옥지용당(玉池龍堂)의 협로로 움직였겠는가"라 했으니 타당한 지적입니다.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가락국으로 이르는 길은 일찍이 양산구조곡을 따라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경주로 가 본 사람이라면, 기복도 없고 직선으로 열린 이 길을 두고 경산~청도~밀양을 거쳐 낙동강 비탈을 에돌아 어렵게 용당나루에서 김해로 건널 이유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이 나루가 가야진이라 불린 까닭은 남강이 낙동강에 드는 곳에 있는 <고려사>의 가야진명소(伽耶津溟所)와 <해동지도>의 가야탄(加倻灘)의 용례와 더불어 달리 찾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이곳에는 1965년 비석골에서 옮겨 세운 가야진사(伽耶津祠)가 있습니다. 이 사당에는 용당나루의 전설을 바탕으로 세 용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한 마리의 황룡과 두 마리의 청룡인데, 청룡은 황룡의 처와 첩입니다. 전설에는 첩을 시기한 처가 사자(使者)에게 첩을 죽이도록 부탁했는데 겁에 질린 사자가 엉겁결에 황룡을 죽이는 사단이 생겨서 용신제를 통해 억울하게 죽은 황룡의 넋을 달래어 비를 얻고 안녕을 구한다고 합니다. 원래 이곳에는 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지내는 춘추제향과 가물 때 지내는 무제가 있었으나 지금은 3월 첫 정일에만 지냅니다. 나라에서 무제를 지낸 기록은 <중종실록> 11년(1516) 4월 17일 기사에 나옵니다. 나라에 큰 가뭄이 들어 종묘와 사직에 제사하여 비를 빌게 하고, 향을 내려 팔도의 4악(岳) 3해(海) 7독(瀆)의 신에게 비를 빌었습니다. 또한 <성종실록> 25년(1494) 12월 23일 기사에는 이곳 가야진을 포함한 명산대천에 국왕의 쾌차를 빌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 왕은 종기로 몸져누워 있었는데, 왕대비전에서 그러도록 했으나 결국 다음 날 대조전에서 붕어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역사성을 지닌 가야진사는 4대강 사업 구역에 포함되어 지난해 발굴조사를 거쳤습니다. 이 조사에서 지금의 사당 앞터에서 옛 사당 터로 헤아려지는 고려~조선시대의 건물지가 드러났습니다. 이 가운데 한 곳에서는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져 의식에 사용되었던 분청사기로 된 제기가 발굴되어 가야진사의 옛터임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런 발굴 성과에 힘입어 원래 강쪽으로 100m 정도 이전 복원할 예정이던 가야진사는 지금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보존의 가닥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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