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19) 작원관에 들다

지난호에는 삼랑진의 낙동강 둔치에 열린 동래로(속칭 영남대로)를 따라 걸으며 처자다리와 중다리를 살펴봤습니다. 처자다리는 묻힌 지 삼십여 년만에 쌍무지개 다리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행곡천 하구 중다리(작원대교)는 존재조차 파악되지 않은 실정입니다. 이번 4대강 사업 관련 문화재조사에서 일제강점기에 제작한 지형도나 지적도에서 동래로 노선을 파악해 이 다리에 대한 조사도 병행했더라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오늘(24일)은 검세리에서 양산 경계에 이르는 구간을 걷고자 낙동강에 나섰습니다만,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고 안개가 낀 듯 시정이 맑지 못합니다. 이 구간은 낙동강 공격사면이라 전통시대는 바위 벼랑을 깎아 비리길을 내어 겨우 내왕했는데, 그나마 20세기 초 철로를 개설하면서 그 길을 덮어 쓰는 바람에 지금은 걸을 수 없는 길이 됐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자료는 2009년에 조사한 바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

20세기 초 철로가 놓이면서 길의 흔적 대부분이 사라져버린 동래로(영남대로) 일부 구간인 작원잔도의 현재 모습. /최헌섭

◇작원잔도(鵲院棧道) = 옛길은 낙동강 둔치에서 행곡천에 놓인 중다리(작원대교비)를 건너 검세리 작원마을로 듭니다. 지금은 행곡천에 놓였던 다리가 없어져 작은검세마을 앞으로 돌아야 합니다. 검세리 작원마을과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하주막 사이에는 작원잔도(鵲院棧道) 혹은 작천(鵲遷 : 까치비리)이라는 험한 벼랑길(비리길)이 있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작원의 남쪽으로 5~6리를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가 있어 매우 위험한데, 그 한 굽이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으므로 내려다보면 천 길의 연못인데 물빛이 푸르고,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 예전에 한 수령이 떨어져 물에 빠진 까닭에 지금까지 원추암(員墜岩)이라 한다'고 했고, <대동지지>에는 잔도위험(棧道危險)이라 부기했을 정도로 험한 길이었습니다.

언제 잔도가 개설됐는지 현재 자료로는 고증하기 어렵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잔도 기록이 나오므로 책이 편찬된 1481년 이전에 개설된 것은 분명합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전국적으로 22역도가 설치된 고려 현종 때(1009~1031) 금주도에 속한 황산역과 무흘역을 잇는 역도가 열려 있었을 터이므로 이 때로 시기를 올려 잡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현재로서는 이보다 더 자세한 검증은 어렵습니다.

조선시대에 작원잔도를 고친 기사는 더러 보입니다. <밀주승람>에는 조선 현종 때(1659~1674) 사응(思應)이라는 이곳 승려가 주민들과 상의해 돌을 깎아 잔도를 넓히고 사람들이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잔도를 만드는 일을 주관하였다고 전합니다. 이때 죽파 이이정(李而禎)이 작원잔도수치보권문(鵲院棧道修治普勸文)을 지어 불가와 유가에서 재물을 합하여 동남의 요로를 넓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공사에 협조할 것을 권하였다고 전합니다. <양산읍지초>에는 '기미년(1739)에 군수 박규환(朴奎煥)이 밀양부사 임수적(林守迪)과 힘을 합해 작원(鵲院) 황산(黃山) 두 잔도를 고쳤다'고 나옵니다.

조선 후기 현종~영조 연간에 작원잔도를 비롯하여 양산 물금의 황산잔도 수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작원관(鵲院關) = 작원잔도는 문 하나로도 길을 막을 수 있을 만치 지세가 험해 한남문을 두어 남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았다고 합니다. 이런 지리(地利)를 살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한 격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기사에서 그때 전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동래를 함락시킨 왜적이 밀양으로 북상하자 부사 박진(朴晉)은 작원의 잔교(棧橋)를 차지하고 왜적을 여러날 저지했습니다.

그러나 양산을 함락시킨 적이 우회해 뒤에서 치니 패해 흩어졌습니다. 이때 박진은 부의 창고를 불사르고 퇴각했습니다. 이를 두고 후일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퇴각 이후의 행적은 <선조실록> 25년 6월 28일 기사에 있습니다. 박진은 가족을 피란시킨 뒤 정예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하루도 갑옷을 벗지 않고 싸우면서 왜적의 형세를 살펴 신속히 통보하니 조정에서는 이로써 적의 실상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그의 퇴각은 도주가 아니라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작전상 후퇴였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이곳 작원잔도는 경부선 철도 개설로 완전히 소멸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리하여 영남대로를 걷는 이들이 위험천만하게도 철도를 따라 옛길 걷기를 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조사한 바로는 양산과 밀양 경계 지점에 바위를 깎고 돌을 쌓아 만든 잔도가 남아 있었습니다. 검세리 작원에서 양산 하주막 마을 사이에 잔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영남대로 일천리>도 잔도의 흔적을 언급하고 있고, 작원마을 주민도 지금의 철도 아래로 옛길 흔적이 있다고 일러줍니다. 최근 발굴된 쌍무지개다리도 분명 중요한 문화재지만, 이렇듯 지상에 자기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잔도(비리길)도 반드시 재평가돼야 합니다.

잔도의 한쪽 끝인 양산 쪽 터널 입구에는 경부선 철로 개설 당시 세운 것으로 보이는 작원관수도(鵲院關隧道)라 새긴 표지석이 있습니다. 수도(隧道)는 터널(=굴길)을 이르는 일본식 한자어입니다. 표지석 뒤에는 당시 거기에 이름을 올렸던 사람들의 후손이 그랬는지 이름을 지워버렸습니다.

예전에는 작원관(鵲院關)이 있어 유사시는 적을 방어했고, 평시는 길손을 기찰(譏察)하기도 했습니다. 작원관 자리를 <해동지도>는 방수처(防守處)라고 적어 뒀습니다만, 작원관을 둔 때를 전하는 기록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부사 박진이 왜적을 막던 상황을 묘사한 <선조수정실록>에도 '박진이 작원강(鵲院江)의 잔교(棧橋)를 지켰는데'라 했을 뿐, 작원관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아직 이 때는 관문을 두지 않은 듯합니다.

<밀주승람>에 '임진왜란 뒤에 부의 사람들이 원문(院門)을 쌓고 한남을 편액으로 삼았다'고 한 데서 작원관은 임진왜란을 교훈 삼아 그 뒤에 만들었다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문의 이름을 남쪽을 막는다는 의미의 한남으로 지었던 것일 테지요.

이때 만든 한남문은 일제강점기에도 원래의 자리에서 약간 옮겨져 있었지만 1936년 7월 대홍수에 쓸렸고, 1939년 그 자리에 작원관문기지비(鵲院關門基址碑)를 세웠다가 지금은 새로 지은 작원관에 옮겨 두었습니다. 지금의 작원관은 1995년에 밀양시에서 원래보다 1.2km 정도 북서쪽 평지에 세운 것입니다. 작원관을 새로 지으면서 작원과 관련되는 빗돌들을 모았고, 임진왜란 당시 작원잔교 전투에서 희생된 영령을 기리는 전적기념비와 위령비를 같이 세웠습니다. 이런 까닭에 지난호에서 살펴본 작원진석교비와 작원대교비가 이곳에 모여 있게 된 것입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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