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소재 같지만 용도·가격에서 전혀 다른 제품 인식

알록달록, 첨벙첨벙. 올해는 유난히 장마가 길었다. 그 때문인지 아닌지, 올 장마엔 새로운 풍경이 있다.

젊은 여성들이 너도나도 장화를 신기 시작한 것. 그런데 이 장화의 정체가 오묘하다. '장화'라고 부르면 안 된단다. '레인부츠'다. 이제 장화와 레인부츠는 고무라는 같은 '출신'을 등지고 다른 길을 가게 됐다.

레인부츠 유행을 선도한 H브랜드, R브랜드 모두 '비의 나라' 영국에서 물 건너왔다. H브랜드는 10만 원 후반대에서 30만 원 안쪽의 제품이 많고, R브랜드는 7만 원에서 10만 원 사이 제품이 다수다.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브랜드의 레인부츠는 40만 원에서 70만 원 정도. 유행의 과정은 늘 그렇듯 비슷하다.

올여름 레인부츠가 유행하는 가운데 여성 고객들이 대형마트를 찾아 제품을 고르고 있다. /뉴시스

① 할리우드 스타들이 한 아이템을 착용한 파파라치 사진들이 인터넷상에 퍼진다. ② 그 아이템의 브랜드가 사람들에게 고급스럽고 '스타일리시'한 이미지로 각인된다. ③ 한국 연예인들도 같은 아이템을 착용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인터넷과 방송에서 그 모습을 본다. ④ 그 아이템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소수에서 다수가 된다. ⑤ 비슷한 제품들이 다른 브랜드나 보세 제품 할 것 없이 쏟아진다. '어그부츠'가 유행한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유미나(가명·26) 씨도 그랬다. 레인부츠가 대중적이지 않던 작년에는 레인부츠 신은 사람을 봤을 때 "저렇게 장화를 신고 다니기도 하는구나!" 정도로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그러다가 국내 연예인들이 레인부츠를 신고 있는 모습을 여럿 보니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래도 연예인이니까 저런 느낌이 날 것"이라고만 여겼다. 그러다 올여름 많은 사람들이 레인부츠를 신고 길을 지나는 걸 보게 된 후로는 "예쁘고 실용적으로 보인다. 나도 갖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바뀌게 됐다.

◇실용성, 기분전환용, 각선미…유행하는 '레인부츠' = 레인부츠의 장점으로는 세 가지 정도가 꼽힌다. 첫 번째는 실용성. 신발과 발이 비를 안전하게 피할 수 있다는 당연한 장점. 하지만 이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박지윤(가명·37) 씨는 작년에 H브랜드 제품을 구입했다. 그런데 올해는 레인부츠를 거의 신지 않았다. 이유는 "긴 바지를 부츠에 넣어 입으면 덥고 불편해서 반바지나 치마에 맞춰 입어야만 하는 제약"이 있고, "꼭 면양말을 안에 챙겨 신어줘야 하는 불편함" 때문이다. 또 "회사에 신고 가기가 애매하다"며 그는 레인부츠가 "20대는 돈이 없어서 못 사고, 우리한테는(30대에게는) 실용성이 없는" 것이라 말했다.

최신 트렌드인 레인부츠 홍보 사진. /뉴시스

오히려 레인부츠의 장점은 비오는 날, 경쾌하고 발랄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기분 전환용'에 있다. 레인부츠를 구입했다는 한 블로거는 "비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레인부츠를 산 이후로 비오는 날이 기다려진다"고 했다. 레인부츠가 찜찜하고 무더운 장마를 기분좋게 보낼 수 있게 해주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멋'이다. 그런데 이 멋은 '몸매'와 관련이 컸다. 여러 언론은 '스타들의 장마철 패션', '레인부츠 신은 스타 각선미 베스트' 등의 아이템으로 연예인들의 사진과 '각선미', '긴 다리' 등을 연결시킨 내용을 많이 실었다.

브랜드 이미지는 레인부츠에서 '조금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냥 장화'와의 차별성이 무너지면 레인부츠 입장이 곤란해질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W수입대행 사이트의 H레인부츠 상품 설명에 "로고 디테일이 돋보입니다"가 첨부되는 이유다.

H브랜드와 함께 레인부츠로 유명한 R브랜드는 록 페스티벌 등의 "유럽 젊은이들의 여가에 타깃"을 맞추고 "영국 상류층의 컨트리 사이드 라이프"를 표방하고 있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록 페스티벌에서 레인부츠에 진흙을 묻히고 신나게 노는 모습의 사진들도 유행을 북돋는데 한몫을 했다. '자유로움'이라는 이미지가 레인부츠에 스며들어 있다.

◇빨간색, 파란색, 흰색 그리고 레몬색…발전하는 '장화' = 진짜 '오리지널' 장화의 진가를 제대로 느끼려면 사실 갈 곳은 정해져 있다. 노량진 수산 시장. 이곳은 매일같이 장마의 홍수다. 생선들이 첨벙대고 수백 개의 장화 위로 시원하고 비릿한 물이 쏟아져 내린다.

나름 패션 코드도 있다. 사실 좀 '뻔하긴' 하다. 아주머니들은 빨간색. 아저씨들은 파란색. 가끔 흰색 장화를 신은 아저씨도 있다. 오래 신은 것인지 빛이 바래서 장화가 레몬색이 됐다. 대부분 상인들은 정강이 정도까지 오는 장화를 신는데, 한 아저씨는 무릎 밑까지 오늘 긴 장화를 신고서 손님을 끈다. 얼핏보면 유행하는 레인부츠와 비슷해 보인다. 가장 특별한 장화를 신은 아주머니의 것은 꽃무늬였다. '플로럴' 무늬라고 하면 더 멋질까? 그는 꽃무늬 장화를 신은 채 총총걸음으로 퇴근했다.

20년간 수산시장에서 생선들과 씨름하며 살아온 김종태(가명·46) 아저씨에게 "아저씨도 저런 화려한 장화(꽃무늬)를 신어보라"고 권했다. 아저씨는 "에이, 저런 건 내 사이즈도 없다"고 했다. "사이즈가 있으면 신으실 거냐"고 집요하게 의사를 묻자, "남자가 무슨, 우리 남자들은 무난한 거(파란색) 좋아한다"며 단호히 제안을 거절했다.

20년간 장화를 신었다는 노량진 수산시장 아저씨.

상인들은 '장화가 궁금해 시장에 왔다'는 말에 '별걸 다 궁금해한다'는 반응이었다. "아이, 우리는 당연히 작업하려고 신는 거지. 이거 안 신고 어떻게 일해"라고 무심하게 말한 아주머니는 그래도 장화에 대해 잘 설명해 주려 애를 썼다. 시원스럽게 물 한 바가지를 빨간 장화 위로 '촤악' 들이부었다. 장화의 '실용성'은 이런 것이라고.

종태 아저씨는 예전 장화보다 요즘 장화가 더 편하고 튼튼하게 "발전했다"고 말한다. 아저씨의 장화는 1만3000원. 3개월에 한 번씩 새것으로 바꾼다. 예전에 시장에서 신던 장화는 뒷굽이 높아서 "아가씨들 힐 신으면 발 아픈 것처럼 오래 신으면 발이 아팠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장화 밑은 낮은 찰고무로 바뀌었다. 찰고무 덕에 조금은 발이 편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장화를 신고 일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 제일 큰 걱정거리는 습진과 무좀이다. 아저씨는 장화를 신은 채로 하루 15시간 꼬박 일한다. 발 관리가 필요하다. 이것이 레인부츠와 장화의 '공통점'. 레인부츠가 유행한 후 부츠 안 세균과 무좀을 우려하는 기사들이 많이 나왔다.

아저씨네 가게에서 회 뜨는 일을 도맡아 하는 유호진(가명) 씨는 장화가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그에겐 장화가 고된 노동의 상징일 테니 그럴 만도 할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는 젊은 여성들에게 요즘 장화가 유행인 것이 이해가 잘 안 된단다. 40년 동안 장화를 신었다는 '노량진의 산증인' 횟집 아저씨는 장화에 대해 길게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삶"이라는 말로 40년 이야기를 대신했다.

어떤 이에게는 패션, 고급스러움, 기분전환이 되어주고, 어떤 이에게는 지긋지긋한, 하지만 삶의 전부가 돼버린 '애증'의 부부 같은 존재. 물을 막아줘서 고맙지만, 덥고 습해서 미운 이 '고무 덩어리'들은 이름도 다르고, 삶도 다르게 그렇게 닳아가고 있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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