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18) 삼랑진역에서 작원관까지

오늘은 삼랑진역을 지나 작원관으로 길을 잡아 나섭니다. 둔치에 서니 2년 전 가을에 보았던 흐드러진 억새 모습은 말끔히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제 막바지로 치닫는 4대강 사업의 마감을 위해 긴 덤프 행렬이 장마 틈새를 헤집고 나온 햇살을 받으며 먼지를 휘날리며 달리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양산 물금까지 이르는 여정은 조선시대에 동남지동래사대로(東南至東萊四大路), 동래로(東萊路) 등으로 불린 속칭 영남대로(嶺南大路)입니다. 옛길의 이름은 한양에서 그 길이 이르렀던 곳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니 얼마나 목적지향적인 이름인가요. 이제 그 길을 따라 낙동강을 품으며 걷습니다.

-처자다리와 중다리

삼랑진역을 나와 철도 남쪽으로 난 길은 고려시대 이래의 관도입니다. 고려시대에는 금주도에 속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황산도로 재편되었습니다.

한 처녀와 중이 사랑을 두고 다리쌓기 시합을 했다고 전해지는 처자다리와 중다리. 사진은 그중 올 상반기 발굴된 처자다리. /우리문화재연구원

황산도에 한정해 보면, 황산역과 이에 딸린 무흘역(삼랑진읍 미전리 미전고개 동쪽)을 오가는 길입니다. 노정에는 용전천 우곡천 행곡천 등이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있어 내를 건너는 다리가 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곳에 전해지는 처자다리와 중다리 전설이 대변하고 있으며, 각각의 다리는 복원된 작원관에 옮겨진 작원진석교비와 작원대교비에 그 이력이 전합니다.

또한 옛 문헌에는 이와 아울러 사포교(四浦橋)가 작원 앞에 있다고 전하고 있어 지류에서 낙동강으로 드는 곳에 다리가 두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올 상반기에 두 다리 가운데 하나인 처자다리가 발굴돼 옛길을 헤아리는 지시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만어사 동쪽 우곡리에서 발원해 낙동강에 드는 우곡천(牛谷川)에 두어진 돌로 만든 무지개다리(홍예교: 虹霓橋)입니다. 다리는 연약지반에 두어져 마찰말뚝과 횡말뚝을 시설하고 잡석치환법으로 기초를 다졌습니다. 위를 성토한 뒤 홍예를 두기 위해 흙을 깎아내고 돌로 무지개다리를 짜 올렸습니다. 방향은 낙동강의 흐름을 따르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측량된 지형도와 지적원도에 나타난 당시 도로는 강변에 바짝 붙어 있어 지금까지 영남대로 답사자들이 철로를 따라 걸은 것은 사실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발굴된 다리의 길이는 약 25.3m이고 너비가 약 4.25m이니 옛길의 너비를 헤아릴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처자다리의 동쪽에서는 선형이 같은 전통시대 옛길의 자취가 발견돼 다리의 쓰임을 일러줍니다.

<밀양지명고>는 이 길에 있었다고 전하는 처자다리(處子橋)와 중다리(僧橋)에 대한 생성설화를 싣고 있어 옮깁니다.

"옛날 작원관(鵲院關) 근처에 조그마한 절이 있어 한 중이 살았는데 근처 마을의 미모의 한 처녀를 연모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두 남녀는 서로 사랑을 걸고 교통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다리 놓기 시합을 벌이기로 했다. 중은 행곡천(杏谷川) 다리를 맡았고, 처자는 우곡천(牛谷川) 다리를 맡아 작업을 시작했으나 중은 처자의 연약한 노동력을 깔보고 교만을 부리는 사이 처녀가 먼저 교량을 완성했다. 중은 부끄러운 나머지 자기 몫의 다리를 완공하고는 잘못을 뉘우치고 처녀에게 사과한 후 그 절을 떠나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한다."

돌다리를 놓을 때 승려가 토목기술자로 참여한 사실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면서 위와 같은 설화가 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설화는 이러한 내용을 전하지만 구체적인 사실은 지금의 작원관에 옮겨 세운 작원진석교비에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작원진석교비(鵲院津石橋碑)

근처에서 구하기 어려운 자줏빛 사암으로 만들었는데, 이런 재질의 돌로 만든 문화재가 산내면 얼음골 석불에도 있습니다. 몇 자가 알아보기 어렵지만 대체적인 내용은 헤아릴 수 있습니다.

살펴보면, "다리는 대로에 접하므로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다. 옛날부터 나무로 만들었더니 보수하거나 허물어질 때마다 사람들이 노역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안태에 사는 동지(同知) 오인발(吳仁發)이 분개하며 한탄하더니 스스로 화주가 되어 몇 년 만에 드디어 석교가 완성됐다. 재물이 소모된 것이나 인력이 투입된 것은 세세히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는 다만 한 시대 한 고을 거주민들을 무사하게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온 세상 길손들이 지나는 곳이 됐으니 영원히 칭송할 바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한다.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뒤에 같이 그 일을 주동한 사람은 오홍건(吳弘健)과 □병□ 그 사람이다.

안태리 이백호가 2월에 노역을 시작하여 8월에 이르러 7달 만에 끝났다.

숙종 16년(1690)인 강희(康熙) 29년 경오 9월에 세웠다."

위 내용에서 보듯, 사실은 설화와 많이 다릅니다. 설립 주체는 안태리 사람들이며 오인발이 화주를 자처했고, 오홍건 외 1인이 주동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며, 때는 숙종 16년이라 했습니다. 다리를 지나 동쪽으로 길을 잡아 가면, 작원마을 앞에서 안태호 동쪽 행곡리에서 흘러나오는 행곡천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은 다리가 없어 검세리 쪽으로 돌아야 하는데 예전에는 중다리 또는 승교라 불린 큰 다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작원대교인데, 지금 이 다리는 없어지고 그곳에서 나왔다는 작원대교비가 새로 지은 작원관에 옮겨져 있습니다.

-작원대교비(鵲院大橋碑)

작원대교비는 인조 20년(1642) 작원포에 대교를 건립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재질이 알갱이가 굵은 석영이 섞인 사암이라 떨어져 나간 글자가 많지만 대체적인 뜻은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만어산(萬魚山)에서 흘러온 물이 낙강(洛江 : 낙동강)에 드는 곳이 작원포(鵲院浦)인데, 서울에서 동래로 가는 자는 모두 이리로 간다. 옛날부터 나무로 시렁을 만들어 (다녔는데) 쉽게 무너지니 율동(栗洞 : 삼랑진읍 율동리) 청룡(靑龍 : 삼랑진읍 용전리?) 두 동네 사람들이 노역을 도맡아 했다. … 중간 탈락 … 이에 사람들을 모집하여 돌을 깎아 이어서 다리를 만들었는데 율동과 청룡 두 마을 사람들이 각각 3년 동안 나와서 일했다. (1640년) 초 1월에 시작하여 (1642년) 4월에 끝이 났다. 공사에 든 돈과 노역을 충당하였으니 진실로 아름답지 아니한가. … 중간 탈락 …그때 노역한 사람들과 공인으로 인하여 일이 무사히 마쳤으니 그 일을 기록하여 돌에 새겨 후세 사람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함이다. 이후에 길을 가는 사람들은 그 내용을 읽어 보면 착한 마음에 유연히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이에 새기노라.'

이어서 이 다리를 만드는데 애쓴 이들의 이름을 새겼는데, 문인(文印) 등 두 명의 승려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아마 이 사실이 앞서 소개한 처자다리와 중다리의 전설을 낳은 것으로 보입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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