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17) 밀양강을 건너 삼랑진에 들다

예전이면 상남면 외산리 오우진(五友津)에서 나룻배로 밀양강을 건넜지만, 이제는 평촌리에서 상삼교를 건너는 뭍길을 이용합니다. 삼랑진은 밀양강이 낙동강에 합쳐져 물줄기가 세 갈래라 붙은 이름입니다.

밀양강의 옛 이름은 응천(凝川)인데, 청도천과 단장천이 합쳐 암새와 삼문동에 하중도 둘을 만들며 휘돌아가는 형세를 반영한 이름으로 여겨집니다. 삼랑진 뒷기미나루에서 여정을 시작합니다.

밀양시 상남면 외산리에서 본 뒷기미나루. 배경의 구릉이 뒷기미인 후조산이고 정상에 삼랑진성이 있다. 나루는 아래쪽 횟집 건물이 보이는 곳이고 밀양강과 낙동강 두 강이 만나는 지점이 옛적 삼랑포로 불렸던 삼랑진이다. /최헌섭

-삼랑진(三浪津)·삼랑창(三浪倉)

삼랑진은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의 전통시대 나루입니다. 처음 이름은 삼랑포(三浪浦)였던 것 같습니다. 배후 구릉 후포산(後浦山 : 뒷기미, 뒷개뫼)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이곳에 삼랑루(三浪樓)가 있었다고 했으니, 고려시대 김해 감로사 주지 충지(沖止)가 풍광을 읊을 때는 삼랑포로 불렸습니다. 삼랑진 이름은 <선조실록> 28년 5월 6일 기사에 황신(黃愼)이 왜군 동향을 보고하는 장계에 처음 나옵니다.

밀양강의 옛 이름은 응천입니다. <동국여지승람>에 '응천은 부의 남쪽 성 밑에 있다.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청도군 동쪽 운문산에 나고, 하나는 풍각현 북쪽 비슬산에서 나와 청도군 유천역 곁에 이르러 합쳐 부성의 남문을 지나 해양강(海陽江 : 조선시대 낙동강 이름)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이곳은 지리적 요충지로 일찍이 전략적으로 중시됐습니다. 뒷구릉 후포산의 삼랑진성 혹은 낙동성지 산성이 증거입니다. 서쪽 뒷기미나루는 김정한 동명 소설의 배경인데, 이 삼랑포 뒤에 있는 후포산 자락에 있어 그리 불렸습니다. 소설에는 박노인 아들 춘식이와 속득이가 신혼 무렵 강에서 멱감는 장면이 있으나 지금은 꿈꾸지 못할 아늑한 시절로만 여겨집니다.

전하기로 삼랑진성은 밀양의 거성인 박·손 두 장군이 힘겹게 적과 싸운 곳이며, 정상 의충사에는 지금도 두 장군 영정이 있습니다. 의충사는 삼랑리 중심 신당이라 정월 보름마다 전날 밤부터 제를 지냈습니다. 나루가 흥했던 때는 삼랑리 다섯 마을이 합동으로 열흘 넘게 굿판을 벌여 북새통을 이뤘으나 지금은 상부마을서만 모신다고 합니다. 성은 규모가 작아 보 정도 수준이지만, 자리는 빼어납니다. 낙동강 위아래와 밀양강이 한눈에 듭니다. 이런 입지적 탁월성이 성을 구축한 배경일 것입니다. 지금은 주민들도 모를 정도로 허물어졌습니다. 서쪽과 남쪽은 낙동강과 밀양강에 붙은 비탈로 천연의 방벽이고, 동쪽 성벽에 돌로 쌓은 흔적이 남았으나 시기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성과 겹치면서 동쪽 기슭으로 3~4세기 고분군이 있어, 고대부터 사람이 산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 삼랑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부의 남쪽 30여 리에 있다. 응천이 강으로 들어가는 곳이다'고 했습니다. 책은 삼랑루에서 원(元) 간섭기에 원감이 읊은 시를 실었습니다. 법명이 충지(沖止)인 원감은 당시 수선사(修禪寺 : 지금 송광사)에 와 있었는데, 일본 동정(東征)에 내몰린 영남 일대 백성들 참상을 읊어 당시 사회상을 헤아리는 데 많이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읊은 시입니다.

"호수 위에 청산이요, 청산 아래 누각이로다. 아름다운 이름이 길이 물과 함께 흐르네, 물가의 가게는 달팽이 껍질 늘어놓은 듯하고, 물결 좇아 바람 받는 배에는 바람개비가 춤추네. 상자(桑 )에 연기 깊어 천리가 저물고, 마름꽃과 연꽃이 늙어 온 강에 가을빛이로구나. 낙하고목(落霞孤鶩)은 낡은 말일세. 새 시 지어 경치놀이를 적노라." 삼랑진 나루 가에 가게가 늘어서 있고 범선이 오가는 풍경입니다. 낙하고목은 지는 노을에 외기러기인데, 옛 사람들은 이를 매우 그렸습니다. 서울 마포에는 하목정(霞鶩亭) 정자가 있을 정도입니다. 지금도 만추 해질녘에 이 강 언덕에 서면 외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삼랑포 뒷구릉에 오우정과 삼강사비가 있습니다. 오우정(五友亭)은 점필재의 문인 민구령(閔九齡)이 중종 5년(1510) 무렵 옛 삼랑루 자리에 지은 정자입니다. 여흥 민씨 다섯 형제가 하늘에 닿는 효를 다하고 물러나 한 배게 한 밥상으로 침식을 함께하며 학문을 닦으며 산수를 즐기려고 지었답니다. 명종 때인 1563년 지역 사림이 오우사(五友祠)와 기사비를 세우고 봄가을에 제사 지냈습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숙종 때 다시 세우고 삼강서원에 모셨습니다. 정자 아래 삼강사비(三綱祠碑)는 영조 때 1775년에 옛 기사비를 거두고 다시 세운 것이며, 1828년 서원이 헐리자 그 자리에 옮겨 세운 것이 지금 오우정입니다. 오우정이 그런 정으로 세워졌다면, 아래 비석걸 바위의 당매대(棠梅臺)도 형제간 우애를 노래한 <시경> 소아의 당체(棠 :아가위꽃)를 기려 새긴 것으로 보입니다.

삼랑리 윗마(상부)와 아랫마(하부)는 영조 41년(1765) 우참찬 이익보 건의로 설치한 삼랑창(三浪倉)이 있던 곳입니다. <만기요람> 조전 조창에 '삼랑창은 밀양에 있으니 후창(後倉)이 된다. 조운선은 15척이다. 밀양 현풍 창녕 영산 김해 양산 여섯 고을의 전세와 대동미를 싣는데, 밀양부사가 받는 것을 감독하고 제포 만호가 거느리고 가서 바쳤다'고 나옵니다. 삼랑창을 후창 또는 후조창(後曹倉)이라 한 것은 좌창인 창원 석두창(石頭倉, 마산창이라고도 했다), 우창인 진주 가산창(駕山倉)에 비해 내륙인 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랑창은 설치 30년도 안 돼 이설 논의가 있었는데, 정조 16년 임자년(1792) 대홍수로 물길이 낮아져 큰 배가 드나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배로 나눠 작원(鵲院)으로 옮기고 김해 해창(海倉)에서 다시 큰 배로 옮겨 실으니 소모 경비가 많아졌습니다. <정조실록> 48권 22년(1798) 4월 27일 기사에 조창을 김해 죽도(竹島)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설되지는 않았습니다.

이곳 비석걸에는 후조창이 융성했던 시절을 일러주는 빗돌 8기가 있습니다. 10기 이상 있었으나 유실됐다 합니다. 처음 세워진 것은 밀양부사 김인대(金仁大)의 유애비로 조창이 세워진 이듬해인 1766년이고, 마지막 세운 것은 동치 11년인 1872년에 세운 것입니다.

-삼랑진역

삼랑리 남쪽에는 간이역인 낙동강역을 지나 송지리(松旨里)가 나옵니다. 범람원 자리인 송지는 솔마이니 삼랑진 동쪽에 있어 붙은 이름인 듯합니다. 옛적 마을은 산자락을 중심으로 발달했습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그해 1월 1일 삼랑진역이 보통역으로 업무를 개시하면서 범람원 한가운데 외송마을이 새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그 뒤 삼랑리 하부마을에서 외송마을 앞 강변을 따라 제방을 쌓고 수리를 안정시키면서 일본인이 많이 살았는데, 지금도 그때 지은 집들이 더러 있습니다. 삼랑진역은 경전선 시발역입니다. 1923년 증기기관차 급수탑이 있는데, 근대문화재 제51호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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