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윤 김해영운고 1

부옇게 뭉그러진 안개를 가르고 해가 뜨기 시작했다. 저 먼 산자락에서부터 서서히 어둠을 걷어내고 아스라한 햇빛이 온다. 이 순간은 밀림처럼 거대한 도시의 아주 깊은 골목까지 공평하게 빛이 든다. 그리고 지금 여기 이곳에도……. 거역할 수 없는 눈부심은 눈을 멀게라도 할 것처럼 찬연하다.

오빠가 죽었다.

수능이 막 끝난 겨울. 눈이 6센티미터나 쏟아진 날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빠는 우리 아파트 화단에서 돌처럼 얼어붙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동사는 아니고 새벽녘에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진 추락사였다.

경찰은 수능성적에 비관하여 투신자살을 한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오빠는 수험생이 아니었다. 오빠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일 때, 오빠는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버렸고,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라는 건 내가 지어낸 이야기다. 아니, 오빠가 죽은 일은 정말이지만 오빠가 죽은 이유는 사실 나도 알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 그저 내가 죽은 오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오빠의 표정에서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또는, 그것도 아니라면 내 어린 오빠의 죽음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 그런 시시한 죽음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빠는 어렸을 대부터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항상 멍했다. 늘 혼자 책을 읽거나 TV를 보면서 좀처럼 나랑은 놀아주지 않는 것이 어린 나는 항상 불만이었다. 그러나 그런 오빠에게 차차 적응한 후로는 오빠가 나와 놀아주든 그러지 않든, 심지어 집에 있든 없든 서로 조금도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싸우지 않는 남매의 좋은 예시였다. 사실은 거의 싸울 정도의 관심조차 없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나도 특별히 밖으로 나도는 활발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칠칠대는 성격 탓에 조용히 어디에선가 사고를 치기 바빴고 오빠는 오빠대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았다. 우리는 마치 서로에게 관심을 가질 찰나의 겨를조차 없었다.

그래서 오빠가 죽었을 때 솔직히 슬프다기보다 놀라웠다. 오빠는 언제까지나 오빠 방 문을 열면 책상 앞에 조그맣게 웅크린 어깨로 그렇게 존재할 줄 알았다. 평생 없는 듯, 그러나 문득 생각나서 돌아보면 분명히 거기 있는 그런 오빠일 줄 알았다…….

오빠는 왜 죽었을까?

오빠가 수험생이 아니라고 하자 경찰은, 그럼 오빠가 평소에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아느냐고 되물었다. 가정폭력, 왕따, 여자친구, 조직폭력단, 성적, 그런 것들……. 흔히 오빠 나이 또래의 남자애들이 하는 고민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오빠와 나란히 두었을 때 너무 어색하고 비현실적인 문제들이었다. 내가 오빠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은 확실했다. 우리집은 가족들이 다 따로 놀지만 그럭저럭 나름대로 충돌 없이 지냈고 서로의 취향을 존중했다. 학교에서 친구 있는지 없는지 잘은 몰라도 어디서 맞고 들어오거나 돈을 뜯기거나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성격에 여자친구가 있을 법 하진 않았고, 오빠의 성적은 꽤 기복이 심하긴 해도 본인이 거기에 연연하는 기색을 보인 적은 없었다. 한마디로 내가 보고 느낀 오빠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오빠는, 정말로 왜 죽은 걸까? 내가 묻고 싶었다.

결국 아무도 오빠의 죽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한 채 단순한 사고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사건은 끝이 났다. 오빠가 옥상의 낮은 난간에 걸터앉아 멍하니 사색에 잠겨 있다 어느 순간 균형을 잃고 떨어졌다는 것이 경찰의 해석이었다. 우리 오빠라면 정말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고 더 이상 오빠의 이유 없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엔 다들 너무 지쳤기 때문에 부모님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셨다.

경찰이 시신을 수습했고 다음날 장례를 치렀다. 장례식엔 오빠의 중학교 고등학교 반 친구들을 비롯해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왔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울지 않았다. 그들 중 누구도 눈물 흘리며 추억할 오빠와의 추억 한가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분히 의무적으로 예의상 참석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동생인 나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장례식이었다. 원래 장례식이란 울음소리와 곡으로 시끄럽지만 슬프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아프고 그래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령들로만 가득찬 듯 한없이 조용하기만 한 그곳이 견딜 수 없게 낯설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우리 오빠의 장례식을 끝까지 보지 못한 채 도중에 나와버렸다. 속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먼저 집에 가 있겠다며 신발을 구겨신는 나를 엄마는 토끼처럼 빨개진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소리는 없었지만 엄마는 오빠가 죽고 나서 가장 많이 울었다. 나를 꾸짖지도 붙잡지도 않고 조용히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내 얼굴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빠, 아빠는, 오늘도 칼같이 출근한 참이었다. 세무회계사로 일하는 아빠는 오빠처럼 말수가 적고 조금도 빈틈없는 성격이었다. 눈물이나 웃음처럼 감정에 쉽게 휩쓸리는 엄마와는 달랐다. 언제나 침착하고 맡은 일에 충실했다. 아들의 죽음이 타당한 결근 사유로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랬다 하더라도 아빠는 오늘 원래 했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떠올려보고 끝내 출근을 택했을 것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그런 분들이었다.

장례식장을 나온 나는 집까지 걸었다. 꽤 먼 거리였지만 버스나 택시를 타고 집에 일직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었다. 오늘따라 짙게 깔린 안개 속으로 끝없이 쭉 뻗은 인도를 따라 나는 생각 없이 무작정 걷기만 했다. 머리 위로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 같은 하늘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문득 나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기분이 되어서 걸음을 멈추었다. 오빠가 죽었다……. 하지만 난 오빠가 왜 죽었는지 모른다. 그건 나뿐만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거리를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차들……, 어느 누구도 오빠가 왜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그렇다면 또 어느 누가 우리 오빠의 이유조차 없는 가엾은 죽음을 기억할까. 사람이 죽는 것,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다는 것은 이렇게 가벼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흔적 없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혼자 생각하다가 울컥 감정이 북받친 나는 그제서야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가 죽었을 때부터 줄곧 참아오기라도 한 듯 쉴새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우뚝 멈춰섰던 다리를 움직여 숨차게 뛰기 시작했다.

머리가 벽에 닿는 느낌이 들어 나는 퍼뜩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였다. 하아……, 길게 숨을 몰아쉬고 나는 무릎에 놓인 책 위로 다시 눈길을 떨구었다.

오빠가 중학교 3학년 때 오빠네 반에서 만든 학급문집이었다. 나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오빠 방으로 들어갔다. 오빠 방은, 꼭 우리집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여기 마지막으로 발을 들여본 게 언제였을까. 낯선 기류 속으로 조심조심 발을 딛는 기분은 끝없이 떨어져 있는 오빠와 나 사이의 거리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내 기억 속에 오빠가 늘 나를 등지고 앉아 있던 책상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책장엔 책들이 단정하게 꽂혀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들이 오빠의 학급문집이었다. 지금으로썬 오빠 자신이 직접 남긴 기록은 그것들이 전부인 듯했다. 오빠의 휴대폰과 컴퓨터 등등은 모두 깨끗이 포맷되어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포맷한 날짜는 오빠가 죽기 하루 전날인 듯했다. 그것을 알았을 때 나는 확신했다.

오빠는 결코 멍청하게 '그냥' 죽지 않았다. 자신이 죽은 후를 대비해 지금까지 자신의 생활을 미리 깨끗하게 정리해놓은 것. 오빠는 자살한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오빠를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몰아붙인 것이다.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더 세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내가 할 일은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우리 오빠가 죽은 이유를.

일단은 오빠가 유일하게 남기고 간 흔적인 오빠의 학급문집을 뒤졌다. 지금은 그것밖에 따로 알아낼 단서 같은 게 없었다. 나는 범인을 찾는 탐정처럼 미친 듯이 학급문집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없다.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오빠의 죽음에 대한 단서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하다못해 오빠의 사소한 취미나 생각조차도. 학급문집 곳곳에 자잘하게 있는 오빠의 그림이나 글은 하나같이 한마디로 '무난'했다. 특별히 뭔가에 애착이 있는 것 같지도, 싫어하거나 피하는 것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미로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오빠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 실감났다. 가슴이 콱 막히는 듯했다.

좋아하는 것, 딱히 없음. 싫어하는 것, 딱히 없음. 취미, 없음. 장래희망, 없음……. 보는 사람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오빠는 거의 모든 자기소개에 하나같이 저렇게 똑같이 써놓았다. 그밖에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처럼 다같이 하는 과제는 그냥 적당히 무난한 수준이었다. 특별히 성의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대충했다고 보기 힘들었다. 작품 중에선 아예 중학교 3년 내내 똑같이 베껴 쓴 것도 있었다. 책장을 넘기던 손이 그곳에서 멎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시에 어울리는 시화를 그린 작품이었다. 오빠가 고른 시는 나도 국어책에서 본 적이 있는 도종환의 시였다.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정갈하게 쓴 글씨 옆에 초록색 줄기와 흰색 꽃잎을 가진 작은 꽃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 역시 특별히 잘 그리거나 못 그린 그림은 아니었지만 세 개가 조금씩 미묘하게 달랐다. 한 번 그려놓은 걸 계속 낸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로 그린 것임이 분명했다. 오빠는 이 시를 좋아했던 걸까? 하지만 시화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나는 책을 내려두고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갑자기 착한 척 설치지 마. 너도 나를 모르는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야……. 그건 죽은 오빠의 목소리였다.

나는 소름이 끼쳤지만 죄책감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정말로 나는 지금 뭘 하려고 하고 있는 걸까……. 나는 가위에 눌리듯 움직일 수 없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소용없어……!

그날부터 나는 계속 악몽을 꾸었다. 꿈에서, 뒷모습밖에 없는 오빠는 내가 다가가자 계속 멀어졌다. 소용없어! 소용없어! 소리는 이제 속삭임이 아니라 어떤 비명에 가까웠다. 죽은 오빠의 비명이었다.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에 제법 날이 서 있었다. 아파트 옥상 문을 열고 들어선 나는 습관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오빠가 죽은, 우리 아파트의 옥상이었다. 평소엔 잠겨 있지만 15층 아파트 맨꼭대기에 사는 우리 집이 옥상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대도 오빠가 죽기 전까지는 한번도 와볼 생각조차 한 적 없는 곳이다. 하지만 오빠가 죽고난 후에, 오빠가 남긴 흔적을 찾다 포기한 날부터 나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고, 그래서 새벽에 깨어날 때마다 몰래 여기로 올라왔다. 그러면 꿈속에서 멀어지기만 하는 오빠와 아주 조금이기는 하지만 가까워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내가 보지 못했던 오빠의 마지막 숨이 서려 있는 곳. 오빠가 마지막으로 밟고 서 있었을 옥상 난간에 기대 서 있으면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오빠가 바로 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심장이 쿵쿵 뛰고 가슴이 뜨거워지는데 살갗은 시렸다. 그렇게 여기에 발을 들인 지도 한 달 정도 흘렀다.

오빠가 죽은 뒤로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수없이 오빠가 죽은 이유에 대해 수없이 생각하고 밤에는 악몽에 시달렸다. 하지만 아직도 오빠가 왜 죽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런 게 과연 의미가 있기나 한 걸까? 언젠가부터는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것……, 오빠가 죽었을 때 처음 나는 그것이 오빠가 죽은 이유라고 생각했다. 오빠가 그 어린 나이에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내 상상일 뿐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오빠가 알아낸 세상의 모든 것이란 어쩌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 아닐까? 오빠의 죽음 후에 미친 듯이 오빠의 흔적을 더듬어 찾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오빠가 남긴 어떤 흔적도 살아서 오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해주지 못한다. 설령 알 수 있다 하더라도 오빠가 이미 죽은 후에 그것들이 대체 무슨 소용일까. 죽음 뒤엔 어무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것도 모른 채 어떻게든 뭔가를 남기려고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빠는 그 삶을 피해서 도망쳤다. 유일한 출구인 죽음을 통해…….

학교를 다니는 것, 친구들과 노는 것, 잠을 자는 것, 밥을 먹는 것, 심지어 숨을 쉬는 것까지. 오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할수록 나는 그런 사소한 일들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죽으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것들이 대체 무슨 소용일까. 오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도……. 나는 어떤 것에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오빠도 이런 기분이었던 거야? 오빠는 정말로 도망친 거야?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와서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내 생각까지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오빠는 틀리지 않았지만 꼭 그렇게 도망쳤어야 했어? 다른 사람도 다 참고 사는 걸 오빠는 왜 그걸 못 참아서 이렇게 도망쳐버린 거야. 왜 날 아프게 해……. 우린 싸우지도 않고 서로 상처주지 않는 좋은 남매였잖아. 도망쳐서 나까지 아프게 하다니 비겁해! 비겁해! 비겁해! 비겁해!

그때 바람이 불었다. 발 아래 놓인 검푸른 나뭇잎들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출렁였다. 아찔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딛고 서 있던 빈 화분이 쓰러질 듯 기울었다. 내 손 밑에 순식간에 땀이 고였다……. 난간은 내 허리께 높이까지 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하늘이 뒤집혔다.

"꺄아아아아!"

나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바람이 무섭게 웅웅대며 귓가에 스쳤다. 내 몸이 이렇게 떨어져 부서지면 죽을까? 오빠도 떨어지면서 무서웠을까? 후회했을까? 내가 죽으면 엄마는 어떻게 하지? 아빠는? 오빠는?

오빠……!

"경서야!"

누군가 내 이름을 크게 소리쳐 불렀다. 갑자기 바람소리가 멈췄다.

"……."

"경서야, 오빠야."

오빠. 뒷모습으로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오빠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며 오빠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오빠……. 나와 닮았지만 어딘가 낯선 얼굴. 죽고 나서야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오빠. 우리 오빠였다.

"오빠, 나……!"

"경서야, 삶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게 아냐. 의미는 꽃을 피워내는 거야. 피기 전에는 알 수 없어……. 그건 누군가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야. 지금 흔들림을 이겨내고 피어나야 해. 피기 전에 꺾이는 건 정말로 의미를 잃어버린 거야."

"나……, 죽기 싫어……!"

"넌 알고 있어. 죽는 건 정말로 도망치는 것 그 이상이 아냐. 그러니까 너는 살아……. 살아서 피어야 해. 그 단 한가지 의미를 찾기 위해서.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들은 태어난 거야!"

오빠의 몸은 투명해지듯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오빠의 손을 더 세게 꽉 쥐었다.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 아직 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 남았다. 오빠는 사라져 가면서도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눈을 떴다.

나를 굽어보듯 우뚝 선 거대한 아파트들 사이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아……, 하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릿한 통증이 소름처럼 등줄기를 타고 끼쳤다.

하지만 빗속에서,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나는 가물가물 감기려는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올리고선 분명히 보았다. 흐릿하지만 보도블록 끝자락의 시멘트 틈에서 새처럼 파르르 떠는 그것은,

꽃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예쁘지도 않은 그 꽃은 제 꽃잎보다 큰 물방울을 지고서 강파르게 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그 꽃이 휘어져도, 흔들리기는 해도 절대 꺾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언젠가 비가 그치고 해가 뜨는 날 다시 봄처럼 꽃망울을 터뜨리라는 것을…….

살자. 살아내자. 꽃처럼…….

빗속에서 나는 소리 없이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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