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 거제 장목중 3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일이다. 과학 선생님께 해바라기 씨앗을 얻은 적이 있었는데, 키워 보고 싶은 욕심에 종이에 소중히 싸서 집에 가지고 갔다.

지렁이가 많아 영양이 풍부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리 집 화단의 흙을 넣고 씨앗을 화분에 정성스레 심은 뒤 물을 충분히 주었다.

그리고는 설렘에 매일 자라는 과정을 살펴보곤 했다. 그 당시에 식물을 가꾸어 본 것이란 학급에서 고추, 토마토, 가지 등을 한 사람당 한 가지씩 심어보았던 게 전부였던 내게 해바라기 씨앗이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정성을 쏟은 나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해바라기 씨앗은 싹을 틔우더니 나중엔 꽃을 피웠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씨앗으로 가득차야 할 꽃이 시들시들해지더니 급기야는 자꾸만 말라비틀어지는 게 아닌가?

그 현상에 대해 지식이 없는 나는 답답한 마음에 두 발만 동동 굴렀다.

마침 옆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셨다.

이유를 말씀드리자 할머니께서는 "좁은 화분을 답답해 하는 것이란다. 해바라기는 자신의 큰 키와 무게를 이기기 위해 땅 속에 큰 뿌리를 박은 채 살아가는 식물인데 좁은 곳에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답답하겠냐?"라고 말씀하셨다.

할머니 말씀을 듣고 난 다음, 물이 부족한 게 아닐까? 지렁이를 넣어줘야 하는 걸까? 등의 잡다한 생각을 거두고 화단 가장자리의 장미 옆에 해바라기를 옮겨 심었다.

화분에 있는 해바라기를 꺼낼 때 할머니의 말씀대로 해바라기의 뿌리는 깊게 자란 듯 화분 곳곳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정말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러나 그날 저녁, 내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해바라기 관찰이 막을 내렸다. 구덩이를 깊게 파고 물을 듬뿍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바라기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교육열이 뛰어난 나라에 손꼽히는 우리나라. 급격한 산업화의 영향으로 우리 청소년들의 생활과 사고도 그에 따라 많이 변화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학교 생활이다. 물론 현재의 학교 생활에서는 예전과 달리 다양한 학습과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지만 결국 공부에 대한 비중이 큰 탓에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의무 교육의 도입으로 청소년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공부의 굴레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돼버렸다. "저는 학교에서 8교시까지 하고 학원을 가야 해요. 학원 마치면 영·수전문학원을 가고요. 저녁요? 학원 가는 길에 편의점이나 분식집에서 간단히 먹어야죠. 괜찮아요. 학교 생활요? 재미 없어요. 과외까지 있는 수요일은 정말 최악이에요!"

언제부터였을까. 이렇듯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 청소년들의 삶은?

창의력이 21세기를 이끌어 갈 위대한 힘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꿈꾼단 말인가?

치열한 경쟁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어버린 현실,

그리고 이 현실 속에서 성적 때문에 종종 일어나는 안타까운 삶의 종결, 또한 방송매체에서 떠들어대는 청소년들의 숱한 비행 등은 의미심장하게 내 가슴을 파고든다.

가끔씩 햇빛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베란다에 줄지어 서 있는 화분을 본다. 화분에 심어져 있는 식물들은 물을 주지 않았는지 잎과 줄기가 싱싱하지 않다. 창문 너머로 바로 보이는 화단의 식물들을 본다.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았는데도 잎과 줄기에 생명력이 넘쳐 흐른다.

문득 초등학교 시절, 화분에 심었다가 화단에 옮겨 심었던, 그렇지만 끝내 시들어버렸던 해바라기가 떠오른다.

제한된 공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결국은 숨통이 막혀 제 꿈을 펼치지 못했던 해바라기.

처음부터 화단에 심었더라면 햇빛과 비와 땅속의 영양분을 마음껏 섭취하며 속이 꽉찬 씨를 맺었을 해바라기.

거의 대부분의 줄기와 잎이 바깥으로 향해 있는 화분의 식물들을 보며 나는 또는 우리 청소년들은, 화분에 심어져 있는 식물이어야 할까, 아니면 화단에 심어져 있는 식물이어야 할까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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