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17) 수산나루에서 삼랑진으로

오늘은 수산나루가 있던 수산리에서 길을 잡습니다. 옛 나루터는 지난 여정에서 지났던 덕민정 아래에 있었으니 대체로 옛 수산다리에서 길을 잡게 됩니다. 이곳에서 낙동강 제방을 따라 길을 잡아 나서면 지금 정부가 동남권 신공항 개발이라는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 하남평야인 백산들을 지나게 됩니다.

-수산진(守山津)

<해동지도>에는 덕민정 아래에 그려 두고, '수산진(守山津)은 건너 나루와 150보'라 써 두었습니다. 낙동강 한가운데에 모래로 된 섬인 중사도(中沙島)라 불리던 하중도(河中島)가 있고, 나루 곁에는 밤나무 숲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숲은 수산과 대평 사이에 있었던 관율수(官栗樹)를 표시한 것이니 관에서 관리한 밤나무 숲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에는 나루는 없고, 수산 고현(古縣)과 그 서쪽에 양동역(良洞驛)을 표시해 두었습니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 마침 이곳의 수산장이 오늘과 8일에 열립니다.

<대동여지도> 속 양동역·백산봉수·수산제 일원.

-양동역(良洞驛)

밀양시 하남읍 양동리 양동마을은 전통시대에 이곳 앞들에 있던 양동역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마을의 앞에는 지금도 옛 역터를 헤아릴 수 있는 마구들이란 지명이 남아 있고, 동쪽의 파서리에는 말새미가 있어 이 일대가 옛 교통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역은 <경상도지리지> 수산현에 신역(新驛)으로 처음 나온 뒤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수산신역(守山新驛)으로 나옵니다. <경상도속찬지리지> 참역에는 '양동역은 서쪽으로 영산 온정역(溫井驛)과 31리 106보, 동쪽으로 김해 금곡역(金谷驛)과 28리 235보, 남쪽으로 김해 대산역(大山驛)과 12리 13보 떨어져 있다' 고 한 뒤 줄곧 양동역으로 불렸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수산현에 있으며, 부에서 41리 떨어졌다'고 나옵니다.

<여지도서>에는 '부 남쪽 35리에 있다. 남쪽으로 무흘역(無屹驛)과 30리, 동쪽으로 금동역(金洞驛)과 15리 거리다'고 하여 동쪽으로부터 삼랑진의 무흘역~상남면의 금동역의 관계를 설정해 두었습니다.

그렇지만, 지리적 특성으로 보자면 실질적으로는 낙동강 너머 남쪽의 창원 대산역과의 관계가 중시된 듯해 보입니다.

-백산(栢山) 봉수

양동역을 둘러보고 나오며 무거운 마음으로 길을 걷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희망을 이야기하던 들판이 절망의 들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나라가 국민을 대상으로 사기를 칠 수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이 정부는 되는 게 뭐고 안 되는 게 뭔지를 알 수 없는 청개구리 같습니다. 이곳 백산들은 낙동강의 배후습지가 육화된 곳으로 그만큼 들이 넓기에 이곳에 동남권 신공항을 유치하려 했던 곳입니다.

양동역을 나와 들마을을 지나 대평에 듭니다. 대평(大坪)은 들이 넓어 한들이라 불렀던 것을 한자의 뜻을 빌려 그리 적은 것입니다. 대평을 지나면 백산(栢山)입니다. 들의 이름이자 마을 이름이기도 한 백산은 '잣뫼'를 한자의 뜻을 빌려 그리 적은 것이므로 똥뫼라 불리는 이 작은 구릉에 성(城)이 있으리라 헤아리고 오릅니다. 똥뫼는 고립구릉을 우리 지역 말로 그리 부르는데, 독뫼를 이르는 게지요. 지도를 살피니 이 구릉의 높이가 108m입니다. 아마도 오늘날의 이 번뇌를 예감한 수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 백산에 올랐으나 성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 백산 봉수 바깥에 두른 돌로 쌓은 방화벽(防火壁)을 성으로 인식하고 그리 부른 듯합니다.

<여지도서>에 '남쪽의 자암산(子巖山) 봉수를 받아 북쪽의 종남산(終南山) 봉수로 연락하며, 서로 15리 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지지에는 없으므로 조선 후기에 신설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암산 봉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봉하마을 뒷구릉에 있는 봉수를 말하는데, 지금은 그곳을 봉화산(烽火山)이라 하며, 그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이름이 봉하(烽下)가 된 것입니다.

낙동강 사업으로 뿌연 모래가 휘날리는 수산대교 아래 낙동강. /경남도민일보DB

<해동지도>에는 백산 정상에 봉화를 그려 두고 백산봉수(栢山烽燧)라 썼습니다. 백산 봉수는 그리 높지 않은 곳에 두어졌고, 또한 그 위치도 정상이 아니라 거기서 약간 비낀 봉우리입니다. 아마 봉수가 설치되기 이전부터 그곳 정상에 있던 당집을 피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곳에는 너비가 약 2m 정도 되는 방화벽이 타원형으로 둘러져 있고, 남쪽 방화벽 아래에는 기와와 독 조각, 백자 대접 조각 등이 흩어져 있어 조선시대에 운용된 봉수임을 일러줍니다

봉수가 있는 백산의 정상에는 당집과 서낭당, 제단이 있습니다. 주위의 수목은 소나무와 참나무로 구성되어 있고, 봉수와의 사이에는 1998년 국토지리원에서 복구 설치한 지적삼각점(경남-415호)이 있습니다. 봉수는 그 남쪽으로 약 30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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