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16) 곡강정을 지나 수산제를 둘러보다

어제 창원에서 군항제가 끝났습니다. 어제 남해 출장길에 노량을 지날 때, 차창에 날리는 꽃눈을 보면서 먼 임진·정유년 왜란을 떠올렸습니다. 문득 일본의 다도를 정립한 다인이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책사였던 센 리큐(千利休)에 대한 생각이 겹쳤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온 나라가 벚꽃잔치에 들떠 그야말로 난리가 아니지요. 꽃은 무죄입니다만, 그 꽃을 완상하는 이면에 깃든 칼은 엿볼 수 있어야 하리라 여겨집니다.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한 무사들이 그를 위해 바람에 지는 저 벚꽃처럼 자신의 목숨을 산화시키도록 정신을 무장한 무섭도록 놀라운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창원 진해구에서 사천 선진리에서 얼마 전까지는 남해의 노량에서조차 그런 축제를 즐겼습니다. 아마 낙동강 사업지에도 둔치 곳곳에 이 나무가 심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잘 생각해서 할 일입니다.

◇곡강정 = 낙동강 배후습지의 안쪽으로 들어가 인종 태실 등을 둘러보고 나오니 낙동강이 휘돌아가는 곳에 검암리 곡강마을이 있고, 여기에는 이곳 지세를 딴 곡강정(曲江亭)이 있습니다. 이 정자는 성산군 벽진 이식이 중종으로부터 패를 받은 곳입니다. 정자 명이 마을 이름이 됐는데, 정자의 입지가 낙동강의 공격 사면에 해당돼 유로가 꺾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서 낙동강의 비탈은 길을 받아들이지 않아 마을을 돌아 수산으로 듭니다.

◇덕민정과 남수정 = 옛 수산현의 낙동강가에는 현청으로 쓰인 덕민정(德民亭)과 남수정(攬水亭)이 있습니다. 덕민정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권람의 기문을 보면, 밀양부사 이백상이 1450년에 창건했습니다. 수산은 밀양에 딸린 현이었는데, 이곳이 수운(水運)의 요충이라 매번 조운이나 사명(使命)이 지날 때면 부에서 영접하지만, 손을 맞을 곳이 없으므로 밀양부 객사로 드나들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부사가 1450년 가을에 현 서쪽 언덕에 덕민정을 지었던 것입니다. 가운데 세 칸 마루를 두어 현청 일을 보게 하고, 좌우에 세 칸의 방을 달아내어 불편이 없도록 했습니다. 이로부터 손을 보내거나 맞을 일이 있으면 부사가 노속 한 명만 데리고 와도 능히 접대할 수 있으므로 부에서는 손님을 모셔가는 수고를 덜고, 현에서는 부에 들어가는 괴로움이 없어져 모두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부사가 백성에게 베푼 덕이 크므로 덕민(德民)으로 정자의 이름을 삼았다고 전합니다.

임진왜란 때 남수정과 함께 불탔으나 남수정만 중건하고 그 터에는 수산창을 지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1617년 7월 24일 이곳을 지난 정구의 <한강선생 봉산욕행록>에는 남수정만 나옵니다. 남수정은 덕민정 서쪽에 있습니다. 주세붕의 기문에 의하면, 1538년에 부사 장적이 지었다고 합니다. 이후 사정을 <밀양지명고>를 토대로 살펴보면, 이듬해에 후임 어득강이 단청을 하여 남수정으로 당호를 삼았습니다.

1542년 부사 박세후가 부속 건물 10칸을 더 지어 담을 쌓고 문을 달았습니다.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려 그 터에 수산창을 두어 곡식을 보관했습니다. 숙종 때 영장 김기가 낙동강이 범람하여 창고를 불질러 많은 인명을 구하니 그 공으로 덕민정과 남수정 일대의 땅을 내려줬습니다. 이로써 일대의 땅이 광주 김씨 문중 소유가 되어 다시 남수정을 지어 배움터로 삼게 됩니다. 그 뒤 다시 불타 방치되다가 한때 소유권이 남에게 넘어갔으나 1865년 진해현감 김난규가 돌려받아 남수정을 다시 세웠습니다.

지금 건물에는 당시에 도담(道潭)이 새로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수를 빼어날 '수(秀)'로 바꿨습니다. 아마 원래 이름은 정자가 강가에 있어 그 맑은 물이 손에 닿을 듯하여 그리 붙였으나, 뒤에 김씨 문중이 정자를 다시 지어 인재를 기르는 곳으로 썼으니 빼어난 인재를 얻기 바라는 뜻으로 그리 고친 것으로 보입니다.

◇수산제 = 밀양 하남읍의 중심 마을인 수산은 수산제(守山堤)에서 비롯했습니다. 이곳 하남읍에는 수산리, 검암리, 귀명리, 양동리 등에 많은 조개더미 유적이 있습니다. 아울러 지석묘, 고분군 등도 즐비해 예로부터 사람이 많이 모여 산 곳임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2009년 10월 사진으로 담은 수산제 모습. /최헌섭

수산제는 김제의 벽골제(碧骨堤)와 제천의 의림지(義林池)와 함께 삼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3대 저수지의 하나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수산 경계에 수산제라 부르는 길이 728보의 대제가 하나 있는데, 지금은 무너져 있으나 다시 쌓지 못했다'고 나옵니다. 이런 정경은 비슷한 시기 권람이 지은 덕민정 기문에서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기문에 전하는 수산제의 모습은 연꽃과 각종 물풀이 무성한 자연 경관만 그리고 있으며, 이 정자가 지어지기 전에는 주변 논밭이 오랫동안 묵어 풀이 우거진 채 쓸모없는 땅으로 방치돼 있었다고 합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수산제는 수산현에 있는데, 둘레가 20리다. 세상에 전해져 오기를 고려 때 김방경이 둑을 쌓아 밭에 물을 대어 일본을 정벌하고자 군량을 갖췄다. 못 가운데는 죽도(竹島)가 있는데, 세모마름·연·마름·귀리가 보이는 끝까지 가득하다. 세조 때 물길을 트고 수문을 설치해 나라의 둔전으로 했다가 뒤에 봉선사(奉先寺)에 내려줬다. 성종 때 다시 나라 둔전이 됐다'고 전합니다. 예서 말하는 그 때는 성종 18년인 1487년입니다.

이는 <세조실록>과 <성종실록>에도 실려 있는데, 물길과 수문을 정비해 나라의 둔전이 된 것은 세조 9년(1463)입니다. 1450년에 덕민정을 지어 수산이 어느 정도 현으로서 모습을 갖췄기에 가능했습니다. 세조 13년(1467)에는 밀양 청도 영산 창녕 대구 창원 현풍 양산 김해 등 아홉 고을의 사람을 동원해 제방을 증축했습니다. 성종 18년(1487)에 다시 나라의 둔전으로 회복돼 명종 때까지 유지되었으나 임진왜란의 병화를 비켜가지 못하고 황폐해졌습니다.

저간의 사정은 밝히기 어렵고, 수산제는 일본인이 수리 시설을 재편한 1928년 이래의 개간으로 논이 됐습니다. 그때만 해도 수산리에서 양동리에 걸쳐 흙으로 쌓은 제방이 1km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옛 지적도에서 자취를 더듬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이때 수산제는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수문의 일부도 훼손됐음이 시굴조사에서 밝혀졌습니다.

수산제 수문 시굴에서는 조선시대 후기의 자료들이 집중 출토됐습니다. 조사된 수문의 규모는 길이 20m, 너비 1.4m, 높이 1.8m이고, 암반을 뚫어 만들었습니다. 이상의 기록과 시굴조사 결과에도 수산제를 처음 설치한 시기는 삼한시대로 소급되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바로 옆 도연산(陶淵山) 끝자락에는 신라왕이 순행 길에 물을 마셨다는 어정(御井)이 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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