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15) 밀양 초동의 유적과 인물-상

이번 주에는 밀양 출신이거나 이곳과 관련 있는 인물 몇 분을 만나뵙겠습니다. 낙동강에 접한 이곳 초동은 경관이 빼어난 곳이라 그런지 인물이 많습니다. 경관의 수려함은 성만리에 고려 인종의 태실이 두어졌음으로써 잘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태종 때 20년 넘게 대제학에 있었고, 세종 때는 왕명으로 흥덕사에 머무르면서 <국조보감>을 엮을 정도로 문장을 인정받은 변계량 선생의 유적이 신호리에 있습니다. 또한 그 맞은편 대구마을에는 고려 팔은의 한 분인 송은 박익 선생이 파조(派祖)이신 밀양 박씨 송은공파 종택이 있습니다. 이 곳을 차례대로 둘러보고 나면, 풍광 좋은 낙동강가에 지은 곡강정과 남수정을 볼 수 있습니다.

◇고려 인종 태실 = 성만리 초동중학교 뒷구릉인 귀령산(龜齡山)에는 고려 국왕의 태실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한 인종의 태실이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 산천에 '귀령산은 수산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고려 인종이 이곳에 태를 묻었다'고 했습니다. 인종은 고려 17대 왕으로 국가 재정을 절약하여 환관을 줄이는 등 선정을 베풀었고, 김부식에게 <삼국사기> 편찬을 명하여 1145년에 완성을 보게 했습니다.

고려 인종 태실.

태가 안장된 귀령산은 덕대산 줄기가 멎은 곳으로 앞(남쪽)에서 보면 사발을 엎은 것과 같은 고립 구릉 형태여서, 태봉 입지의 원초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사 보고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기단의 둘레가 5칸, 높이가 4척이라 소개했고, 당시 이미 도굴된 상태였습니다. 지금도 도굴된 채 그대로 방치돼 있는데, 태실의 뚜껑이 열린 채 동쪽으로 밀쳐져 있고, 안이 드러나 있습니다. 태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70cm 정도고, 깊이가 77cm정도여서 약간 높은 정육면체 모양입니다. 잘 다듬은 사암으로 네 벽을 짰고, 뚜껑은 길이 110cm, 너비 90cm 되는 네모난 돌로 덮었습니다.

또한 예서 북북서쪽으로 약 9.5km 정도 떨어진 무안면 화봉리(華封里) 태봉(胎封)마을에도 조선 왕녀의 태실이 있습니다. 표석의 앞에는 '조선왕녀(朝鮮王女)', 뒤에는 '선화(宣化)십칠년십월십일'이라 새겼으니, 때는 조선 성종 12년(1481)이 됩니다. 도굴돼 태 항아리는 없어졌고, 덮개돌은 마을로 옮겨져 민가의 담장이 됐으나, 태함은 주민들이 태봉산 정상에 다시 묻었다고 합니다.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 = 인종 태실을 둘러보고 남쪽에서 맞는 신호리는 춘정 변계량이 태어난 곳입니다. 신호리 대구마을 입구에 변계량과 아버지 판서공 변옥란과 형 춘당 변중량 등 변씨 삼현(三賢)의 행적을 기록한 유허비가 있습니다. 변계량은 목은 이색에게서 배워 태종 때 20여 년동안 문형(文衡:대제학)을 맡을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습니다. <연려실기술>에 '공의 문사는 고묘(高妙) 전아(典雅)하였으며, 더욱 시를 잘하여 맑으면서도 궁기(窮氣)가 없고 담담하여도 얕지 아니하였다'고 간결 명쾌하게 논평했습니다. 이런 명문이 인정돼 세종 때 왕명으로 <국조보감>을 엮었습니다. 세종이 그의 문장을 존중해 온갖 술과 음식을 하사했고, 고관들과 동료들도 다퉈 그에게 술이며 음식을 챙겨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몹시 인색한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용재총화>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밀양 초동면에 있는 변계량 비각.

'춘정 변계량은 성격이 인색하여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남에게 빌려주지 아니하고 수박을 쪼갤 때마다 쪼개는 대로 기록하였으며 손님을 맞아 술을 마실 때도 마신 잔의 수를 짐작하고는 술병을 조심스럽게 봉하여 거둬들이므로 그의 안색을 살피고는 가버리는 손님이 자못 많았다.

흥덕사에 머물러 오랫동안 <국조보감>을 엮을 때 세종께서 그의 문장을 중히 여겨 궁중에서 하사하는 찬이 끊이지 않았고 고관과 동료들도 다투어 술과 음식을 보냈는데 하나하나 여러 방 속에 저장하였다. 날이 오래되어 구더기가 생기고 냄새가 담 밖에까지 나도 썩으면 언덕에 갖다 버릴지언정 종과 시종들은 한 모금도 얻어 마시지 못하였다'고 했을 정돕니다.

◇밀양 박씨 송은공파(松隱公派) 종택 = 변계량 유적이 있는 대구 마을 북쪽에 새터 마을이 있습니다. 고려 팔은의 하나인 송은(松隱) 박익(朴翊)의 후손이 터를 잡고 모여 사는 곳입니다. 송은공파의 파조인 박익은 1332년 밀양시 부북면 삽포(揷浦:지금 사포리)서 태어났습니다. 공민왕 때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무예도 뛰어나 남으로 왜구를 막고 북으로는 호적을 평정하여 공을 세웠으나 국운이 쇠퇴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피살된 날 '나 역시 고려의 신하이니 조선 이씨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 하며 벼슬을 버리고 밀양으로 와 삽포 냇가에 소나무를 심고 그 내를 송계(松溪)라 부르며 스스로 호를 송은이라 했습니다. 소나무를 심은 것은 송도(松都)를 잊지 않고자 함이었다고 전합니다. 그 뒤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가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절개를 지키니 송은을 고려 팔은의 한 분이라 이르게 됐습니다.

곡강정에서 본 낙동강과 밀양 수산대교. /최헌섭

박익은 죽어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화악산 자락에 묻혔는데, 그의 무덤은 고려 양식을 따른 방형 석축분으로 웅장한 위용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두 번씩이나 도굴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2000년 9월 두 번째 도굴 직후 태풍으로 훼손된 묘역을 보수할 때, 벽화가 드러나 무덤을 발굴하였습니다. 당시 벽화와 함께 지석, 혼유석 등이 발굴돼 문화재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사적 제459호로 지정됐습니다. '밀양 고법리 박익 벽화묘'로 불리는 이 무덤의 벽화는 조선시대 전기 사대부가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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