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14) 밀양에 들다

지난해 1월 경북과 경계를 이루는 창녕군 이방면 송곡리에서 시작한 낙동강 역사문화탐사가 1월 25일자에서 창녕군을 마감하고 드디어 밀양으로 접어들었습니다. 3주 만에 낙동강에 나섰더니 그새 달라진 풍경이 있습니다. 지금껏 구제역 청정 지역으로 남아 있던 경남에도 파장이 미쳐 곳곳에 구제역 예방 방제시설이 들어서 있습니다. 창원에서 본포대교를 건너는 길목에도, 밀양을 빠져 나오는 곳곳에도 방제시설에서 물에 탄 약을 쏘아대고 있습니다.

-우역(牛疫)

옛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조선시대에도 소의 돌림병(우역; 牛疫)에 관한 기록이 적지 않습니다. 영조 때 기록이 집중돼 있는데, <영조실록>에는 영조 14년(1738) 2월 7일 기사에 "이때 북관(北關)에 우역이 크게 번져 청나라 차원(差員)과 교시(交市)하는 데 쓸 소 600마리 중 죽은 것이 550여 마리나 됐다"고 했습니다. 영조 23년(1747) 10월 18일에는 호남 양전사 원경하가 복명한 글에 "우역이 극성해 농우(農牛)가 다 죽어 내년 봄에 장차 경작할 희망이 없는 것 역시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라 했고, 같은 해 12월 22일 기사에는 "우역이 극성을 부려 농우(農牛)가 열에 여덟·아홉 없어졌으니 내년 경작이 진실로 염려됩니다"고 했으며, 26년(1750) 11월 30일 기사에는 "우역이 연달아 3년 동안 치성(熾盛)해 소 대신 사람이 갈고 있다 하니, 참으로 불쌍합니다"라 했습니다.

또한 30년(1754) 11월 4일 기사에는 "함경도에 우역이 크게 치성한 까닭에 회령(會寧)·경원(慶源)에서 청나라 차원(差員)이 개시(開市)할 때 농우를 매매하던 것을 금단하도록 장청(狀請)하였으나, 그들(청나라 사람)은 개시 때 오로지 소를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한결같이 엄히 막으면 혹 말썽을 일으킬까 염려되며, 근일에 우역도 자못 그쳤다"고 해 돌림병이 일시 진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39년(1763) 5월 8일 기사에는 "함경도에 우박이 내려 보리와 조를 손상시켰다. 우역이 크게 번졌다" 했고, 같은 해 12월 2일 기사에도 "호남(湖南)에 우역(牛疫)이 발생하여 죽은 소가 1만 마리나 됐다. 제도(諸道)에 명하여 소 잡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했으니 그때도 지금 못지 않은 돌림병으로 온 나라가 들끓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조 25년(1749) 9월 18일 기사를 보면, 소의 돌림병을 막기 위해 선목단(先牧壇)에서 돼지 한 마리를 희생으로 삼아 제사를 올렸는데, 지금은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까요.

밀양시 초동면 검암리 이궁곡에서 본 낙동강의 모습. 옛적 낙동강의 배후습지였던 초동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개천을 이뤄 낙동강에 흘러들고 있다.

-밀양(密陽)

첫날이니 아무래도 밀양 지역 역사 개관이 순서이지 싶습니다. 밀양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고례리 유적의 발굴로 약 2만 년 전인 후기 구석기시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석기시대에 사람이 산 자취는 밀양강과 단장천이 모이는 산내면 금천리와 살내에 남아 있는데요, 이곳 범람원의 자연제방에는 움집과 돌을 모아 만든 화덕, 석기 제작장 등을 갖춘 마을이 있었습니다. 청동기시대에는 지석묘를 통해 밀양 전역에 사람이 퍼져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마을은 앞의 금천리와 살내에서 신석기시대 위 문화층에 만들어졌는데, 이곳서는 움집과 무덤 및 그들이 일군 논이 어울린 마을이 조사되었습니다.

역사시대에 이곳을 차지한 집단은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실린 변진의 한 나라인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었습니다. 옛말 연구자들에 의하면 미리미동의 미리(彌離)는 용을 이르는 옛말 '미르' 또는 '미리'를 적기 위해 소리를 빌려 쓴 한자고, 미동(彌凍)은 마한에 있던 땅 우휴모탁(優休牟 )의 모탁(牟 )과 관련 있는 말로 물을 막는 제방인 수제(水堤)를 뜻한답니다. 그러니 미동은 '물둑', 모탁은 '물돌'의 음사로 보는 것이라는 게지요.

이 시기의 교동 유적 자료는 미리미동국이 활발한 대외 교류를 통해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낙동강 동쪽에 있으므로 다른 변진 나라들보다 일찍 신라에 복속됐을 텐데, 5세기 월산리 고분의 도기가 낙동강 동쪽 출토품과 같은 양식으로 교체된 것이 이를 보여줍니다. 이즈음 신라 지방조직에 들면서 추화군(推火郡)이 됐는데, 추화는 밀벌의 훈차이므로 미리미동국에서 비롯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덕왕 16년(757) 밀성군(密城郡)으로 고쳤는데 미르 또는 미리를 축약해 밀로 적은 것이며, 딸린 현이 다섯입니다. 그 가운데 상약현(尙藥縣)은 본래 서화현(西火縣)인데 지금의 창녕군 영산면입니다. 밀진현(密津縣)은 추포현(推浦縣)(또는 죽산 竹山)이었는데 밀은 미르의 소리를, 추는 뜻을 취한 표기이니 결국 같은 이름입니다. 위치는 밀개(밀포; 密浦)가 있던 지금의 창녕군 길곡면 오호리 일대가 됩니다.

이밖에 고려 때 청도군에 병속된 오구산현(烏丘山縣), 형산현(荊山縣), 소산현(蘇山縣)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성종 14년(995) 밀주(密州)로 고쳐 자사(刺史)를 뒀고 현종 9년(1018)에는 지밀성군사(知密城郡事)로 불렀습니다. 충렬왕 원년(1274) 고을 사람 조천 등이 수령을 죽이고 삼별초에 호응했다 해 귀화부곡으로 낮춰 계림(경주)에 붙였다가 다시 밀성현으로 불렀고, 11년(1285)에 군으로 높였으나 곧 현으로 낮췄습니다.

공양왕 2년(1390)에 왕의 증조모 박씨의 고향이라 밀양(密陽)으로 고쳐 부로 승격시켰는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 다시 밀성군으로 했다가 중국에 입조한 환관 김인보의 고향이라 다시 밀양부(密陽府)로 올렸습니다. 태종 때 군으로 내렸다가 뒤에 예에 따라 도호부가 되었습니다.

중종 13년(1518)에는 고을에 아비를 죽인 자가 있어 현으로 낮추고, 부의 땅을 나눠 청도 경산 영산 현풍 등에 붙였다가 17년에 복구했습니다. 선조 33년(1600)에 방어사(防禦使)를 겸했다가 이듬 해 파하고 37년 다시 겸했습니다. 인조 7년(1629)에 다시 파하고 19년에 토포사(討捕使)를 겸했는데 현종 때 파했습니다. 고종 32년(1895)에 대구부 소속 밀양군이 됐다가 이듬해 분리했습니다.

-손가진(孫哥津)

창녕과 밀양을 가르는 청도천을 지나면 초동면 반월리에 듭니다. 이곳 손진나루(반월나루, 진촌나루)가 손가진(孫哥津)의 옛터인데, 창원의 손가진(지금 본포)과 통합니다.

한자말로 보면 손씨 성을 가진 이가 나루를 운영한 데서 비롯한 이름처럼 보이지만, 다른 곳도 손진(孫津)이란 이름이 많기에 꼭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손이 좁다 또는 비좁다는 뜻의 '솔다'를 줄여 쓴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 지도를 보면, 창원 삼귀동에도 손진이 나오고, 강화도에도 손돌목이 있는데, 이런 지형 특성이 좁은 해협과 만에 있기에 그런 지명이 붙게 된 것이지요. 이곳 손가진도 밀양의 거성인 손 씨와 결부시킬 수만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나루가 있는 마을의 이름이 된 반월(半月)은 낙동강가에 발달한 범람원(포인트 바)의 형태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앞들에 새로 생긴 마을은 이름조차 나루마을인데요, 서쪽은 나루 또는 지천의 하구가 있어 개말이고, 서쪽은 새개(학포)입니다. 모두 강과 거기에 연한 개와 관련되는 지명이지요.

반월리 동쪽에 낙동강으로 뻗어 들어온 날끝에서 북쪽으로 펼쳐지는 초동면 신월리까지 벌판은 옛적 배후습지였을 것입니다. 그 흔적이 신호리 동쪽 제법 큰 규모의 초동저수지로 남아 있습니다.

신호리 새터마을에는 고려 팔은(八隱)의 한 분인 송은(松隱) 박익(朴翊)의 후손이 정착한 송은공파 종택과 송은 선생을 모신 사당인 덕남사가 있습니다. 또 신호리 대구마을에는 고려 때 정착한 밀양 변(卞) 씨 세거지가 있는데 조선 초 명문장 춘정 변계량(卞季良)이 태어났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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