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13) 창녕 비봉리 유적을 찾다

1월 15일 한파 특보가 발령된 낙동강에 섰습니다. 뉴스를 통해 보도된 대로 낙동강 사업장 준설토 작업장과 야적장 주변은 강한 모래바람으로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관리가 엉망입니다. 지난해도 이런 문제가 제기되어 시행청은 대비를 철저히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지만, 그냥 허언이었나 봅니다. 정부가 아닌 다른 이가 이런 식으로 안전 규정을 무시한 채 사업장을 운영한다면, 그이는 벌써 허가 취소라도 당했을 테지요. 그런데 나라와 국민을 위해 운영한다는 사업장이 이 지경이니 정부에서 그렇게 강조하던 소통이니 공정이니 하는 말의 진정성을 믿기 어렵습니다. 소통은 막힘없이 통하는 것이고, 공정이란 모두에게 바르게 적용돼야 하는 게 아니던가요. 매섭게 몰아치는 모래바람을 맞으며 소통과 공정이란 말의 진정한 의미를 냉정하게 되새겨 봅니다.

본포대교에서 바라본 낙동강. 낙동강 사업으로 작업장과 야적장 주변에 강한 모래바람이 일어 한 치 앞도 보기 어렵다. /최헌섭

◇구산리(龜山里) 지석묘군 = 낙동강 하류에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습지 유적인 비봉리패총을 향해 길을 잡습니다. 2010년 12월 28일자에서 지난 학포리를 지나니 구산리에 듭니다. 이곳에는 칠성바위라 불리는 지석묘가 떼 지어 있습니다. 모두 5기 정도가 열을 지어 흩어져 있는데, 원래의 자리에서 움직인 것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것은 상석의 재질이 변성퇴적암인 처트(chert=규질암)이고, 형태는 거대감이 느껴지는 덩이 꼴입니다. 지석묘가 자리 잡은 곳은 충적지와 구릉이 접속하는 곳인데, 대체로 이 지석묘가 놓인 곳(해발 5m 정도)은 보통의 수해에는 안전한 곳으로 여겨집니다. 앞서 본 청암리 지석묘군의 입지 고도와 비슷하며 대체로 이 정도가 수해에 안전한 고도를 이르는 기준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남두방 정려비 = 지석묘군 북쪽에는 남두방(南斗房)의 정려비가 있는데, 마을에서는 이곳을 효자만등(만딩이)이라 부르고 정려는 '남두방효자문'이라 합니다. 남두방은 열 살 어린 나이에 임종에 이른 어미에게 손가락 피를 흘려 넣어(단지주혈 斷指注血) 소생시키고, 돌아간 뒤에는 시묘(侍墓)를 한 효행으로 숙종 40년(1714)에 정려를 받았다고 합니다.

◇남휘·정선공주의 묘 = 지석묘와 효자만등을 지나 비봉리로 이르는 중간 즈음 강태동에는 조선 태종의 넷째 딸 정선(貞善)공주와 부마 남휘(南暉)의 묘소가 있습니다. 남휘는 의령 남씨 7세손으로 영의정을 지낸 남재의 손자고, 그 손자는 유명한 남이(南怡) 장군입니다. 원래 남휘의 묘는 경기도 안성시 양서면 장서리에 있었고, 정선공주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용인면 동천리 사후동에 있었는데, 1974년 3월에 이곳으로 옮겨 온 것입니다. 입구에는 신도비가 비각에 모셔져 있고, 와련산 동쪽 기슭에는 두 분을 모신 사당인 의산사(宜山祠)가 있습니다. 현재 이 묘역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습니다.

창녕 비봉리 유적에서 나온 1호 통나무배.

◇비봉리유적(사적 486호) = 비봉리 들머리에는 7000년 가까이 땅 속에 묻혀 있다가 이제야 세상에 드러난 놀라운 유적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위를 덮고 있던 6m에 이르는 세월의 두께를 걷어 내고서야 모습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 유적은 우리에게 많은 말을 전해 줍니다. 먼 옛날 이곳은 바다였노라고. 마지막 빙하기에 멀리 대마도까지 달아났던 낙동강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수 천 년의 세월이 필요했노라고.

이곳 학포리 뒤쪽 비봉리에는 신석기시대 조기의 해안과 그 곳을 이용한 저장공 및 당시의 배 등이 발굴돼 지금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습니다. 이 유적의 발굴을 통해 완신세(完新世) 초기의 자연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확보했으며,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꼽히는 통나무배가 발견돼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지금은 내륙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신석기시대 조기의 생활 유적이 발견돼 학계를 크게 들뜨게 했던 것입니다. 특히 이곳에서 나온 통나무배는 지금의 표고 기준치보다 2.5m나 낮은 곳이라 주목됩니다. 그 높이는 해수면(海水面)이 대체로 현재의 수준에서 안정화된 6000 y. BP 이전에 살았던 사람의 자취라고 보는 것이 고고학자와 지형학자의 견해입니다. 가장 아래층에서 출토된 통나무배에서 떨어져 나온 나무 조각을 시료로 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치는 6800y. BP(서울대) 또는 6710 y. BP(베타연구소)로 나왔습니다.

이 배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보다 앞선 시기의 배는 중국의 절강 소산(蕭山) 과호교(跨湖橋)에서 출토된 7500~8000y. BP의 통나무배(獨木舟)를 들 수 있는데,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때에 속합니다. 이보다 더 오래된 것은 네덜란드에서 출토된 기원전 6300년에 만들어진 배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곳 비봉리의 통나무배는 현재로서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셈입니다. 과호교에서 나온 배는 제작 기술과 만든 때가 창녕 비봉리의 통나무배와 비슷합니다. 제작 기법으로는 통나무 속을 불에 태워 깎아낸 자국인 초흔(焦痕)과 자귀로 깎은 자국이 관찰됩니다.

일본의 자료로는 구주의 천엽현(千葉縣) 부근에서 환목주(丸木舟)라 불리는 당시의 배와 노가 집중 발견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출토된 조빈(鳥浜) 1호 배나 이목력(伊木力) 유적 출토품보다도 이곳 비봉리의 배가 1000년 이상 앞서는 것입니다. 이밖에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해양 어로(漁撈)에 관한 자료가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묘사돼 있어 참조할 만합니다. 암각화의 고깃배 그림에는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이 배를 타고 출어(出漁)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과 함께 비봉리에서 출토된 두 척의 통나무배에 비춰보면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배를 타고 이웃과 교류하거나 고기를 잡으며 생활하던 일상이 정착해 가고 있음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비봉리유적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온 자료가 많은데요, 멧돼지를 그린 토기라든지 풀을 짜서 만든 망태기, 똥(糞) 화석 등이 있습니다. 당시 생활상을 헤아릴 수 있는 시설로는 집자리와 각종 저장구덩이를 들 수 있습니다. 특히 해안선을 따라 설치한 구덩이에서는 도토리가 많이 출토됐는데, 이것은 밀물 때 바닷물을 구덩이에 고이게 하여 도토리의 떫은맛을 우려내기 위한 장치입니다. 또 지난해 여름에는 1차 조사에서 나온 배와 시기가 같은 노(櫂:도)가 한 점 나와 이제 비봉리유적은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해양문화를 이해하는 기준 유적이 되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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