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11) 온정역 지나 임해진을 걷다
청동기부터 사람 살던 창녕 마을들, 이젠 준설토 야적장 전락

11월 16일자에서는 경남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온천인 부곡온천까지 걸으며 연원이 임해진과의 사이에 있던 온정역(溫井驛)에서 비롯함을 살펴봤습니다. 일대가 예부터 온천이었음을 알려주는 단서는 <고려사> 지 권제36 병2 참역 "금주도(金州道)는 31역을 거느리고 있다. …일문(一門; 계성) 온정(溫井; 영산)…"이라 한 기록입니다.

◇온정역(溫井驛)과 온정원(溫井院) = 부곡온천에서 임해진 쪽으로 접어드는 모퉁이에 있는 지금 온정리 온정마을이 고려시대부터 설치 운영된 온정역의 옛터입니다. 부곡리에 있던 온천 가까이 있었기에 이름이 비롯했을 것인데, 고려시대에는 금주도(金州道)에 속했고, 조선시대 전기 역제가 개편되면서 성현도(省峴道)에 배속됐습니다. 밀양 무안에 있던 수안역(水安驛)과 계성 일문리의 일문역(一門驛)을 이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위치를 현의 동쪽 20리라 했으니 영산현에서 보면 부곡리의 온정보다 3리가 더 멉니다. 부곡에서 3리 더 동쪽이면 바로 지금의 온정리이고, <해동지도> 영산현에도 그리 표시해 뒀습니다. <구한말한반도지형도>에는 이곳에 온정이란 지명과 역사(驛舍)를 표시했고, <한국지명총람>에는 온정마을을 '온정역-터', 온정 서쪽 들을 '둔전들' 또는 '둔전평(屯田坪)'이라 채록해 뒀습니다. 그러니 온정마을에 온정역이 있었고, 둔전은 바로 온정역에 딸린 역둔전(驛屯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 온정원(溫井院)도 있었는데,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부곡리에 있다고 나온 뒤 다른 지지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책이 간행된 뒤 곧 없어진 것 같습니다. 온정마을 동쪽 기슭에는 고려시대 이래의 질그릇과 독 조각이 흩어져 있고, 남쪽으로 약 500m 정도 떨어진 학동에도 같은 유적이 있어 이 일대가 온정역의 옛터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조선시대 사람과 물자를 날랐던 나루터 임해진(창녕 부곡면 청암리)에는 이젠 고깃배 두 척만 남아 옛 자취를 전한다. 맞은편은 주물연진.

◇청암리(靑巖里) 고인돌무덤 = 온정리 온정마을에서 임해진을 향해 500m쯤 내려가면 청암리 점촌(店村)마을에 듭니다. <문화유적분포지도 -창녕군(분묘유적)->에는 마을 앞 1080번 지방도 양쪽에 바둑판식 고인돌무덤 네댓 기가 있다고 나옵니다. 또 고인돌무덤의 한 돌널에서 민패토기와 간돌검(마제석검; 磨製石劍)이 출토됐다고 하나 지금은 소재를 알 수 없다 했습니다. 앞의 자료에 의하면, 고인돌무덤 가운데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것은 해발 5m쯤인데, 이 수치가 가지는 의미는 지금도 당시도 매우 각별합니다. 고인돌무덤이 만들어진 청동기시대에는 이 고도보다 낮은 곳은 토지 이용이 어려웠음을 일러주는 잣대 구실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는 하류의 창녕 부곡면 구산리, 창원 동읍 산남리와 용잠리, 창원 대산면 우암리, 밀양 하남면 수산리와 귀명리 등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네댓 기나 분포한다던 고인돌무덤이 지금은 보이지 않으니 다시 잘 찾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편, 청암리 안쪽 사창리(社倉里)에서는 2006년 늦은 가을에 시작돼 이듬해 봄까지 진행된 전지훈련장 예정지 발굴조사에서 청동기시대 전기의 움집 1동과 중기의 돌널무덤 40기, 고려~조선시대의 석열(石列) 등이 발굴됐습니다. 이 가운데 한 무덤에서는 12세 쯤 되는 소년의 이(齒) 26개가 한 무리로 나왔는데, 조사자는 무덤의 규모 등으로 보아 뼈를 추려 다시 묻는 2차장이나 신체 일부만을 묻은 것으로 헤아리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조사된 무덤은 창녕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 복원했습니다. 사창리 동북쪽 부곡리 가잿골에도 고인돌무덤이 있어 청암리~부곡리 골짜기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암리 점촌(店村) 가마터 = 점촌 마을 뒤 밤밭골에는 분청사기(粉靑沙器)를 굽던 가마터가 있습니다. 마을 이름 점촌(店村)은 분청사기를 굽던 이곳의 사기점(沙器店)에서 비롯했습니다. 분청사기는 주로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 사용했던 자기(瓷器)인데, 이곳에 가마를 만든 것은 배후 구릉에서 공급되는 풍부한 땔감과 골짜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 때문일 것입니다. 나루터인 임해진(臨海津), 육상 교통의 거점인 온정역과 가까운 점 등 편리한 교통 여건도 가마를 불러들인 인자가 됐을 것으로 헤아려집니다.

이곳에는 분청사기 외에 삼국시대 질그릇 조각도 흩어져 있는데, 맞은쪽 구릉 삼국시대 고분군과 연동하는 취락이 있었을 가능성을 일러주는 자료라 여겨집니다. 이런 자료들을 종합하면, 부곡리 사창리 온정리 청암리 일원은 청동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사람들이 살아온 터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4대강 사업이 진행되면서 이곳 골짜기 일원은 농지 리모델링이란 이름으로 낙동강 준설토를 쌓는 야적장이 돼 버렸습니다. 위 자료에 근거하면 적어도 사창리 온정리 청암리 청암마을 앞 들판에서는 준설토를 쌓기 앞서 옛사람들이 남긴 자취를 찾고자 하는 조사가 있었어야 했다고 생각됩니다. 아직 차실마을 앞 들판에는 원래 지형이 그대로 유지되는 부분이 남아 있으니, 최소한 이곳이라도 유적 분포 여부를 명확히 한 뒤 공사가 진행되기를 제안합니다.

◇임해진(臨海津) = 점촌마을에서 낙동강을 향해 1.5km정도 나오면 임해진(臨海津) 또는 임해연진(臨海淵津)이라는 나루터가 나옵니다. 지금도 고깃배 두어척이 매어져 있어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만, 전에는 맞은쪽 주물연진을 잇는 나루 구실을 제대로 했습니다. 또 온정역 들머리가 되어 온정~온정역~임해진~주물연진~창원~웅천 제포를 잇는 왜사(倭使)의 회송로(回送路)였음은 지난 번에 살펴 본 바와 같습니다.

임해진의 존재는 조선시대 지지에는 없고, <해동지도>에 나룻배(진선; 津船)가 있다고 나올 뿐입니다. 나루로서 주요 기능을 맞은쪽 주물연진(主勿淵津)에서 수행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해서 임해진(臨海津)이라 했다는데, 어느 시기에는 맞을 수도 있지만 그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낙동강 하구에 둑을 막기 전에는 밀양 수산다리 근처까지 감조대(感潮帶)가 형성됐다고 하므로 밀물 때 하구로부터 배가 거슬러 닿기 쉬운 자리임은 사실입니다.

이곳 나루의 개설과 관련된 꽁생원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임해진 위 부곡면 굴말에 부자지만 인색한 꽁생원이 있었답니다. 마을 사람들이 1년 동안 나룻배를 띄워주면 송덕비를 세워주겠다고 꼬였더니 정말로 배를 사서 띄웠답니다. 그래서 세워준 비석이 제방에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얼마 전에 없어져 버렸습니다. 나루가 열린 사연을 담고 있을 터인지라 꼭 찾아 원래 자리에 다시 세우고 싶습니다.

이곳 임해진 강가에는 소우정(消憂亭)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당호를 그리 지은 뜻은 정자에서 강바람을 쐬며 근심을 씻고자 함이었을 텐데, 지금 주변 풍광은 오히려 시름만 쌓이게 하고 있어 이름이 무색할 지경입니다.

/최헌섭(역사연구공간 두류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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