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비리길, 그곳엔 낙동강이 따라 걷고 있었네

아지리 영아지 마을에서 강가 비탈을 따라 용산리 창날로 가는 곳에 이제는 몇 남지 않은 귀한 비리길(벼룻길)이 있습니다. 2008년에 발행된 5만분의1 지형도 남지에는 '개비리'라 표기하였으나 길을 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항공사진에서는 판독이 되지 않아서일 터인데, 그것은 강가의 공격사면을 따라 난 비리길을 수풀이 가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명으로 보자면 강변의 벼랑에 난 좁고 험한 벼룻길이 있었다는 이야기일 터입니다.

비리길은 벼랑길을 일컫는 벼룻길을 우리 삶터에서 부르는 말입니다. 벼루는 강이나 바다로 통하는 낭떠러지를 벼랑과 구별하여 부르는 말이고 이리로 통하는 길이 벼룻길인 것입니다. 또한 개는 한자로 포(浦)라 적고, 포는 물가·비탈·기슭 및 하구(河口)를 이르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개비리는 개에 있는 비리, 곧 강 가 비탈길을 이르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비리길은 이미 지나온 이방면의 등림과 현창 사이에도 있고, 합천과 초계 사이의 황강 가와 진주에도 있습니다.  

아지리 영아지 마을에서 강가 비탈을 따라 용산리 창날로 이어지는 개비리길. 옛길을 찾아 걷는 사람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강변 벼랑에 난 좁고 험한 길…옛길 걷기 탐방 명소로 부각

합천의 개비리(견천: 犬遷)는 합천과 초계의 암캐 수캐가 서로 만나러 다니던 길이라는 생성 설화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개가 강이나 바닷가의 비탈을 이르는 말임을 잊고 그런 스토리텔링을 빚어 낸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니 개비리를 일러 개나 겨우 다닐 만큼 좁고 험한 길이라는 표현은 길의 현상은 설명할 수 있으되 본질에 대한 풀이는 아니라 여겨집니다.

이곳의 개비리는 지금도 잘 남아 있어 옛길 걷기 모임에서 즐겨 찾는 탐방 명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서 사는 사람들은 새로 난 길을 이용하고 있어 현지인들에게는 점차 잊히고 있는 모순에 처해 있습니다. 이 길은 좁은 곳이 1.5m 정도이고, 넓은 곳은 2.5m에 이르며, 대체로 너비가 2m 안팎이어서 인마의 통행에는 지장이 없어 보입니다. 이곳에서 만난 한 주민(70대 중반)의 이야기로는 1970년대까지도 오토바이를 타고 남지로 다녔다고 하며, 지금은 마을사람들이 이용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걸어보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닌 자취가 남아 있는데, 아마도 옛길을 찾아 걷는 사람들이 남긴 것인 듯합니다.

얼마 걷지 않아 너럭바위를 만나게 됩니다. 여럿이 앉아 쉴 수 있을 만큼 넓적한 바위는 퇴적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강 밖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으나 반듯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위의 겉에는 먼 지질시대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반듯하게 열을 지어 남아 있습니다. 발자국 끝이 둥그스름하니 뭉툭한 것으로 보아 초식 공룡인 용각류(龍脚類)의 것으로 여겨집니다. 4대강 사업에 앞서 진행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는 이곳의 공룡발자국 화석이 보고되지 않았는데, 이 또한 우리가 보존해야 할 귀중한 문화유산이므로 그 보존 대책도 분명하게 수립되어야 합니다.

너럭바위엔 공룡 발자국이…홍의장군 설화 깃든 용산리

이곳에서 동행한 걸음이들이 이 비리길이 언제 열린 것인지 물어옵니다. 저로서도 답하기가 시원스럽지가 못합니다만, 그리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우선 옛 지도나 지지에 기록된 바가 없고, 또한 전통시대에는 이리로 길이 열릴 만큼 교통의 요충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길이 열린 영아지와 용산리 창날 사이에 사람이 살만한 터전이 없다는 것도 그렇게 헤아릴 수 있는 배경으로 작용합니다만, 아직은 이런 추정의 근거를 더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바위를 지나 개비리길의 중간쯤에 이르자 작은 만입부가 있고, 거기에는 대나무가 빽빽이 자라고 있습니다. 바로 사람이 산 자취인 것입니다. 대나무 숲을 헤치고 드니 사람이 떠난 집이 한 채 나옵니다. 사람들은 이 집을 일러 귀곡산장이니 어떠니 말을 일삼지만, 지은 지 그리 오래지 않은 어느 문중의 재실입니다.

어렵사리 비리길을 빠져 나오니 용산리에 듭니다. 이곳 용산리의 첫 마을은 창날 또는 창나리라 불리는 곳인데, 바로 창이 있던 나루라 한자로는 창진(倉津)이라 적습니다. 마을의 뒷산은 창진산(倉津山) 또는 말무덤이 있어 마분산(馬墳山)이라 불리는데, 바로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가 부린 말을 묻은 말무덤이라 전해지는 봉토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생성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적의 거센 공격을 흩트리기 위해 망우당(忘憂堂) 곽 선생께서 말의 꼬리에 벌통을 매달아 개비리 뒤 진지에서 적진을 향해 달리게 했더니 말의 꼬리에 달린 벌통에서 벌 떼가 쏟아져 나와 적진을 크게 교란시켜 이 틈을 탄 의병들이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말이 죽게 되어 공께서 이를 거두어 이곳에 장사지내니 그것이 바로 이 말무덤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 말을 묻은 무덤이라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큰무덤'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여기서 '말'은 으뜸을 뜻하는 '말'·'마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함안 가야읍 말산리의 말산(末山)에는 가야시대 우두머리들의 무덤이 떼를 지어 분포하는데, 게서 그런 용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말산은 달리 말이산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말'이 '머리'를 뜻함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말산 혹은 말이산은 가야읍 한 가운데에 솟은 구릉인데, 위치상 중심이어서 그리 불렀을 수도 있고, 그곳에 분포하는 무덤이 우두머리의 것이어서 그리 불렀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으뜸 또는 한가운데를 뜻하는 말·마라를 한자의 소리를 빌려 표기한 것일 뿐입니다. 이곳 창녕에는 유사한 생성 설화를 가진 '말무덤'이 여럿 있는데, 고곡리와 송진리에도 망우당과 관련되는 말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최헌섭 역사연구공간 두류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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