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통력 강조한 길이 10m 대형 불화

동북아시아의 불교 문화를 공유했던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의 특징적인 불화이며, 진주 유일의 국보(302호)인 청곡사 영산회괘불탱.

이 영산회괘불탱은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 월아산에 위치한 청곡사(전통사찰 제74호)내에 마련된 불교문화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청곡사 영산회괘불탱은 조선 후기 가장 대표적인 불화승인 금어 의겸대사가 열명의 화승과 함께 조선조 경종 2년(1722)에 제작한 것으로 길이 10m, 폭 6.37m에 달하는 야외 의식용 불화이다.

진주 유일 국보…화려한 문양 특색

진주시 금산면 월아산 청곡사에 보관중인 진주 유일의 국보 영산회괘불탱. /청곡사 제공
의겸은 18세기 중후반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 사찰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불화를 제작했는데, 평생 다섯 점의 괘불을 남겼다고 한다. 특히 의겸이 그린 괘불은 모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다보불과 아미타불, 관음·세지보살, 문수·보현보살의 네 보살로 이뤄진 공통점을 보인다.

이 가운데 청곡사 영산회괘불탱은 의겸이 그린 괘불 중 시대가 가장 앞선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상도를 그린 괘불로 화려하고 다채로운 문양이 특징이다.

괘불은 '거는 불화'라는 의미이며 법당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인 불교 의식에 사용하는 의식용 불화이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고 수 많은 사람들의 소망을 이뤄줄 수 있는 신통력을 강조하기 위해 크게 그린다고 한다.

이 괘불은 본존불인 석가를 중심으로 양 옆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배치돼 있다. 석가는 얼굴이 둥글고 풍만한 모습에 상체는 짧지만 당당하고 우람하게 표현돼 있으며 가슴을 과감히 노출시킨 점이 눈에 띈다. 옷은 붉은색과 녹색으로 채색했고 어깨에 걸친 옷은 중후하게 묘사했다.

조선 후기 대표 불화승 의겸이 제작

석가의 왼쪽에는 문수보살, 오른쪽에는 보현보살이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다. 본존보다 약간 작은 신체, 화려한 보관, 둥근 얼굴, 정면을 향한 자세 등이 매우 당당하고 화려한 모습이다. 복잡하고 화려한 꽃무늬와 장신구가 보살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보살의 머리 위에는 석가의 10대 제자인 아난, 가섭존자 등 제자상이 배치돼 있으며 최상단 왼쪽에는 백의관음보살과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이 자리하고 있다.

석가불, 문수보살·보현보살을 화면 가득 배치한 구도, 당당하고 건장한 체구, 둥글고 원만한 얼굴, 화려하고 밝은 색채와 꽃무늬 장식 등에서 18세기 초반의 불화 가운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석가·문수·보현의 삼존불입상이라는 점에서 예천 용문사의 괘불도와 비교되고 있으며 불교회화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매우 가치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이러한 청곡사 영산회괘불탱이 한때 자신의 안식처를 떠난 적이 있다. 이는 9년 여 전인 지난 2000년 7군데가 찢어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은 물론 청곡사의 일부 유물들이 도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훼손·떠돌이 수난…작년 제자리로

이에 청곡사는 괘불을 수리한 뒤 보관할 장소를 찾아 나섰지만 이 대형 국보를 맡아 보관할 만한 곳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냥 방치되다시피 했다. 이후 2001년 청곡사 주지로 부임한 서강 스님이 국보를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오랜기간 동안 수소문에 나선 끝에 드디어 6개월간에 걸친 대대적인 수리작업을 하게 됐다.

더구나 서강 스님은 2003년 10월부터 도내에서 유일하게 보관이 가능한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는 성과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전국을 통틀어 어마어마하게 큰 청곡사 영산회괘불탱을 보관할 수 있는 곳은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을 비롯해 몇 군데밖에 없다.

그러나 청곡사 영산회괘불탱의 '남의 집 살이'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청곡사내에 불교문화박물관이 건립됐고 지난 2008년 4월 23일, 5년 가까이 여행을 떠나 있었던 영산회괘불탱이 마침내 고향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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