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이기도 한 진주교대 송희복 교수는 최근에 낸 <전환기의 문학> 서문에서 지난 20세기를 흑백의 시대로 규정하며, 21세기는 그간의 선악이분법과 흑백논리가 설자리를 잃고 ‘회색비전’이 시대사적인 희망의 지표가 되리라 했다. 그리고 그는 지난 세기가 이성의 광기에 의해 자행된 야만의 시대라는 많은 지식인들의 지적에 동의한다며, 그 근거로 빈번했던 전쟁과 혁명을 들었다. 분명 그랬다. 20세기는 그의 보충설명이 없더라도 2차 세계대전, 볼셰비키 혁명, 걸프전쟁, 한국전쟁, 4.19혁명, 5.16 군사 쿠데타 등 국내외 할 것 없이 크고 작은 전쟁과 혁명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모든 전쟁과 혁명이 상황논리와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방법들의 근본적인 속성, 예컨대 비타협성.폭력성은 다수의 희생을 대가로 요구한다. 여기에서는 나와 너를 명확히 구분하여 상대방을 완전히 섬멸하거나 무릎 꿇리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다. 따라서 이런 전쟁과 혁명에서는 어떻게 하면 아군에 대한 명분과 적군에 대한 적개심으로 무장하여 소기의 목적을 온전히 달성하느냐가 문제이지, 타협하고 협상하여 너와 내가 같이 살 수 있는 길을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다. 아니 이는 전선을 교란하는 이적행위에 해당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는 흑과 백을 갈라 오로지 싸울 뿐이다. 이성은, 또는 지성은 자유성을 포기하고, 맹목적 당파성을 좇을 수밖에 없다. 소위 가장 이성적이고 지성적이라는 지식인도 이런 상황에서는 그의 이성과 지성을 어느 일방의 이데올로기나 전술가로서 복무하는 데 무기로 쓸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회색분자로 몰려, 이쪽에서건 저쪽에서건 몰매 맞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전선엔 완충지대, 또는 흑과 백이 공존하는 회색지대는 없었다. 모두가 흑과 백의 극단에 서서 서로 창을 겨누고 화살을 날렸을 뿐이다. 이 극단 대치의 전쟁과 혁명의 전장에서 한 세기동안 얼마나 많은 인류가 처참하게 죽어갔는가.

생명과 인간을 저버리는 이성의 광기는 이데올로기의 지나친 집착과 극단적인 편향에 의해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광기를 이성보다는 맹목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이비 종교나 극우.극좌의 정치집단에서 주로 발견하게 된다.

송교수가 21세기를 ‘회색비전’의 시대로 전망했음에도, 그리하여 21세기가 가속도를 붙여 가는 이 시점에도, 지난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극우.극좌의 비이성적인 준동은 여전하다. 평양방문단의 방명록 사건이나, 그렇다고 이를 기회로 한 정권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핵심적인 정책의 담당자를 수적 우위라는 물리적 방법으로 끝내 중도하차 시켜버리고 만 해임결의안 사건이나, 지금 한창 들끓고있는 미국의 비행기 테러사건이나 모두 맹목적 이데올로기에 매달린 극좌.극우 논리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 결과는 상생이 아니라 상살(相殺)의 처참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혹은 그런 징후를 보이고 있다.

만일 우리 사회에 흑과 백을 아우르는, 또는 중재하는 회색지대가 있었던들, 또는 그것을 인정하는 온전한 이성이 있었던들, 그동안 양쪽의 충돌로 인해 겪어야했던 우리의 고통은 훨씬 가벼웠을 것이다. 송교수의 말대로 회색은 인내와 포용성과 상호이해의 감각을 지닌 색이다. 이에 따르면, 회색의 논리는 협상과 타협, 그리고, 중재와 완충으로서의 논리일 수 있다.

좌우, 혹은 흑백 극단의 논리만 횡행하는 이 시절, 그리하여 도대체 화해와 절충과 타협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사생결단의 싸움판에서 회색이 그립다. 진정 인간의 이성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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