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학급의 자립학교에 입학할 경우 학생 1인당 납입금이 무려 390만원, 18학급의 경우 360만원이나 내야 하는 곳이 자립형 사립학교다. 자립형 사립학교의 학급당 학생 수는 30명 이내로 하고 국민공통기본 교육과정 이외에는 학교자율로 가르칠 내용을 선정할 수 있다. 국어.영어.수학위주의 지필고사는 금지하고 다양한 특기와 적성을 반영해 학생을 선발하겠다 는 것이 정부가 발표한 자립형 사립고등학교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지난 7일 이러한 내용이 담긴 ‘자립형 사립학교 시범운영’을 발표하면서 2002학년도에 전국에 10~30개 이내의 자립형 사립학교를 시범운영하기로 하고 10월 20일까지 대상학교를 선정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교육부의 이러한 방침에 전교조를 비롯한 시민단체와 학부모단체는 즉각 성명을 내고 반대하고 나섰다. 자립형 사립고등학교가 설립되면 교육기회의 불평등 조장은 물론 입시위주 귀족학교의 출현, 교육 빈부격차 확대 등 심각한 문제점이 생길 것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립형 사립고는 평준화 정책을 근본적으로 깨뜨리는 무책임한 졸속 정책이라며 과거 입시명문고의 부활을 초래할 교육 포기 선언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의 자립형사립고 설립 추진계획에 대해 서울시교육청은 자립형사립고는 ‘귀족학교’ ‘입시학교’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유인종 서울시교육감은 8일 “자립형 사립고는 입시 과열을 부추기는 과거의 망령을 불러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며 “서울에서는 자립형 사립고 시범학교를 운영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서울시에 이어 대구시와 경북도 자립형 사립고와 관련, 충분하게 검토한 뒤 도입여부를 결정키로 했다고 한다.
자립형 사립학교는 영국이나 미국에서 볼 수 있는, 글자 그대로 학생의 등록금과 학교재단의 전입금 등으로 운영하면서 학생 선발과 교사 충원, 교육과정의 편성 등에 대해 자율성을 갖는 학교를 뜻한다. 자립형 사립학교는 지난 95년 김영삼정부 당시 교육개혁위원회가 도입을 추진했다가 백지화됐고 지난해 교육발전 5개년 계획 시안에도 포함됐다가 평준화정 책에 어긋난다는 여론 때문에 시행이 유보된 바 있다. 해외유학의 급증, 교실붕괴, 학력저하에 대한 대안으로 교육부가 내년부터 10~30개의 자립형 사립학교를 시범 운영하겠다고 하지만, 자립형 사립고교와 영재학교의 설립은 사실상 1974년부터 시행된 고교 평준화 제도를 부분적으로 해제하는, 교육의 틀을 바꾸는 일이다.
평준화제도는 그동안 고입 경쟁으로부터 중학교 교육의 정상화, 과열과외 예방, 고교 교육기회 확대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학습능력이 천차만별인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규격화된 수업을 받게 하는 바람에 ‘하향 평준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고교평준화정책은 고등학교의 서열화를 철폐하고 중학생을 입시지옥에서 해방시키는 교육의 기회균등을 실현해 왔던 것이다.
교육소비자의 학교 선택권과 사학의 본질적인 기능을 되살리고 변화하는 사회에 다양한 능력을 가진 인간양성을 위해 자립형 사립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과학고등학교나 외국어고등학교와 같은 특수목적고등학교가 설립취지와는 다른 입시명문고등학교로 전락한 실패에서 보듯 자립형 사립학교는 또 다른 입시명문학교가 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일류대학을 나와야 사람 대접받는 사회에서 입시제도와 학부모들의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어떠한 특색 있는 학교도 성공할 수 없다.
아니 자립형 사립학교가 설립.운영되면 중학교에서부터 입시전쟁이 다시 시작돼, 학부모들은 사교육비부담에 더더욱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학교는 입시준비를 위한 학원화되어 인간교육은 그 가능성을 원천봉쇄 당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자립형 사립고는 돈이 없으면 입학할 수 없어 계층간에 위화감을 조성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세습화시키게 될 것이다.
교육을 황폐화시키는 시장논리는 중단해야 한다. 선진국에서 실패가 확인된 자립형 사립고를 다시 설립해 교육을 황폐화시키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은 전면 백지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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