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기, 그것도 새 천년의 벽두가 이 땅에서는 여전히 음울하고 살벌하다. 고단하고 팍팍하기야 오히려 더하다. 세기말의 언덕을 어렵사리 넘어 이제 막 내리막 길을 내달릴 참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수레바퀴는 여기서 요지부동이다.

막바지가 하도 가파르고 험하여 끄는 자와 미는 자를 자리바꿈하고서야 겨우 한 고비를 넘어섰음이다. 그리하여 그 노고와 성취에 마땅한 갈채와 보상이 있어야 할 판이었다.

그 자리에서는 그 동안의 공과에 대한 선선한 격려와 아량을 띄워 서로 목축일 물이라도 한잔 건넬 일이었다. 또한 그리하여 다시 가야 할 길을 위해 서로 부축하고 어깨동무할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히도 정녕 기대했던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보지 못했다. 아주 잠시 어색한 악수가 있었고, 새소리 몇 음절, 바람 몇 올이 건듯 날렸을 뿐이었다. 공과야 엄연히 가릴 일이지만, 서로의 ‘공’을 부추기는 데는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또한 내세우는 데에는 겸손함이 없었다. 자신의 ‘과’를 비는 데에는 반성과 진정이 없었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아량과 관용이 터럭만큼도 없었다. 오직 뻔뻔함과 오만함만 맞닥뜨릴 뿐이다.

뒷자리로 몰렸던 이들은 벌써부터 앞자리를 우격다짐으로 다시 빼앗으려 혈안이고, 잠시 앞자리 맛을 본 이들은 결단코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뒷자리는 한사코 뻗대고, 앞자리는 막무가내로 달아나려고만 한다.

마침내 수레는 내동댕이쳐지고, 싸움판은 사생결단의 멱살놀음에 악다구니로 뒤엉킨다. 말은 이미 금도를 넘었고, 이성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수레를 내려선 이들도 언덕을 올라올 때의, 그 몇 번이고 곤두박질할 뻔했던 아찔한 기억을 잊고, 구경꾼이 되어 다시 편가름하고 있다.

이 음산하면서도 살벌한 싸움앞에, 아주 잠시 지저귀던 산새도, 등허리를 어루만지던 바람은 흔적도 없다. 시야는 다시 캄캄해지고, 추적추적 비까지 내린다. 이 지점에서 앞자리를 빼앗긴 쪽에서는 잘 훈련시킨 검객들을 앞세워 ‘홍위병’이라거나 ‘포퓰리즘’이라거나 ‘사회주의’라거나, 한동안 무덤 속에 묻었던 보도를 꺼내 날을 간다. 검은 이미 녹슬어 광채는 예같지 않되, 그 위력은 여전히 놀랍다. 마침내 바위를 쪼개듯 군중들을 오른편 왼편으로 갈라놓고야 만다. 역시 그 솜씨는 날렵하면서도 노련하다.

판세를 읽고있던 구경꾼들의 잰걸음이 오른쪽으로 쏠리고 있다. 아직 왼쪽에 섰거나, 싸움을 만류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에게까지 예의 그 무시무시한 ‘붉은 색깔’을 덧씌운다. 여기에 게임의 법칙을 말하는 자들은 ‘사주를 받은 자’로 매도한다. 색깔론에 있어서는 이 시대 최고수임을 자랑하는 어떤 논객은 ‘사주한 놈이 엎어지면 사주를 받아 설치는 놈들도 기필코 손보고 말리라’는 가히 위협적인 논고를 벌써부터 준비해놓고 있다. 설친 정도에 따라 처단의 등급까지 매겨놓은 상태란다.

한 쪽의 반격도 만만찮다. 현재의 뒷자리가 앞자리에 있으면서 저질렀던 비리, 그 과거의 행적을 낱낱이 들추어 목을 겨눈다. 앞자리가 가진 도구와 수단은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모두 동원한다. 뒷자리의 으레 있을 수 있는 투정이나 가벼운 딴죽 걸기도 깡그리 수구, 혹은 기득권세력의 반발로 몰아붙인다. 판을 이끄는 이로서의 최소한의 인내와 포용과 아량도 없다. 그리하여 지금은 가히 서로 목숨을 건 진검승부를 벌이고 있다.

분명 이 싸움이 영화나 소설 따위, 가상세계의 장면이라면, 스릴.서스펜스 만점의 재미와 흥분을 만끽할 일이지만, 이십일세기 벽두에 실존하는 우리의 현실이라면, 이건 소름끼치는 공포다. 공멸을 부르는 미친 짓이다.

언젠가 누군가의 말을 빌려, 당장 편가르기를 중단하고,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 우리가 갈 길은 멀다.

/오인태(시인.경남작가회의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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