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왜 소설을 안 읽어?" 서점에 같이 들른 딸아이가 소설책 코너에서 책을 고르며 내게 묻는다. "소설을 안 읽는다기보다 소설책 사는 돈이 아까워. 소설책 정도는 도서관에서 빌려(소설가들이 들으면 경을 칠 소리지만) 읽고 두고두고 읽을 책을 사야지." "헐! (요즘 아이들이 어이없을 때 쓰는 감탄사다.) 엄마는 너무 비문화적이야. 소설이 얼마나 다양한 것을 말해주는데. 엄마의 책 고르기는 너무 직업적 의무감에 치우쳐있는 것 같아." 나야말로 '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약점을 들켜버려서다.

딸이 권한 오쿠다 히데오 소설

사람마다 독서 취향이 다르지만 사실 소설에는 크게 흥미가 없었다. 학창시절엔 어쭙잖게 사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골몰하느라 철학이니 이념이니 했던 것 같고, 직장 생활하면서는 더러 실용서를 읽거나 말과 글을 따져 읽었다. 문화부에서 출판 면을 맡았을 땐 더 의무감이 짙었다. 이때도 나름 원칙이 있었다. 되도록 처세술이나 시류 편승한 유행서적은 소개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소개하지 않아도 이미 많은 사람이 소문이나 서점가에서 사봤을 터. 그러니 그런 처세술보다는 좀 더 깊이 있는 내용을 담은 책이 적절하다고 보고, 고르고, 읽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주 소설을 읽지 않은 건 아니었다. 몇 년 전 닥치는 대로 책읽기를 하던 무렵엔 <토지> <태백산맥> <혼불> 등 대하소설류를, 중고등학생 땐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봤고, 프란츠 카프카의 것도 읽었다. 그래도 주위에서 권해서 읽은 편이었으니 이것도 어느 정도 의무감이 작용한 게 맞다. 소설의 맛을 느끼는 단계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 면에서 딸아이는 적어도 '재미있게 소설읽기'에 관한 한 나보다 한 수 위다. 요즘엔 딸아이가 추천해주는 일본소설을 더러 읽는다. 처음엔 일본 대중문화의 내용을 좀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대중문화개방 이후 일본소설은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경이라는 말이 나오던 참이다.

문화란 흐르는 것이고, 그러므로 일본소설이 좀 더 많이 읽힌다고 해서 그리 과하게 걱정할 지경은 아니라고 해도, 이유는 궁금했다. 딸아이는 우선 '가볍고 경쾌한 재미'를 꼽았다. 소재가 독특한 것도 많다고 했다.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재미를 주니 그것이 요즘 젊은이들에게 먹혀든다는 게다. 나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과연 그런 느낌을 받았다.

최근 읽은 것 중 <공중그네>로 잘 알려진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장편 <남쪽으로 튀어!>는 참 재미있었다. 초교 6년생 남자애 지로가 화자인데, 그 나이 때의 성장통, 학교, 가족에 대한 시선을 두루 엿볼 수 있다. 이야기의 축은 백수인 급진파 무정부주의자 아버지다. 1권은 도쿄 생활이다. 180이 넘는 거구의 백수인 아버지와 주변얘기다. 집에서 뒹굴면서도, 국민연금납부를 독촉하는 공무원에게 '일본국민 때려치겠다'고 큰소리치는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학교도 가지 말란다. 국가가 길들이는 것이라면서. 아들의 눈엔 당연히 말썽 덩어리다. 한데 원치않는 일에 엮여 가족이 남쪽 섬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또 다른 삶을 만난다.

2권은 섬 생활인데, 이게 엄청 재밌다. TV는커녕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에서, 집도 없이 살게 되었다고 아이들은 걱정한다. 한데 웬걸, 그 섬에서 아버지는 전설적인 인물의 자손이라며 섬사람들이 환영해주고, 집도 주고 먹을 것도 주고. 인심 좋은 공동체 생활을 맛본다. 하지만, 평화는 잠시. 섬에 호텔 짓겠다고 덤비는 업자에 혈혈단신 맞서는 등 정의의 투사 아버지는 '말썽'을 달고 다닌다.

경쾌하나 깊이 담긴 재미 줘

처음엔 오지랖도 넓다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아들. 그러나 곧 아버지에 매료되고, 희한하게도 가족들 모두 아버지를 닮아간다. 문체가 가벼워 술술 읽히면서도 결코 담고 있는 내용이 가볍지 않다. 다음은 감동적인 대사 한 구절. "지로, 전에도 말했지만 아버지를 따라하지 마라. 아버지는 약간 극단적이거든. 하지만, 비겁한 어른은 되지 마. 제 이익으로만 살아가는 그런 어른은 되지 말라고." 줄거리 소개가 좀 길었다.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려주고 싶어서다. 뭔가를 목적하고 읽은 책읽기가 아니라, 사전 지식 없이 자유롭게 읽었는데 의외로 감동받는 것, 그것이 진짜 책 읽는 묘미임을 말하고도 싶었다. 무한경쟁, 규칙, 질서, 공부, 성적지상주의, 이런 것들에 매인 우리 대한민국의 부모와 자식들, 삶이 이토록 고통스럽고 팍팍해야만 하는지 의문이 드는 사람들, 이 책 한 권 읽어보시라 권한다. 현실을 비틀어주는 해방감이 있고, 동시에 어떻게 사는 게 진짜 삶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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