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이 대선 슬로건을 뭐로 하느냐를 놓고 심한 당내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이른바 '코리아연방공화국' 논란이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대통령'으로 결정되긴 했지만 아직도 갈등은 계속되고 있단다.

'코리아연방공화국'이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말이 가진 정치적 의미 때문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은 북한의 '고려연방공화국'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곤 민주노동당이 그리는 국가비전이 결국 '북한 체제'란 말인가 라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동의할 수 없는 당원들은 필사적으로 막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코리아연방공화국'의 파롤

오래전에 배웠던 것이라 기억이 아련하긴 하지만, 이렇듯 모든 말에는 랑그(langue) 외에도 파롤(parole)이라는 함의가 있게 마련이다.

얼마 전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네이스(NEIS)'와 관련한 학부모 통신문이 왔다. 그러나 거기엔 분명한 한글표기로 '나이스'라고 적혀 있었다. 스펠링에 충실한 발음은 '네이스'가 맞는데 정부기관에서는 굳이 '나이스'를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nice(좋은)'이란 단어가 가진 긍정적 효과를 노렸음이 분명하다.

내가 마산을 수식하는 단어 중 유독 '가고파'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같은 이유다. '가고파'는 권력에 빌붙어 전형적인 기회주의 삶을 살아온 어용문인 이은상이 지은 노래다. 따라서 '가고파'를 마산의 모든 행사 이름으로 쓰는 것은 권력에 저항한 '3·15정신'을 희석시키고 싶어 하는 기득권 세력의 정치·사상적 파롤이 숨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권력형 비리를 저질러 검찰의 수사를 받는 정치인들이 버릇처럼 쓰는 말이 있다. 이른바 '표적수사'가 그것이다. 고소·고발에 의한 수사가 아닌 것은 모두 표적수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검찰의 입장에선 '기획수사'가 맞다. 언론의 취재도 마찬가지다. 숨겨진 이면을 파헤치는 취재·보도를 '기획취재' 또는 '탐사보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 보도에 의해 자신의 잘못이 까발려진 사람의 입장에선 '표적취재'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네거티브' '상호비방'이란 말도 그렇다. 선거는 후보 검증의 과정이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의혹은 철저히 규명되어야 한다. 수사기관이나 언론이 제대로 검증을 못 하면 상대후보라도 나서서 해야 한다. 그게 선거다. 하지만, 그런 검증을 받기 싫어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정당한 의혹 제기 비판, 검증까지 '네거티브'와 '비방'으로 몰아붙이고 싶어 한다. 정작 검증에 나서야 할 언론도 자기 입맛에 따라 '네거티브는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상징을 유포한다.

나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시위장면을 보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순진하게도 펼침막이나 손팻말에 어김없이 '신자유주의 반대'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신자유주의'의 정치·경제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이 볼 때 '새로움'과 '자유'라는 그토록 좋은 말을 왜 반대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말을 쓰더라도, 적어도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른 단어를 써야 한다고 본다. 가령 '시장제국주의'라든지 '강자독식주의', '무한경쟁주의'라는 말을 쓰면 얼마나 명징한가.

또 있다. '한·미FTA 반대'라는 구호도 마찬가지다. 이 구호로는 왜 반대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것도 반대의 이유를 분명히 드러낸 '한·미 노예협상 반대'라고 하면 어떨까.

'시장제국주의'로 부르자

전교조에서 그토록 반대해왔던 '교원평가제도'도 그렇다. 사람들은 교사에 대해서도 평가를 하자는 게 왜 잘못된 일인지 모른다.

교사는 평가조차 거부하는 완고하고 권위적인 집단처럼 비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구호도 '교원평가제도 반대'가 아니라 '교원통제제도 반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심지어 '국가보안법'도 반대하는 입장에선 '양심구속법' '사상통제법'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어가 가진 일차적 의미만 놓고 보면 '국가 보안'은 당연히 지켜야 할 중요한 일이다. 세상에 그 중요한 일을 반대한다니….

'코리아연방공화국'이라는 슬로건을 만들어낸 민주노동당 내 사람들도 그 말에 담긴 시대와 정치와 이념적 파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걸 만들어내느라 머리깨나 굴렸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한·미 노예협상'이나 '시장제국주의' '강자독식주의'는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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