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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의 요람, 가톨릭과 기독교

[87년 경남, 6월에서 9월까지 항쟁의 기록]⑧87년 이전의 지역 재야운동

김주완 기자 wan@idomin.com 2007년 07월 12일 목요일
   
 
  경남 최초의 공개대중운동단체로 발족된 민통련 경남지부가 85년 5월 가톨릭여성회관에서 진보적 경제학자인 박현채 선생(작고) 초청강연회를 열고 있다.
/6월민주항쟁 기념 경남추진위 제공
 
 

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거점은 대학과 교회였다. 이에 대해 한 사회학자는 "세계적으로도 그 전례를 볼 수 없는 희귀한 현상"이라며 "(대학과 교회만이) 오직 국가권력의 통제가 상대적으로 덜 미치는 '해방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김동춘, 1980년대 민주변혁운동의 성장과 그 성격, 1997)

김동춘 교수의 분석처럼 경남에서도 대학을 벗어난 대부분의 사회운동은 가톨릭과 기독교의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졌고 성장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살펴봤던 '87년 이전의 농민운동'도 그랬고, 노동운동 또한 그랬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83년 한교회에서 펴낸 주보창간호, 87년 4월 한교회에서 열린 문동환목사 초청강연 팸플릿, (주)통일 노동자의 투쟁을 지원히는 경남민통련 성명서, 경남민주통일국민회의 창립선언문.  
 

거제 출신으로 70년대 중반부터 부산에서 사회운동을 하다 84년 마산·창원에 온 허진수씨 역시 '한국기독교장로회 전국청년회' 출신이다. 74·75년 거제에서부터 청년회 활동을 하던 그는 76년 대한조선공사(현 대우조선해양)가 거제 옥포에 들어오면서 강제이주를 당해 부산으로 옮겼다.

그후 부산지역 재야운동의 아버지격인 고 최성묵 목사가 있던 보수동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청년운동을 하던 중 79년 부마항쟁에 연루돼 쫓기는 신세가 됐고, 80년 7월 전두환 신군부정권에 연행돼 합동수사본부에서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다.

그 후 허씨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획을 긋는 중대한 전기가 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부미방)에 연루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과거 우방으로만 여겼던 미국의 존재가 완전히 새롭게 규정된다.

부미방 사건은 광주항쟁으로 도피생활을 하고 있던 김현장을 통해 '5·18 광주'의 진상을 알게 된 고신대 학생 문부식·김은숙 등이 미문화원에 불을 지르고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유인물을 뿌리고 도망간 사건이다. 허진수씨는 이 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된 김현장과 주범인 문부식·김은숙을 소개해주고, 그들이 사전 합숙교육을 하고 이후 도피처로 활용했던 가톨릭 원주교육원(원장 최기식)을 연결시켜줬다는 이유로 공범이 됐다. 재판에서 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83년 성탄절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석방 후 기독교청년운동 시절 알게 됐던 마산 한교회 신석규 장로의 권유로 창원에 오게 됐는데, 여기서 한교회를 거점으로 한 마산의 운동세력들과 교우를 트게 된다.

80년대 마창지역 거점 한교회서 수많은 운동가 배출...집중탄압

한교회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80년대 초·중반 마창지역 민주화운동의 핵심거점이었다.

박진해 마산MBC 사장이 보관해온 83년 5월 20일자 입당예배 안내전단에는 한교회의 약사가 실려있다. 81년 9월 6일 황주석(작고·당시 마산YMCA 간사·전도사)·신석규(요가운동가) 등 13명이 경남요가협회 마산지부에 모여 첫 예배를 한 것을 시초로 잡고 있다. 이후 82년 3월 '한교회'라는 이름이 만들어지고, 82년 8월 황주석 전도사가 떠난 후 이상익(마산YMCA 총무) 준목이 그해 12월 정호진 전도사 부임 때까지 시무를 한 것으로 돼 있다.

83년 1월 운영위원회가 꾸려지는데, 2월 6일 발행된 주보 창간호에는 정호진 운영위원장과 총무 김정석을 비롯, 김양숙·이영환·신석규·박명희·이상익·서익진·정혜란·문경범·이용한·서일미 등의 운영위원 명단이 실려 있다. 또 주보편집 책임자는 박진해였다.

사업계획에는 마당극 <암태도> 공연과 노동절 기념예배, 학생의 날 기념예배 등이 잡혀 있었다.

이상익씨의 회고에 따르면 83년 3·15의거 때 박영주·이재업·유경호 등이 시국관련 유인물을 뿌린 혐의로 구속됐는데, 이 사건으로 교회가 정보기관에 노출됐고 집중감시를 받기 시작됐다고 한다.

이상익씨는 "정보기관이 전 학교에 공문을 보내 한교회에 출석하는 학생들을 색출하게 했고, 실제로 고교생 행사가 있을 때 모 여상에서는 선생들을 행사장 입구에 배치시켜 행사장 출입을 못하게 검문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또 YMCA 이사장으로 있던 모 여상 교장은 당시 YMCA 총무(현 사무총장)였던 그에게 "한교회는 전라도 몇사람과 빨갱이들이 하는 교회 아니냐" "당신이 그 교회 괴수 아니냐"고 빈정댔다고 한다. 이후 이상익씨는 끊임없이 YMCA 총무직 사퇴 압력에 시달렸다.

6월항쟁 직전인 87년 4월 양덕동에 교회가 있을 때는 마산기독청년협의회(EYC) 주관으로 문동환 목사를 초청, '청년이여, 부활하라'는 주제의 연합예배를 했는데, 당시 유인물을 보면 이상익 준목의 인도로 신석규 장로가 기도를 하고, 문동환 목사가 '민족·민중·교회'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며, 허진수 집사가 구속자를 위한 헌금을 한 것으로 돼 있다.

이상익씨는 그날 예배에서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 추모식'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정보부·경찰·보안사까지 총동원되어 탄압을 가해왔고, 결국 기관의 압력에 못이겨 집 주인이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건물에서 쫓겨났다고 한다.(이상익, 나와 한교회, 2001)

85년 2월 가톨릭 신부 중심 경남민통련 창립...6월 항쟁 질질적 주도

85년 2월 6일에는 최초의 공개적인 민주화운동단체가 탄생한다. '경남민주통일국민회의'가 그것인데, 이 또한 가톨릭 신부들이 중심이었다. 이후 서울에서 민주통일국민회의와 민중민주운동협의회가 통합,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창립(85년 3월 29일)되자 경남도 그해 6월 12일 '경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으로 이름을 바꾼다. 창립당시 상임의장은 이응석 신부였고, 사무국장은 김영식 신부, 간사는 이병훈(가톨릭농민회 경남연합회)씨가 맡았다.

상임위원은 이응석 상임의장과, 허성학(신부), 도원호(농민), 이병훈(가톨릭농민회), 유경호(시민), 김영숙(시민), 조성국(인간문화재), 천규석(농민), 심재덕(시민) 등이었다.

2대 상임의장을 맡아 해산 때까지 경남민통련을 이끌었던 김영식 신부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 조직을 만들 때 워낙 사람이 없어 한교회 정호진 목사와 만나 의논했다고 한다. 진보적인 신부와 목사의 만남이었다. 김영식 신부의 기억에 의하면 당시까지만 해도 경남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참여하고 있는 신부는 김 신부와 이응석 신부, 둘 뿐이었다고 한다.

(그 후 85년 11월 25일 발행된 민통련의 <86 민주> 수첩에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66명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경남은 유영봉(마산교구청 사목국장), 이종창(진주 장재동성당), 김영식(거제성당), 이응석(함안 대산성당), 허철수(함안 함안성당) 신부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김영식 신부는 "당시 한교회에는 진보적이고 투쟁적인 청년들이 다수 모여들고 있었는데, 정호진 목사를 통해 반정부 투쟁을 하다 감옥을 다녀온 유경호를 만나면서 민통련 조직화는 빨리 진척이 되어 갔다"고 회고했다.(김영식, 민통련 활동을 회고하며, <민통련>, 2005)

경남민통련은 창립 이후 백기완·송기숙·이부영 등 재야인사들을 초청, 대중강연회를 여는 한편 85·86년 (주)통일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6월항쟁 국면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게 된다.

허진수 씨, “사회경제민주화 오히려 후퇴”

허진수씨는 재야운동가 중에서도 좀 독특한 인물이다. 우선 '친정'으로 여길 만한 소속이 없다. 대학 동문조직이나 노동조합에도 소속된 적이 없고, 심지어 기독교청년회를 통해 재야운동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교회에도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독실한 신앙심 때문에 청년운동을 시작했다기보다 운동을 위해 종교를 외피로 활용한 것이기 때문일까.

   
 
  허진수 씨.  
 
그는 87년 6월항쟁을 이끈 민주헌법쟁취 경남운동본부의 집행위원으로 6월 26일 창동 코아양과 앞에서 메가폰을 들고 선동연설을 하던 중 경찰에 연행돼 노태우의 6·29선언이 나오던 날까지 4일간 마산경찰서 유치장에서 구류를 살았다.

이후 지방자치제 부활로 95년 고향 거제에서 무소속으로 도의원에 당선, 98년까지 5대 의원을 지냈고, 부마항쟁정신계승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현재는 6월민주항쟁기념 경남추진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그에게 6월항쟁 20주년을 맞는 감회와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과제를 물어봤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앞으로 누가 정권을 잡는다 하더라도 더 이상 후퇴시킬 수 없을 정도로 이뤄졌다고 본다. 하지만 양극화라든지 비정규직 문제 등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답보 내지 오히려 후퇴한 측면이 있다."

그는 또 오늘날 사회운동세력이 과거에 비해 "논의를 기피하는 현상이 있다"면서 "우리사회의 미래에 대해 사회 제영역에서 활발한 논의가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통일은 20년 안에 이뤄질 것"이라며 "민주개혁세력이 아무런 준비없이 통일을 맞이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남도민일보가 앞장서서 그런 논의의 장을 열고, 통일에 대한 준비기구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이 기획취재는 문화관광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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