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직후 후환두려워 전국서 30만명 학살


경남에서만 약 3만명, 전국적으로 30만명 이상이 무참히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보도연맹 사건의 실체가 속속 밝혀지고 있다.
특히 최근들어 ‘민간인학살문제 해결을 위한 경남지역모임(경남민해모.대표 서봉석 산청군의원)’이 본격적인 진상조사에 착수하면서 50년 학살 당시의 군 명령체계와 우익단체 책임자.보도연맹 간부 등 가해자측 인물들의 면면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경남민해모 진상조사팀(팀장 전갑생.경남근현대사연구회 연구원)은 올 연말까지 도내 전 시.군의 민간인학살 실태조사를 마치고 ‘한국전쟁 전후 경남지역 민간인학살 백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진상조사팀은 지난 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상임공동대표 강정구)’ 주최 심포지엄에서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전갑생 팀장이 발제한 ‘경남지역 민간인학살사건의 진상’ 중 보도연맹 관련부분을 살펴본다.



△ 보도연맹의 결성 =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대한민국을 절대지지 수호하고 공산주의를 박멸하기 위해서 과거에 좌익단체에 들었거나 좌익운동한 사람을 모두 가입시켜 일정한 심사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정부가 만든 단체”였다.
이 단체의 가입대상자는 과거 좌익단체에 가담했거나 ‘방조자’ 혹은 ‘협조자’ 등이었고, 나중엔 지역별로 할당이 이뤄져 좌익과 무관한 청년들을 무차별적으로 가입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우익단체 간부들까지 보도연맹에 자진 가입하는 ‘모범’을 보이기도 했으며, 이들 우익단체 관계자들이 보도연맹의 주요간부를 맡아 맹원들을 ‘반공전선’으로 이끌거나 교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를 알 수 있는 자료로 당시 발행된 <남조선민보 designtimesp=11069>는 보도연맹 가입대상자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대한국민회를 위시한 민족진영 사회단체에 속한 자로서 본 연맹취지 및 강령을 찬성함으로 가맹할 수 있음.
△미소공위 마산시민축가 대회에 시민으로서 대열에 참가한 자.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지지한자.
△10월 폭동에 의식.무의식적으로 가담한 자.
△민주주의민족전선 산하 사회단체에 물자 및 금품제공 조달 협력자.
△민전 마신위원회 산하 단체에 적을 둔 자는 원칙적으로 가맹하여야 함.(단 반성 이탈하여 국민회에 가입한 자라도 가맹을 요망)
단체명 남로당(인민신민, 공산당관계자), 인공당, 민청, 농조, 민애청, 여맹, 민주학생연맹 외 15 다수.(50년 1월 8일자)
△ 도내 보도연맹 조직체계 = 경남의 보도연맹은 1949년 11월 이후 본격적으로 결성됐다. 49년 11월 10일 통영지부의 결성과 동시에 경남도본부 등이 속속 결성됐다. 1949년 11월 13일 부산 검찰청회의실에서 당시 서정국 검사장과 김동현 법원장, 정종철 부산시장, 최철용 경남도경찰국장, 지역 유지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보도연맹 경남도본부(당시 부산은 경상남도에 포함돼 있었다) 발기대회가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1월 20일 부산 중구 대청동 옛 남일초등학교에서 선포대회가 열렸다.
경찰악대의 연주속에 800명의 보도연맹원 등 2천여명이 참석, 대성황을 이룬 이날 선포대회에서는 보도연맹 중앙본부 지방조직 책임자 이용록씨 등 연맹의 중앙간부들도 상당수 참석했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 등에서 활동한 노백용씨가 도연맹 간사장을, 강대홍.성낙명.임순야.권일초.김필난씨 등 35명이 주요 조직책을 맡았다. 도연맹 명예이사장은 최 경남도경찰국장, 이사장은 신영주 경남도경 사찰과장이었다. 또한 마산지부의 결성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국민보도연맹 마산지부 결성 선포대회는 7일 오전 10시반 시내 부림극장에서 과오를 뉘우치고 새출발을 맹세한 전향자와 각계 각중등학생 다수 참석하에 개회되었는데 먼저 국민의례에 이어 김순정 국민회 부지부장의 개회사, 김종규씨의 경과보고, 김유지부 푸락치지도원의 취지강령낭독, 김 도연맹위원장(대독)의 인사가 있은 다음과 같은 마산지부위원장 발표, 서위원장 조이사장의 인사, 안 마산여학교장의 축사가 끝나자 이길우 맹원의 답사, 임상봉 맹원의 ‘나의 비판’의 열변이 있은 다음 만세삼창으로 폐회하였다.
△지도위원회 : 검찰지청장(위원장) 경찰서장(이사장) 위원 시장.창원군수.형무소장.경찰서 사찰계장.
△상임지도위원 : 차석검사.경찰서사찰계장, 간사장(미정, 이후 정인수), 사무국장 김종규, 총무부 정인수, 보도부 김순정, 사업부 김종신, 선전부 최광림, 조직부 배린, 재정부 박양수, 부인부 미정.
△ 도내 학살규모 = 이렇게 조직된 보도연맹원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50년 7~8월 사이에 집단학살되고 말았다. 정부가 책임지고 보호.지도하겠다면서 조직한 후 각종 반공강연회 등에 동원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후환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재판도 없이 불법처형해버린 것이다.
50년 7월 8일 당시 이유성(중령) 마산위수사령관과 김성삼(대령) 진해군항사령관은 마산.고성.창원.통영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정부에서는 송요찬 헌병사령관이 7월 12일 “필요에 따라 법원의 허가없이 보도연맹원을 예방구금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민주신보, 50년 8월 2일자) 이에 따라 이유성은 7월 15일 보도연맹원 전원을 ‘예방구금’했는데, 해당 지역은 거제.통영.마산.창원 일부 지역이다. 송요찬의 발표에 따라 전국적으로 연맹원들에 대한 ‘예방 구금’이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50년 7월 18일 강순원(해군대위.해군 진해통제부 정보 참모실 마산지국 파견대장)은 보련 맹원 구속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군경 수사기관의 합의 하에 비상사태에 대비한 조캇라고 밝혔다. 또 같은 날 이유성 마산지구 위수사령관은 기자회견에서 보도연맹원 문제와 관련 “우리 수사기관에서 조사하여 2, 3일 내에 잘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남조선민보, 50년 7월 19일자)
그러나 이날 이후 신문에는 어찌된 일인지 보도연맹원에 대한 보도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때부터 대대적인 학살극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경남민해모는 이렇게 학살된 경남도내 희생자 수가 적어도 3만여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우선 마산지역만 1681명이 바다에 수장됐고, 김해와 창원군 일부지역에서 750명, 김해 진영에서 335명, 김해 대동면 주동광산과 인근 숯굴에서 400명, 거제에서 878명이 학살됐다.
또 진주시 명석면에서도 약 718여명이 총살됐고, 진양군 금산면에서 100명, 사천에서 100명, 함안군 여항면 여양리 둔덕마을(현 마산시 진전면)에서도 20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주민들의 증언에 의해 확인됐다. 이밖에도 울산 869명, 창녕군 200명, 삼랑진 200명, 통영 915명, 양산시 350명, 밀양시 300명, 남해군 162명, 하동군 150명(매티재), 함안군 200명, 고성군 100여명 등으로 약 8393명이다. 일부 지역과 겹칠 수 있는 자료이긴 하지만 50년 9월 3일자 <해방일보 designtimesp=11089>는 진주시 명석면과 산청.하동 등지에서 모두 5000여명이 학살됐다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계산이 가능한 숫자만 해도 당시 경남에선 적어도 1만명 이상이 보도연맹원 사건으로 희생됐다.또 당시 경남에 소속돼 있던 부산지역에서도 형무소에 갇혀있던 보도연맹원과 정치범 5000여명을 포함, 약 1만여명이 학살됐고, 마산형무소와 진주형무소(500여명, 명석면 신촌마을)의 정치범들도 대부분 학살당했다고 보면 희생자 수는 훨씬 늘어난다. 뿐만 아니라 최근 사회단체에 의해 유골이 발굴된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뒷산의 500여명과 공비토벌과정에서 무고하게 학살된 거창.산청.함양학살사건 희생자 1700여명, 산청군 시천.삼장학살사건 200여명 등 보도연맹 이외의 사건까지 모두 합치면 적어도 부산.경남에서만 대략 3만여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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