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 미군 회고록 통해 처음 밝혀져…"진동 도로변 능선 장악 위해 사용"

베트남전 당시 한 마을에 네이팜탄이 투하된 직후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 퓰리처상을 받은 AP통신 닉 우트 기자의 사진.
가장 잔혹한 대량살상무기로 통하는 네이팜(napalm)탄이 한국전쟁 초기 마산 진동에서 최초로 투하됐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한국전 당시 강원·충북·경북 일대에 3만2000여톤의 네이팜탄이 사용됐다는 사실은 <부산일보> 탐사보도팀에 의해 밝혀진 바 있지만, 최초 투하지역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시기도 주로 50년 12월 이후부터 본격 사용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경상대 대학원 사회학과 김경현씨는 최근 제출한 <6·25 전쟁 시기 진주지역의 사회사>라는 석사학위 논문에서 참전 미군 앤드류 기어 소령의 회고록을 인용, 전쟁 초기인 50년 8월 9일 인민군이 포진해 있던 진동-마산 도로변 능선에 네이팜탄이 최초로 사용되었다고 밝혔다.

경남도민일보가 김씨를 통해 입수한 앤드류 기어의 회고록은 진주가 함락된 직후 미군의 킨 작전이 이뤄지던 8월 9일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조오 피건은 진동-마산 도로를 내려다보는 능선을 장악할 임무를 띠고 오전 9시 직후에 공격을 시작했다. … 적의 맹렬한 총포격으로 전진은 느렸다. … 피건은 지원 포격을 요청했다. 제임스 데이비스 하사는 전방으로 나가 폭격대비용으로 항공표지판을 설치했다. 한국전 참전 이후 최초로 해병 코르세어기가 네이팜탄 공격을 가해 적에게 큰 손실을 안겨 주었다.'

이같은 기록은 전쟁 당시 진동 전선 일대 마을 주민들의 증언과도 상당부분 부합하고 있다.

마산시 진전면 대정리 김종년(81) 할머니는 폭격 이후 돌아와 본 마을은 "온통 숯덩이였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집이란 집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큰 소나무가 엄청 있었는데 다 타고 벌판이 됐더라"면서 "나중에 말을 들어보니까 하늘에서 무슨 폭탄 같은 게 떨어지더니 시뻘건 불덩이로 확 퍼졌다고 하더라"고 증언했다.

또 양촌리 김영순(80) 할머니도 "피난 갔다 돌아오니 집이고 뭐고 몽땅 불타고 없었다. 아주 폭삭 내려앉아서 잿더미만 남았다. 우리집만 그런 게 아니라 옆집 앞집, 윗집 할 거 없이 완전히 꺼먼 숯만 남았다"고 말했다.

진전면 오서리의 한 할머니는 당시 피난을 가지 못했던 마을의 한 아주머니의 집에 폭탄이 날아와 집이 불바다가 되면서 아주머니가 타죽었다고 말했다.

이어 구산면 일대 해안 마을도 주민들이 거제도에 피난 갔다 돌아와 보니 마을 전체가 불타고 없었다고 증언했다.

김경현씨는 또 그후 9월 27일 진주를 탈환한 미군이 산청과 함양을 향해 진격하다가 저지당하자 공중지원을 요청했는데, 이 때 출격한 미F-51 전투기도 네이팜탄과 로켓탄 등을 퍼부었다는 기록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와 관련, "미군의 폭격에 의해 초토화된 진주 시가지에도 네이팜탄 또는 그에 버금가는 소이탄이 집중 투하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한편 김씨는 이 논문에서 전쟁 초기 진주와 서부경남 일대에서 자행된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 학살사건을 밝혀냈으며 이어진 인민재판과 부역자 처단과정 등을 기술하면서 "전쟁 초기의 보도연맹원 학살이 이후 반복적인 보복학살로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민중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며 "그런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6·25전쟁은 '시민전쟁'이자 '생존전쟁'이었다"고 규정했다.

/김주완·이균석·윤유빈 기자

※한편 경남도민일보의 이 보도에 대해 한 연구자로부터 "한국전쟁 중 처음으로 마산에 네이팜탄이 투하된 것이 아니라, 해병 코르세어기에 의한 네이팜탄 투하가 마산에서 처음이었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코르세어기에 의한 투하가 아닌 네이팜탄 투하는 마산 이전에도 있었다"는 제보를 접수했다.

경남도민일보는 이에 대해서도 취재해 후속보도할 에정이다.

네이팜탄이란…
3000℃ 고열발생 반경 30m 불바다 피부 녹고 질식해   
 
세계적으로 가장 잔혹한 살상무기로 알려진 네이팜탄은 알루미늄과 비누 ·팜유(油) ·휘발유 등을 섞어 젤리 모양으로 만든 네이팜을 연료로 하는 유지소이탄(油脂燒夷彈)을 뜻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비행기에서 투하하는 방법으로 쓰였는데 3000℃의 고열을 내면서 반지름 30m 이내를 불바다로 만들고, 사람을 타 죽게 하거나 질식하여 죽게 한다. 투하된 지역은 일순간에 초토화되면서 모든 생명체를 말살시키는 비인도적인 무기로 현재는 국제사회에서 사용이 금지돼 있다.

네이팜탄의 위력은 베트남전쟁 당시 한 장의 사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AP통신의 닉 우트기자가 1973년 베트남전 당시 촬영한 사진은 미군이 한 마을에 네이팜탄을 투하해 온 마을이 불길에 휩싸인 상황에서 불길 속을 겁에 질린 한 소녀가 울부짖으며 알몸으로 뛰쳐나오는 장면이다.

전쟁의 참화를 생생하게 보여준 이 사진은 닉 우트기자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주었다.

"네이팜탄을 맞으면 살이 녹아내린다. 얼굴에서 가슴 위로 녹아내려 엉겨 붙는다. 이윽고 피부가 썩기 시작하면 도려내야 한다. 잘라 낼 수 없는 부위가 머리뿐일 때도 있다"고 미국 기자는 기록하고 있다. 닉 우트 기자의 사진에 찍힌 9살 소녀의 이름은 킴푹으로 당시 몸에 걸친 옷조차 태워 없애버릴 정도로 강력했던 네이팜탄 때문에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채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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