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역사특강...배항섭 교수 "권력쟁취 · 정치개혁 위해 서로 필요" 주장 눈길

"대원군은 정권 장악을 위해 전봉준(동학농민군)이 필요 했고, 전봉준도 자신이 내세운 보국안민을 보다 빨리 이루기 위해 대원군을 필요로 했다."

14일 오전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열린 ‘시민을 위한 동학농민혁명 역사특강’에서 성균관대 배항섭 교수가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유은상 기자 yes@idomin.com
동학농민전쟁 당시뿐 아니라 이전부터 전봉준과 대원군 간에 접촉을 통한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끈다.

동학농민전쟁과 관련한 자료와 연구가 이어지면서 농민전쟁에 대한 실상과 성격이 또렷해지고 있지만, 전봉준과 대원군 간의 '밀약설'은 아직 명쾌하게 해명되지 않은 과제라는 점에서 더 도드라져 보인다.

배항섭 성균관대 연구교수는 14일 오전 10시 30분 마산 양덕동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열린 '시민을 위한 동학농민혁명 역사특강: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서 이 같은 얼개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배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1892년 10월 공주집회(교조신원운동)부터 1894년 9월 제2차 동학농민군 봉기에 이르는 과정 속에 대원군과 전봉준(동학)의 관계가 '심상치'않았음을 드러난 자료를 근거로 설명했다.

먼저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기 대원군과 접촉했다는 사실에 대해 "1893년 2월 동학교도들의 광화문 복합상소가 일어났을 때 중앙정계와 서울에 주재하던 각 국의 외교관들 사이에서 동학교도의 배후에는 대원군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면서 정교는 <대한계년사>에서 '광화문 복합상소 때에 대원군은 몰래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와서 모이게 하고 반역을 도모해 그의 손자 준용을 추대하려 하였으나 마침내 성사되지 못하였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대원군 측이 늦어도 교조신원운동 시기부터는 동학교도를 이용하고자 하였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893년 2월 복합상소를 전후한 무렵부터 동학교도들이 정부나 관변, 그리고 민간에 제시하는 글이 그 내용 면에서 종교적 요구가 완전히 사라지는 대신 척왜양이 전면에 등장한 점도 대원군과 일부 교도들 사이의 접촉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는 점도 덧붙였다.

그는 이러한 사실들이 "정치적 성향 면에서 대원군과 전봉준 사이에 일치되는 면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전봉준이나 농민군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행동이 반란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당시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대원군과 척왜양이라는 주장이 필요했다"고 해석했다.

그는 그럼에도 전봉준과 대원군의 연관문제가 역사학계에서 잘 다뤄지지 않고 있는 까닭에 대해 "해방이후 한국 역사학계의 최대 과제는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것이었다"면서 "이 때문에 학계가 반제국주의·반봉건의 기치를 내건 동학농민전쟁과 당시 수구세력을 대표했던 대원군을 연결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가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어도 결국에는 밝혀지기 마련"이라며 "전봉준과 대원군 간의 '밀약설'은 농민전쟁의 큰 흐름을 이해하고 농민전쟁의 성격이나 접근방법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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